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폐쇄 체계와 개방 체계 본문
폐쇄 체계와 개방 체계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과학에서 실험은 왜 필요한 걸까요? 우리가 실험을 하지 않고도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굳이 실험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지식의 대부분은 실험을 통해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일상 경험을 통해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일상의 경험을 좀 더 정교한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실험을 통해 밝혀내려고 했습니다.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세계에 개입하여 자연에서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 사건들을 ‘비자연적인’ 연쇄로 만들어냅니다. 이런 활동이 가능하려면 실험 조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유형이, 그 조건이 없을 때 일어나는 유형과 다를 것이라는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인위적 통제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다를 것이라는 판단은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의 연쇄와 그 연쇄를 일으키는 객체 또는 발생 기제를 범주적으로 구분할 수 있고, 그 기제들이 인간과 독립해 존재해 작동한다는 존재론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세계가 구조화되어 있고 분화되어 있다는 철학적 가정이 실험의 전제입니다.
과학자는 실험을 통해 세계에 존재하고 작동하는 여러 요인들 가운데, 문제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하는 특정한 객체나 기제의 작동을 다른 요인의 간섭에서 인위적으로 분리하고 고립함으로써 그것이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작동할 때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경험적으로 알아내려고 합니다. 즉, 과학자들의 활동은 그들이 과학적 탐구를 통해 설명하려는 사건과 과정을 일으키는 것이 자신의 생각, 행위, 경험과 독립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인간과는 상관없이 실험 조건 외부의 자연에 지속하여 존재하면서 힘을 행사하는 것들이라고 상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체계를 범주적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개방 체계(open system)이고, 다른 하나는 폐쇄 체계(closed system)입니다. 서로 다른 둘 이상의 기제가 함께 작동하며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개방 체계입니다. 세계는 여러 객체들이 그 자체의 속성에 따라 서로 간섭하며 작동합니다. 개방 체계인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날씨 예보가 종종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은 기상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폐쇄 체계는 몇몇 객체의 작동을 인위적으로 제약하거나 허용한 상태를 말합니다. 과학자가 특정한 기제만 작동하도록 실험을 구성했다면 폐쇄 체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계에서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황, 다시 말해 완벽한 폐쇄 체계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실험 상황에서 특정한 객체의 작동과 그 결과를 알아보기에 충분할 정도의 폐쇄는 만들 수 있습니다. 실험이란 어떤 기제나 과정을, 개방된 세계의 여러 간섭하는 힘들로부터 고립시켜 그 세부적 작동을 관찰하거나 특정한 가설을 시험하려는 시도입니다. 폐쇄 체계의 특징은 주어진 인과적 자극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특정 객체나 발생 기제를 폐쇄 체계 속으로 분리하고 고립시켰다면 우리는 흄이 말하는 경험적 규칙성, 즉 A라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건 B가 뒤따른다는 것을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 세계에서는 자연 발생적으로 사건들의 경험적 규칙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개방 체계에서 여러 객체는 서로 간섭하고 개입하며 작동하기 때문에 특정 객체의 작동 결과가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과학에서는 실험이 필요합니다. 실험은 다른 객체들과 더불어 작동하는 어떤 객체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실험은 인위적으로 폐쇄 체계를 만들어 다른 객체들의 간섭을 통제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특정 객체가 어떻게 작동하고 또 어떤 속성과 힘을 갖고 있는지 알아내고자 합니다. 과학자는 어떤 기제의 작동에 개입하여 '방해하거나 변경하는' 다른 요인들을 통제함으로써 그 기제가 고유의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들고 그 결과를 확인합니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기제를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세계에 존재하는 발생 기제와 그것의 작동, 그 작동의 결과인 경험적 사건들의 범주적 독립성을 전제해야 실험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가 실험에서 판별하고 확인하려는 것은 사건들의 경험적 규칙성이 아닙니다.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발생 기제의 존재와 작동 방식 또는 인과 법칙들입니다. 세계는 현상과 그것이 발생하는 기제와 구조로 층화되어 있습니다.
과학에서 실험은 세계에 존재하며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발생 기제와 구조에 접근할 수 있게 합니다. 과학에서 실험이 중요한 까닭은 실험을 통해 발견하거나 확인하는 발생 기제의 속성과 힘이 실험실 밖의 조건에서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실험실 밖의 세계는 대부분 개방 체계입니다. 그러나 실험이 개방 체계에서 사건이나 현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실험은 아무런 인식적 가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자연이라는 개방 체계에서는 특정 발생 기제의 작동이 다른 요인들의 간섭과 방해를 받기 때문에 그 결과는 사건의 경험적 규칙성이 아니라 경향으로, 즉 부분적 규칙성이나 절반의 규칙성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실험은 평소에는 현실화하지 않은 채 작동하는 발생 기제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입니다. 실험의 수행은 인과 법칙이 작동하지 않은 채 보유될 수도 있고, 실현되지 않은 채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으로 지각되지 않은 채 실현될 수도 있는 객체들의 속성과 힘이라는 존재론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과 법칙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경험적 규칙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발생 기제의 초사실적(transfactual) 작동, 즉 그것의 작동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작동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다른 기제들의 간섭과 영향에 의해 공동 결정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과 법칙의 작동은 경험적 규칙성 또는 사건들의 규칙적 연쇄를 결과로 내놓지 않습니다. 경험에 나타나는 사건의 유형들의 변이에 상관없이 인과 법칙은 초사실적으로 보편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실험가능성의 조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로써 존재론은 인식론으로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존재론은 세계가 사건들과 구조들의 구분으로 층화되어 있고, 폐쇄 체계와 개방 체계로 분화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학의 존재론적 기초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실험이 거의 없거나 결정적이지 않은 과학에 대해서도 성립합니다. 심지어는 실험 자체가 불가능한 분야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과학은 실제의 실험에 의해서라기보다 사유에 의해서 진행되어 왔고, 경험에 호소하기보다 사유실험을 통해 인과 법칙을 발견해 왔습니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발견, 즉 중력에 대한 이해는 사유실험에 기인합니다. 이것은 과학이 경험과 발생 기제나 구조를 구별하는 존재론에 기초하고, 실험의 폐쇄를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 경험적 규칙성이 아니라 특정한 기제의 작동에 따른 경험적 결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경험적 규칙성은 인과 법칙의 충분조건은커녕 필요조건조차 될 수 없습니다.
'과학철학 및 사회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내외 '과학 전쟁'(Science Wars)에 대한 해부 - 홍성욱 (0) | 2019.07.15 |
---|---|
사이비과학을 구별하는 문제, 과학자들이 나서야 한다 - 김우재 (0) | 2019.07.15 |
지식의 두 차원 - 타동적, 자동적 (0) | 2019.07.07 |
과학에서 인식론과 존재론 (0) | 2019.07.01 |
실증주의 과학과 존재론 (0) | 2019.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