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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슈타이너 인지학의 예술관에 대한 비판 - 미하엘 엔데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 인지학의 예술관에 대한 비판 - 미하엘 엔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3. 8. 00:29

* 이 글은 미하엘 엔데가 말년의 병상에서 일본인 번역가 다무라 도시오와 행한 대담의 일부이다. 엔데는 슈타이너의 인지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작가지만 인지학적 예술관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는데, 발도르프 교육이나 인지학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열린 자세로 이런 비판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인지학의 예술에는 전부터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있었어요.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상)에게서 배운 많은 것이 제게는 아주 소중해요. 삶에 대한 제 시각의 기본 바탕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예술에 관해서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슈타이너의 예술 사상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렵거든요. 지금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술이든, 그러니까 시든 그림이든 말이에요, 밝고 환한 회화조차 어딘가 어둠이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어둠은 반드시 있어야 해요. 그저 밝기만 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인지학의 그림을 보면, 한결같이 어둠이 빠져 있죠.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식물적인 느낌이 들어요. 피가 모자란 느낌이랄까요. 날카로움도 없고요.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모니로만 구성된 음악이 있습니다.


명상용이라는데 하모니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대로 둡니다. 나는 이 음악에는 언제나 반대예요.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아니, 이건 아니야. 부조화도 있어야 하고, 날카로움과 잔혹함도 존재해야만 해.'


이것들이 모두 위대한 형식에 통합될 때 비로소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인지학의 예술에는 한계가 있어요. 오이리트미(언어를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동작 예술로 슈타이너가 창안했다)조차 미학은 요정의 윤무일 뿐입니다.


결국 부르주아적인 발레의 관념인 거죠. 물론 동작은 다르지만 이면에 들어 있는 예술관은 사실 발레에서 따온 것과 마찬가지로 우아한 것이죠.


이 유럽 특유의 미학은 등뼈를 곧추세우는 것에 있어요. 타문화의 무도와는 달라요.


반면에 인도 미학의 기본은 S자형 선입니다. 인도인은 직선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아요. 직선은 금세 부러지니까요. 두말할 것 없이 일본 미학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일본 미학에서는 무릎이 항상 약간 꺾여 있습니다. 항상, 이렇게, 반쯤 무릎을 구부리고...... 똑바로 서 있지 않고 항상 땅을 향해서......


노能의 특징적인 자세예요. 늘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는 자세죠. 걸음걸이도 독특해요. 발바닥을 항상 무대에 착 붙이고 있다가 마지막에 살짝 들어서 톡톡 두드립니다.


오이리트미는...... 발레 「백조의 호수」와 다를 바가 없어요. 낭만적이고 우아한 관념에서 벗어나는 게 좀처럼 쉽지 않죠. 그렇다고 계속 그것만 고수한다면 시시해지고 말 겁니다.


언젠가 동양의 것들이 서양으로 넘어와 전혀 새로운 게 될지도 모를 일이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데, 일본인들은 예술에 어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날카로움도요.

 

 

 

[출처 : 미하엘 엔데, <미하엘 엔데의 글쓰기>, 글항아리, 2022: 20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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