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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

우리는 과학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21. 06:42

우리는 과학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 비판적 실재론의 층화 개념을 중심으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1. 들어가며

 

오늘날 우리는 상대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적인 자리뿐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도 대화와 토론을 통해 진실한 해답을 찾기보다 ‘네 말이 맞으면 내 말도 맞으니 결론을 낼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전문가의 권위를 존중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도 강해졌다. 더 심각한 것은 가짜뉴스, 유사과학의 대중화이다. 탈진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평가를 여기저기서 듣게 된다. 이러한 경향성은 '세상의 진리(또는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 내 생각이고, 내 생각 틀릴 리 없다'는 식의 미성숙한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고방식전혀 과학적이지 않은이 향하는 사회적 결과는 무엇일까? 상대주의에서 나온 해체주의와 허무주의가 궁극적으로 이끄는 길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 나르시시즘, 연대를 막는 반공동체주의, 약자 간의 혐오, 반지성주의 등이 아닐까싶다. 이런 현상을 자본과 권력이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갈수록 불평등은 심화되고 억압은 교묘해지지만 상대주의 시대의 대중은 무기력할 뿐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인문학 열풍은 관계와 의미가 해체되어버린 오늘날의 세계를 반영하며, 철학은 그 스산한 세계에 살아가는 배타적 개인들의 허무를 달래기 위한 자장가가 되었다.

 

물론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첨단과학에 기반한 혁신 기술의 발전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고 있다. 누구나 하나씩 들고 있는 스마트폰은 더 이상 전화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이다. 무료통화보다 무료데이터가 더욱 인기 있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화상통화는 기본이고 카메라와 오디오 시스템은 새 제품마다 신기록을 이루며, 스마트폰으로 가정의 전자기기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시대에 와 있다. 양자컴퓨터와 양자통신 기술이 대중화되어 스마트폰으로 들어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과학 덕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과학이 최고의 지식이라고 믿는다.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카피가 등장할 정도로 과학은 믿음직한 지식이다. 그런데 왜 인문학 열풍은 꺼지지 않는 것일까? 왜 사회학을 과학이 아닌 철학으로 보는 시선이 여전히 주류인 걸까? 우리의 삶 자체를 과학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일까?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2. 철학에서 진정한 과학으로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과학은 양날의 칼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겠지만(그 이득이 엄청나므로) 과학의 위험성을 우려하는 사람은 상당하다.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이라든지 인공지능 같은 경우 과학의 눈부신 성과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그것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공포심이 만연해 있다. 이미 중국의 경우 금기를 깨고 유전자를 편집한 아기가 태어났다고 하며, 이세돌을 이긴 인공지능 알파고보다 더욱 뛰어난 인공지능이 등장해 단백질 구조 연구에서도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가치 또는 윤리의 문제에 부딪힐 때 우리는 과학 대신 철학을 꺼내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 답을 내놓을 수 없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특정한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비판적인 견해를 대안으로 내놓는 것이 사회과학의 목적이기도 하다.

 

과학과 비교해 철학의 특성이 무엇인지부터 짚어보자. 흔히 알려지길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철학은 논리적인 사유나 직관적인 사색을 통해 그것을 추구해 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 이래로 철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이성이 있었다. 철학은 이성 중심의 통합적 학문으로서 전통적으로 4가지 분과, 즉 논리학,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대에 들어서 철학의 주된 관심은 인식론에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논리학은 수학으로, 존재론은 물리학으로, 윤리학은 사회학으로 그 근거가 옮겨갔기 때문이다.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지식과 관련된 철학으로서 어떻게 어떤 명제가 다른 명제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자신의 감각 경험을 믿어도 좋은가?” “무언가에 관한 확실한 지식이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학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을 말한다. 정의 차원에서는 철학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15, 16세기 유럽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난 뒤로 근대철학은 뉴턴식 자연과학의 기초 위에서 학문을 새롭게 하고자 했다. 뉴턴 이전에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케플러 등의 천문학자들이 과학의 길을 열었다. 따라서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가 지식이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물을 때 그 지식은 과학적 지식을 뜻한다. 안타깝게도 근대철학은 과학을 설명하는 일에서 실패하게 되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경험주의에 기초한 실증주의 과학관과 함께 뉴턴식 과학의 결정론을 따랐기 때문이다. 결정론적 과학은 모든 것이 필연에 의한 것이며(우연이란 없고, 우연처럼 보여도 사실 필연일 뿐이라는 믿음), 인간과 세계가 기계적으로 운동한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이것은 세계를 바라볼 때 자연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관념이 중심이기 때문에 가능한 믿음들이다.

