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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 박재용 본문

과학철학

과학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 박재용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5. 26. 06:53

과학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케플러는 행성들이 타원궤도를 돈다는 사실을 밝혀낸 천문학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케플러를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이로 기억합니다. 그는 원래 수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수학자들이 많이들 그랬듯이 신플라톤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지요. 그는 연구 초기에 태양계에 행성이 6개밖에 없는 이유를 정다면체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플라톤주의는 기하학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에 따르면 수성에 외접하는 정다면체가 있고, 그 정다면체에 외접하는 금성이 있으며, 그 금성에 외접하는 정다면체와 그에 외접하는 지구 등등으로 설명했지요. 정다면체는 다섯 개밖에 없으니 그에 내접하거나 외접하는 행성은 여섯 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렇게 기하학적으로 이상적인 구조를 가지는 우주를 생각하던 그였기에 행성들의 궤도는 당연히 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플라톤이 우주의 모든 천체는 완전한 원운동만 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가 신뢰하는 관측천문학자인 튀코 브라헤가 평생에 걸쳐 관측한 자료를 보니 화성이나 목성의 궤도가 원이 아닌 겁니다. 튀코는 당시 최고의 관측천문학자였고, 그런 그가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년에 걸쳐 관측한 자료이니 자료가 틀렸을 리는 없는 거지요.

 

케플러는 천체는 원운동을 한다는 자신의 신념과, 관측 자료가 보여주는 실제 모습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합니다. 그리곤 마침내 행성들은 타원운동을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발표하지요. 과학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굳게 믿고 있는 신념 혹은 가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관측이나 실험을 통해서 확인한 사실과 다르다면, 미련 없이 자신의 가설을 다시 점검하고, 수정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이죠.

 

범죄 수사를 예로 들어봅시다. 예전에도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일련의 수사가 있었습니다.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살인의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주된 것이고, 거기에 범행도구를 확보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습니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의 수사관들은 주로 알리바이와 목적을 위주로 수사를 했지요. 그 사람이 죽어서 이득을 볼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한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수사 방법으로 가장 많이 쓰였던 건 고문이었습니다. 일단 알리바이가 불확실하고(불확실하다는 것이 용의자가 범죄현장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진 않습니다만) 동기가 충분하면 자백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극에서 자주 보는 것처럼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며 주리를 틀어대며 자백하기를 강요했지요. 그럼 용의자는 "소인은 억울하옵니다"라며 울부짖다가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자백을 하고 맙니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도 진범이 잡히긴 합니다만 억울한 사람이 없었을까요? 당연히 억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터입니다. 그래서 현대에선 증거우선주의를 택하고, 확실하게 범인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무죄라는 것을 용의자가 증명'하던 시대를 지나 '용의자가 유죄라는 것을 수사관이 증명'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의 전환은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디 서양과학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의 경우 추론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이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 현상을 누가 더 잘 설명하느냐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초기까지 이어집니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부자연스러운 실험 환경에서 증명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증명이 점차 중요해졌고, 실험과 관측을 통해 이를 확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갈릴레이는 그래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합니다. 또한 관성에 대한 사고실험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근대 실험물리학의 시조로 꼽히지요. 

 

갈릴레이 이후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관측과 실험을 하고, 그 사실을 공표합니다. 동료 과학자들은 그 실험을 자신이 반복해봅니다. 그리고 반복한 결과 또한 발표하지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자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그 이론의 진위를 확인했지요. 과학은 이런 엄격한 검증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검증이라는 과정을 참지 못하고 결과를 조작하거나, 엄밀한 실험을 거치지 않은 결과를 발표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받는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잠시일 뿐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당연히 밝혀지게 되고 영원히 과학계에서 추방됩니다. 어떤 과학자 사회도 이런 기본적인 윤리를 저버린 이들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견뎌내지 못하면 과학자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엄밀함을 저버리고 대중을 속이며 쉽고 편한 길로 가려 한다면 누구나 추방될 수밖에 없습니다. 운동선수가 승부조작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단 한 번의 일탈도 용납되지 않고 영구 제명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은 수없이 실패를 거듭합니다. 1,000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하는 건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을 한다는 것은 매일 실패하기를 반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얻은 성공도 언제 다시 뒤집힐지 모릅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지요. 과학이 그런 길이라는 것을 아니까요. 실패야말로 과학하는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바쳐야 할 대가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과학 말고도 할 일이 많고, 재미있는 것도 많지요. 모든 사람이 과학자일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과학자의 엄밀함을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수백 년의 전통 끝에 마련된 과학자의 연구 윤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어떠한 명제도 그냥 믿지 말 것. 모든 명제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거두지 말 것. 언제나 반증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받아들이는 '합리적 회의주의', 혹은 '과학적 회의주의'는 삶의 자세로서 대단히 유용하고 또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오랜 과학의 역사가 증명하는 '과학적 회의주의'를 생각의 틀로 만들어나가면, 스스로에게도 의미 있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이 될 것입니다. 권위를 맹신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에 객관적이 되고자 노력하는 자세는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기도 합니다.

 

May the scientific scepticism be with you!

 

 

 

[출처 : 박재용, <과학이라는 헛소리 - 욕심이 만들어낸 괴물, 유사과학>, MID, 2018 : 292-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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