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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 및 사회과학

실증주의 과학과 존재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25. 10:40

실증주의 과학과 존재론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과학(science)의 사전적 의미는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입니다. 넓게 보자면 학문 전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과학은 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학문 체계입니다. 철학이 사유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등을 연구한다면, 과학은 마찬가지의 것을 단지 사유뿐 아니라 구체적 실험을 통해 밝혀내는 작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철학보다 과학을 더욱 신뢰합니다.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대중적 인기를 끈다 해도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은 과학자의 말입니다. 철학이 사유의 차원에 머무는 한계가 있다면 과학은 실천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철학적으로 탐구를 해도 비행기를 만들 수 없지만, 과학적으로는 달에도 다녀올 수 있는 비행선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과학, 다시 말해 전통적인 과학 개념은 경험주의 또는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에 대한 개념은 특정한 과학 사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과학에 대한 개념은 이렇습니다. “과학이란 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자연의 원리나 법칙을 찾아내고, 이를 해석하여 일정한 지식 체계를 만드는 활동을 말한다.”(비상학습백과 중학교 과학) 실증주의는 자연의 원리나 법칙을 찾을 때 우리가 물리적으로 경험한 사실만이 과학의 토대가 된다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실증주의 과학관은 낡은 관점입니다. 교과서에는 아직도 실증주의적 과학 개념이 실려 있지만 현대과학에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실증주의 과학 개념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실증주의 과학에 대한 비판

 

실증주의 과학관에 대한 비판은 1970년대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반증주의를 내세운 포퍼에 이어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머스 쿤, <방법에 반대한다>를 통해 상대주의를 밀어붙인 파울 파이어아벤트가 대표적인 학자들입니다. 사실상 현대과학에서 실증주의 과학관은 진작에 폐기되었지만 경제학 분야에서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주류 경제학은 모두 실증주의적 관점을 채택합니다. 따라서 경제학이 진정한 과학이냐 하는 것은 논쟁 사안입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대중의 인식이 바뀌는 데 시간이 걸린 것처럼 과학의 새로운 개념이 자리를 잡는 데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실증주의 과학관은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경험론에 기초를 둡니다. 흄은 로크와 버클리를 계승해 경험론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인식이란 매우 강하고 뚜렷한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강렬한 인상이 시간이 지나며 정신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관념입니다. 모든 추상적인 관념은 개별적인 감각 내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흄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경험입니다. 나무에 불이 붙고 연기가 나는 것도 불이 붙어서 연기가 나는 게 아니라(필연적 연관성) 그저 우연적이고 개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식입니다. 불이 붙었다고 연기가 난다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일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경험 자료를 수집하고 일반화를 거쳐 이론을 구성하는 활동이 바로 과학이라고 보는 상식적 견해는 흄의 경험론에 기반합니다. 논리실증주의는 관찰에서 일반화로 나아가는 귀납적 방법이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에도 동일한 경험이 반복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리실증주의는 연역(deduction)과 가설의 검증이야말로 유일한 과학적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일반화를 통해 이론을 구성한 뒤 이 이론에서 가설을 연역하고 경험 자료로 가설을 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험 자료에서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귀납이라면, 연역은 일반 이론에서 특정 경험으로 추론이 진행됩니다. 따라서 이론이 옳다면 이론은 여러 가지 예측을 가능하게 해 주고, 예측된 가설은 다시 경험 자료를 통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경험론은 경험에 앞서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식 능력이 있다는 합리론 철학자들의 주장을 부인합니다. 오로지 경험적 시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 관념만이 정당한 지식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별 지식이란 감각에 의해 지각된 사건들에 관한 지식이며, 그러한 사건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보여 주는 지식을 일반적 지식이라고 칭합니다. 경험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감각 지각이야말로 지식을 얻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며, 경험적 근거가 없는 사변들은 다 가짜 지식이 됩니다. 형이상학이나 도덕, 미학, 정치 이론 등 인지적 주장은 죄다 근거가 없는 사변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증주의 과학은 경험하여 증명할 수 없는 학문을 비과학으로 몰아붙이는 한편, 인과적 힘을 발견하려는 시도 역시 기각했습니다.

