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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신비주의와 슈타이너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

신비주의와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4. 9. 23:40

* 이 글은 <루돌프 슈타이너 자서전 - 내 인생의 발자취>의 일부입니다. (XI. 1890 : 187-192) 슈타이너가 신비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슈타이너를 신비주의자로 보는 시각은 서양에도 상당히 많이 퍼져 있고, 인지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비주의와 신비주의자에 대해 슈타이너가 직접 언급한 다음의 글을 음미해 보시길 바랍니다. 발도르프교육 또는 인지학을 공부하는 분이라면 이 <자서전>은 반드시 구입하고 참고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밑줄은 연구자의 것) 

 

* Idee : 관념(idea) ; 사고(thaught) ; 의견, 의도, 생각(notion) ; 이념

 

 

 

이렇듯 내 인생의 첫 장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내면에서 사람의 영혼이 지닌 특정한 지향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 지향 가운데 하나가 신비주의였다. 나는 다양한 시대에 걸친 인류의 정신 발달에서 나타난 신비주의, 말하자면 동양의 지혜, 신플라톤주의, 중세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신비론 등 내 영혼의 눈에 비친 신비주의와는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다. 나의 유별난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정신적인 것이 분명히 살아 있는 관념의 세계(der Welt der Ideen)를 신비주의자들은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듯했다. 인간이 내적 만족을 얻겠다면서 관념과 함께 정신적인 것이 빠진 내면으로 침잠하려는 것은 진정한 정신성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런 신비주의에서 나는 빛에 이르기는커녕 정신적 암흑에 이르는 길만을 볼 수 있었다. 정신의 실재성은 직접적으로 관념 안에 짜여 있지 않지만, 그 관념을 통해서 사람은 이 정신의 실재를 체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영혼이 관념들을 피한 채 정신의 실재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인식의 무능처럼 여겨졌다.

 

그럼에도 신비주의를 향한 인류의 노력에는 끌리는 것도 있었다. 그건 바로 신비주의자들의 내적인 체험 방식이다. 그들은 인간 현존재의 원천을 관념적으로 관찰해서 외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에서 그 원천과 함께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내게 분명해진 또 하나의 사실은, 관념 세계의 온전하고 분명한 내용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과 함께 영혼의 밑바닥으로 침잠하는 사람은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내적 체험 방식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신적인 이상세계의 빛을 내적 체험의 온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내가 보기에 신비주의자들은 관념들 안에서 정신을 볼 수 없어서 내적으로 관념을 앞에 두고 얼어붙은 사람들 같았다. 신비주의자들이 관념에서 체험하는 한기는 그들로 하여금 관념에서 벗어남으로써 영혼에 필요한 온기를 구하도록 강요한다. 

 

아직 불확실한 정신세계에 대한 체험을 확실한 관념에 각인하는 바로 그때, 나는 내면에서 영혼적 체험의 온기를 느꼈다. 정신이 스며 있는 관념과 함께할 때 느끼는 온기, 곧 영혼의 편안함을 이 신비주의자들이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일러주었다. 이런 관념과 함께할 때마다 나는 늘 정신세계와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것 같았다.

 

신비주의자는 물질주의에 물든 자연관찰자의 입장을 약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는 듯이 보였다. 자연관찰자는 정신세계에 대한 관찰을 거부한다. 이는 정신세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간은 오직 감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각적 이해가 한계에 부딪히는 곳을 인식의 한계로 여긴다. 신비주의자는 사람의 관념 인식에 관해 물질주의자와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 보통이다. 관념은 정신적인 것에 다다르지 못하며, 이 때문에 관념을 인식할 때는 늘 정신적인 것의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신비주의자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신비주의자는 정신에 이르기를 원하기 때문에 관념과 무관하게 내적인 체험에 의지한다. 그 결과, 신비주의자는 관념에 대한 인식을 순전히 자연적인 것을 인식하는 일로 한정함으로써 물질주의에 빠진 자연관찰자에게 동조한다.

 

그러나 관념을 지니지 않고 영혼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오로지 느끼기(des blößen Fühlens)만 일어나는 내적 영역에 도달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인식의 길이라 부르는 방법으로는 정신적인 것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정신적인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영역을 벗어나 감정(das Gefühle)의 영역 안으로 침잠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실재와는 상관없는 공상적인 말장난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물질주의적 자연관찰자는 그와 같은 견해에 자신도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럴 때 이 자연관찰자는 감각적인 것에 맞춰진 관념 세계에서만 인식의 올바른 토대를 찾고, 정신에 대한 인간의 신비적 관계에서는 순수히 개인적인 어떤 것을 본다. 그 개인적인 것에 기울거나 기울지 않는 것은 각자의 성향에 달린 일이지만, 어느 경우든 '확실한 인식'의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는 방식으로 그 개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과 정신적인 것의 관계는 '주관적인 느낌’에 전적으로 맡겨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 내 영혼의 눈에 보이자, 내적으로 신비주의를 반대하는 힘이 마음속에서 점점 더 강해졌다. 나로서는 내적인 영혼 체험을 통해 정신적인 것을 통찰하는 일이 감각적인 것을 관조하는 일보다 훨씬 더 확실했으며, 이런 영혼 체험에 인식의 한계를 설정하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순전히 감정에 의지해서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길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럼에도 신비주의자들의 체험 방식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정신세계에 대한 나의 견해와 조금은 닮아 보였다. 신비주의자는 관념 없는 것과 함께함으로써 정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고, 나는 정신의 빛 안에 있는 관념을 통해서 정신과의 합일을 추구했으니 말이다. 나의 통찰이 '신비주의적' 관념 체험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런 영혼의 갈등을 해결하고 극복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것에 대한 진정한 통찰은 관념의 효력 범위를 밝혀줄 뿐 아니라 개인적인 것에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것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영혼의 본질이 정신세계를 통찰하는 기관으로 변형될 때 어떻게 인간 안에서 개인적인 것의 작용이 멈추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어려웠던 것은 내 저술에서 나의 통찰을 표현하는 형식을 찾는 문제였다.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관찰에 대하여 그때그때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찾아낼 수는 없다. 나는 두 형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내가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관찰의 영역에서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형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아니면 신비주의적인 감각에 기운 저술가들이 이용하는 형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후자를 통해서는 내가 부딪힌 어려움을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쓰이는 표현 형식은 애초부터 그 내용이 물질주의적으로 구상되었다 하더라도 내용이 풍부한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자연과학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개념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정신적인 것을 가리키는 개념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로써 내가 꼭 말해야 할 내용을 위한 관념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비주의적 형식을 사용할 때는 그런 관념적 성격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신비주의적 형식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밖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가리키지 못하고 오직 사람 안에 일어나는 주관적 체험만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체험을 묘사하기보다는 어떻게 정신세계가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정신 기관들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지 입증하고자 했다. 

 

이를 바탕으로 차츰 관념의 형태가 생겨나서, 나중에 나의 《유의 철학》으로 발전해 갔다. 나는 그 개념들을 구축할 때 나의 내면이 신비주의적 변덕에 좌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개념을 통해 드러나야 할 것에 대한 궁극적 체험이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신비주의자의 내적 지각과 그 성질이 같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차이는, 나의 서술에서는 사람이 몰입하며 자기 안에 외부의 정신세계를 객관적 현상으로 들여오는 반면에, 신비주의자는 자신의 내면생활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객관적인 정신의 참모습을 지워버린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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