 

뉴턴식 결정론은 여전히 대중에게 영향력이 크다. 오늘날에도 과학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기계적 결정론을 떠올린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양자역학 이후 우연이나 확률 개념 없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생물학의 돌연변이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다.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상태는 확률로서만 파악할 수 있다. 근대철학은 끝내 과학 또는 과학적 지식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했다. 근대라는 프로젝트의 실패 역시 과학에 대한 철학의 해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주의의 발흥 또한 잘못된 과학철학의 비극적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잘못된 철학적 믿음을 폐기해야 하지 않을까? 올바른 과학철학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근대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3. 실증주의 과학관에 대한 비판

 

철학이 이성적 사유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등을 연구한다면, 과학은 마찬가지의 것을 단지 사유뿐 아니라 구체적 실험을 통해 밝혀낸다. 오늘날 우리는 철학보다 과학을 더욱 신뢰한다.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대중적 인기를 끈다 해도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은 과학자의 말이다. 철학이 관념의 차원에 머무는 한계가 있다면 과학은 실천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철학적으로 탐구를 한다 해도 로켓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으로는 우주비행선을 만들어 달에도 다녀올 수 있다. 철학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머물 때 과학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로크의 말처럼 (과학적) “지식으로 가는 길에 놓인 쓰레기를 치우고 땅바닥을 청소하는 조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기존의 과학, 다시 말해 전통적인 과학 개념은 경험주의 또는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에 대한 개념은 특정한 과학 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교과서에 실린 과학에 대한 개념은 이렇다. “과학이란 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자연의 원리나 법칙을 찾아내고, 이를 해석하여 일정한 지식 체계를 만드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의 원리나 법칙은 경험적 규칙성을 의미한다. 실증주의는 과학을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경험 자료를 수집하고 일반화를 거쳐 이론을 구성하는 활동, 또는 이론에서 가설을 연역하고 이 가설을 경험 자료로 검증하는 활동으로 간주한다.

 

실증주의 과학관은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경험론에 기초를 둔다. 흄은 로크와 버클리를 계승해 경험론을 더욱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인식이란 매우 강하고 뚜렷한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강렬한 인상이 시간이 지나며 정신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관념으로, 모든 추상적인 관념은 개별적인 감각 내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흄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경험이다. 나무에 불이 붙고 연기가 나는 것도 불이 붙어서 연기가 나는 것(필연적 연관성)이 아니라 그저 개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식이다. 불이 붙었다고 연기가 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일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흄에게 인과법칙이란 경험적 규칙성에 지나지 않는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경험 자료를 수집하고 일반화를 거쳐 이론을 구성하는 활동이 바로 과학이라고 보는 실증주의적 견해는 이러한 흄의 경험론에 기반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관찰에서 일반화로 나아가는 귀납적 방법이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에도 동일한 경험이 반복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실증주의는 연역(deduction)과 가설의 검증이야말로 유일한 과학적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실증주의 진영에서 정의하는 지식의 형태는 경험과 논리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자연과학을 통해 만들어진 경험적 지식 그리고 논리학과 수학을 기초로 생산된 논리적 지식만을 정당한 지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실증주의는 곧바로 난관에 봉착한다. 자기장이나 중력장처럼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실증주의 과학관은 경험하여 증명할 수 없는 학문을 비과학으로 몰아붙이는 한편, 인과적 힘을 발견하려는 시도 역시 기각한다. 인간의 인식이 가능한 것만을 지식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곧 실재하는 세계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증주의자들에게 현상의 원인이 되는 실재 영역이란 알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인과법칙은 폐쇄된 공간이 갖추어진 실험실 내부에서 만들어진 법칙, 즉 경험적 규칙성이다. 그러나 실제 과학은 인과법칙을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작동하는 인과적 힘, 다시 말해 기제, 구조, 조건 등 운동의 관계로 설명한다. 바스카는 객체의 실재성을 위해 과학이 두 가지 기준, 즉 지각적 기준과 인과적 기준을 채택한다고 말한다. 인과적 기준은 실체의 존재 여부를, 물질적 사물들에 변동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에 의거하여 판별하는 것이다. 자기장이나 중력장은 이러한 인과적 기준을 만족시키지만 지각적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과학 활동이란 실증주의의 주장처럼 경험적 규칙성을 법칙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러한 규칙성의 인과적 힘을 밝혀내는 것이다.

 

바스카는 실증주의 과학관이 세계를 평탄하고 단일하며 구조화되지 않고 분화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고 비판한다. 실증주의에 따르면 세계가 본질적으로 일정하게 결합하는, 따라서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폐쇄 체계에서 발생하는 원자적인 사건들이나 사태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증주의 이데올로기는 궁극적으로 사회를 부정한다. 바스카의 통찰에 따르면 실증주의 세계관은 몰사회적이고 원자적인 개인들이 물상화된 사실들과 물신화된 체계들의 기초를 구성한다”. 여기에 자본주의 시장 이데올로기가 교묘하게 숨어 있는 것이다. 실제 세계는 평평하지 않고 층층이 구조화되어 있다. 세계는 입체적이고 풍부하며 다채롭다. 자연의 일부인 사회는 구조적 조건과 인간 행위의 관계 속에서 재생산되고 변형되어 간다.