 

반일원론과 반연역주의

 

실증주의 과학관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하나는 반일원론으로 과학이 누적적이고 단선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일원론적 견해에 대한 비판입니다. (일원론monism이란 다원론과 달리 세계에 대한 설명에서 유일의 궁극적인 원리나 개념을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기존에는 실증주의 과학을 유일한 과학 개념으로 여겨왔습니다.) 반일원론자들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과학이 차곡차곡 하나의 길을 따라 발전해 왔다는 믿음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과학이란 더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진행되는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다는 주장입니다. 쿤 같은 과학사학자는 패러다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과학 지식의 생산과 변형에서 사회적 요인의 중요성을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반연역주의로 실증주의자들이 연역적으로 과학을 설명하는 행위를 비판합니다. 연역이란 초기조건과 보편적 법칙의 집합들로부터 어떤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반연역주의자들은 과학의 설명을 보편적 법칙과 초기 조건의 연역 논증 구조로 환원할 수 없다고 봅니다. 어떤 명제에서 논리적 절차를 밟아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 과학적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명과 일반화를 동일시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일반화의 오류Generalization error란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여 범하는 생각의 오류입니다. 인간이나 사물 혹은 현상의 단면을 보고 저 사람 또는 저것은 당연히 이러할 것이다라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과학의 설명은 피설명항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개념이나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학의 법칙이나 인과 연관에는 사건들의 규칙적 연쇄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대상이 이해될 수 있도록 제시된 과정이나 기술account을 설명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기술은 설명항explanans이라 부르고, 언명, 사건, 상태, 과정, 법칙, 이론 등이 될 수 있는 사물은 피설명항explanandum이라고 부릅니다.)

 

실증주의 과학관을 비판한 반일원론과 반연역주의는 분명히 의미 있는 통찰을 보여주지만 이들 역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반일원론은 지식의 역사적 변동에 주목하면서 그 지식의 대상이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론으로부터 독립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해 초관념론적 회의주의를 조장했습니다. 과학의 발달에서 외적으로 진보적이고 누적적인 특징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동시에 불연속적 현상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반일원론으로 이 두 특성을 조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경쟁하는 패러다임들의 이론이나 법칙은 공약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쿤이나 과학은 신화나 부두교 같은 지식과 비교해 더 우월하지 않다고 단언하는 파이어아벤트는 공약 불가능한 이론들 사이에서 합리적 선택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답하지 못한 채 상대주의로 붕괴하게 됩니다.

 

(과학에서 어떤 진술들이 갈등을 일으킬 때 합리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규칙이 적용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 진술들을 공약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는 말은 진술들이 합리적 합의에 이를 수 없는 상황을 뜻하며, 기존의 진술에서 새로운 진술이 지배적인 이론이 될 때 패러다임이 바뀐다고 표현합니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에 따라 상이한 이론을 선택하며, 상이한 패러다임에서의 이론 선택은 공약 가능하지 않습니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어떤 한 시대에서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를 말합니다.)

 

반연역주의자들은 과학자들의 실제 설명이 단순한 경험적 규칙성으로서 법칙이나 인과 관계가 아니라 그런 경험적 규칙성을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 지식의 생산에서 모델이나 과학적 구조의 구성을 강조하면서 그것들을 세계에 실재하는 사물들과 연결하는 대신 정신이나 과학 공동체의 문제로 간주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추론과 상상력을 구사해 고안한 모델이나 발견 도식이 정신 속에 있는 것인지, 세계 속에 있는 것인지 구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존재론을 부정하고 상대주의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반연역주의는 과학적 상상력의 종합화 활동을 강조하지만, 과학과 그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을 해명하지 못합니다.

 

반일원론과 반연역주의는 실증주의 과학의 인식적 오류를 지적하는 성과는 보였지만 극단화되면서 초월적 관념론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로이 바스카는 이들이 실재하는 세계에 관한 견해, 즉 존재론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 이어지는 과학철학 이야기 시리즈는 아래의 책들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로이 바스카, 이기홍 옮김,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후마니타스, 2007

앤드류 콜리어, 이기홍 옮김, 비판적 실재론, 후마니타스, 2010

이기홍,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한울아카데미, 2014

이기홍, 로이 바스카,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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