 

 

4.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철학자들과 달리 과학자들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이 세계가 인간의 인식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하면서 탐구에 몰두한다. 세계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까지 회의를 한다면 우리는 두 발을 땅에 디디지 못한 채 관념의 쳇바퀴를 돌릴 것이다. 바스카는 실험에 대한 초월적 논증을 통해 과학이 경험으로 포착하는 현상들과 그 현상들을 만들어 내는 초경험적인 기저의 실재들을 구별하는, 경험적 존재론과는 다른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과학이 이렇게 존재의 영역들을 범주적으로 구별하는 존재론에 기초한다고 강조하는 자신의 견해를 초월적 실재론이라고 부른다. 사건의 기저에 파고들어가 그 사건을 발생시키는 기제들을 찾아내고 각 기제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 그 기제의 기초를 이루는 (더 낮은 층위의) 기제를 찾아내는, 즉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층위를 구별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심층실재론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자연에는 수많은 발생 기제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며, 서로 결합해 사건들을 일으킨다. 천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연은 열려 있는 시스템으로, 실험실처럼 폐쇄된 공간과 달리 개방 체계인 자연에서는 사건들의 기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과학이란 사건을 발생시키는 기제들, 즉 인과적 힘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하나의 기제는 또 다른 수많은 하위 기제들의 결합에 의해 층층이 구조화되어 있다. 또한 어떤 발생 기제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제는 다른 기제들의 간섭에 따라 작동할 수도,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설사 작동한다고 해도 조건에 따라 특정의 사건을 발생시킬 수도, 발생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자연이 개방 체계이고, 층위에 따라 다양한 기제가 작동한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성경의 누가복음 8장을 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한다. “농부가 밖에 나가서 씨를 뿌렸다. 더러는 길 위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고 새들이 먹어 버렸다. 다른 씨는 자갈밭에 떨어져서 싹이 났으나 뿌리가 튼튼하지 못해 이내 시들어 버렸다. 다른 씨는 잡초 밭에 떨어져서 씨와 함께 잡초가 자라 싹을 짓눌러 버렸다. 다른 씨는 비옥한 땅에 떨어져서 풍작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밖은 개방 체계를 말하며, 씨앗은 농부의 인식이나 활동과 독립해서 자란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은 다양한 기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어떤 씨는 싹도 못 틔우고, 어떤 씨는 싹이 났으나 시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밭에서 싹이 자랐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처럼 우리가 경험을 하지 못했지만 사건은 발생했을 수 있고, 발생 기제와 구조가 있음에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과 사건 그리고 사건의 발생 기제와 구조를 범주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계는  존재하면서 조건에 따라 문제의 사건을 발생시키는 실재,  발생하는 사건들 그 자체,  사건들과 관련한 우리의 경험이라는 세 영역으로 구별할 수 있다. 바스카는 이러한 구별을 실재적 영역, 현실적 영역, 경험적 영역으로 개념화한다. 씨앗은 고유한 속성과 인과적 힘의 작동에 의해 싹을 틔우지만(실재적 영역), 비옥한 땅과 빗물, 햇빛 덕분에 풍작을 이룰 수도 있고 자갈밭과 가뭄에 의해 시들어 버리기도 하며(현실적 영역), 그렇게 자라난 싹들의 일부가 인간에게 경험되는 것이다(경험적 영역).

 

 

<그림1> 존재의 세 영역

 

 

 

실증주의자들은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실재적 영역은 존재한다. 더욱이 실재적 영역은 현실적 영역보다 크(거나 같), 현실적 영역은 경험적 영역보다 크(거나 같). 인과법칙을 경험적 규칙성으로 환원하는 실증주의는 인간의 경험이라는 범주만을 실재한다고 믿으며 존재의 세 영역을 구별하지 못한다. 흄과 같은 경험론자들은 경험만이 전부라는 주장을 고집하면서 이 세계가 평평하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우리가 관찰하고 경험하는 영역, 즉 경험 세계만이 아니다. 과학은 경험적 영역의 규칙성이 아니라 실재적 영역의 발생 기제에 대한 진술이며, 인과법칙이 함축하는 필연성은 개념적 필연성이 아니라 자연적 필연성을 뜻한다. 자연적 필연성은 조건에 따라 관철될 수도, 관철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세계는 초경험적으로 작동하는 기제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과학이 전제하는 존재론은 세계가 복합적이고 다층위적이고 구조 지어져 있으며 지속적으로 변동하고 있음을 상정한다.

 

세계가 층화되어 있다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객체, 기제, 구조가 함께 뒤섞여 있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층들(layers)에 속하고, 또 서열지어져(ordered) 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식물의 씨앗은 적절한 조건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생명 활동을 하는 생명 유기체이지만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물질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이때 물질은 생명 유기체보다 더 기본적인 층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식물을 섭취하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서 생명 유기체보다 더 높은 층위에 속하며,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인간보다 더 높은 층위에 속한다.

 

이때 새로운 층위의 객체는 그것을 형성하는 더 기본적 층위의 구성 요소들이 갖지 않는 발현적 속성들(emergent properties)을 갖는다. 세포는 갖고 있지만 세포를 이루는 분자들은 갖지 못하는 속성, 분자는 갖고 있지만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은 갖지 못하는 속성이 바로 발현적 속성이다. 따라서 물 분자의 구성을 수소와 산소 원자로 설명할 수 있지만, 물 분자의 속성은 수소와 산소로 환원해 설명할 수 없다. 하위 영역(더 기본적인 영역)과 상위 영역(덜 기본적인 영역) 사이의 관계는 일방향적 포함 관계지만, 높은 층위의 객체들은 낮은 층위 객체들의 부수적인 현상이나 결과가 아니다. 낮은 층위의 객체들에 뿌리를 두는 발현적 속성은 새로운 힘으로서, 세계의 환원 불가능한 존재론적 특징을 보여 준다.

 

세계의 층화는 과학적 층화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과학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순서로 위계지어진다. 일부 과학자들은 물리학이 충분히 발전하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생물학 법칙이 쓸모없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발현적 속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환원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화학 법칙이 생물학 법칙을 설명한다고 해도, 화학적 기제들이 생물학적 기제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콜리어에 따르면 설명은 사건을 기제들과 선행 원인들에 입각해 설명하는 수평적 설명과 하나의 기제를 더 기본적인 다른 기제에 입각해 설명하는 수직적 설명으로 나눌 수 있다. 바스카는 소금의 주성분인 염화나트륨을 예로 들어 층화 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수직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1> 화학의 역사적 발전

층위 2Na+2HCl=2NaCl+H2
이것은 층위의 기제들에 의해 설명된다.
 
층위 원자의 수 및 원자가이론
이것은 층위의 기제들에 의해 설명된다.
기제1
 
층위 원자구조이론 및 전자이론
이것은 층위의 기제들에 의해 설명된다.
기제2
 
층위 아원자구조에 대한 경쟁하는 이론들 기제3

 

 

화학 교과서에 나오는 화학반응 2Na+2HCl=2NaCl+H2라는 공식은 원자론적 가설과 원자가이론 및 화학결합이론에 의해 설명된다. , 층위에 대한 설명은 층위의 기제들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기제들의 실재성이 확립되고 이론의 결과가 충분히 탐구되면 과학자들은 화학결합과 원자가에 대한 인과적 기제를 발견해 내어야 한다. 그렇게 층위는 다시 층위의 원자구조에 관한 전자이론에 입각해서 설명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설명에서 상정된 기제들의 실재성이 확립되면 과학은 전자, 양자, 중성자 등의 아원자적 소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 있는 기제들에 대한 발견으로 옮겨간다. 바스카는 심층적인 층위들에 대한 계속적인 발견과 서술의 과정에 끝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계의 실재적인 층화를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층위들에 대한 과학적 발견과 층위들에 대한 지식의 과학적 변동을 조화시킬 수 있다.

 

 

5. 나가며

 

실증주의자들에게 전체는 부분의 합일 뿐이다. 그러나 세계의 층화와 발현적 속성에 대해 알게 된 우리는,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자연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개인들보다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사회는 단지 개인들의 합이 아니다. 사회는 사회 자체의 발현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실증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사회란 모래알 같은 개인들, 게다가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의 눈으로 봤을 때 사회는 수많은 발생 기제들로 구조화된 다층위적인 체계이다. 이러한 통찰이 우리의 삶에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근대철학은 과학을 올바르게 규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실증주의 과학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또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반증주의(포퍼)와 협약주의(쿤) 과학관이 대두됐지만 큰 틀에서 실증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쿤의 공약불가능성 개념은 상대주의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고, 파이어아벤트에 와서는 "주관주의적 광기"(러셀)에 빠졌다. 그렇게 실패한 과학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불러왔다. 우리 사회 역시 민주화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제도를 쟁취해 나가면서 사회과학 논쟁이 뜨거웠으나 동구권(사회주의 세력)의 몰락과 함께 순진한 개인주의로 포장한 시장 이데올로기가 포스트모더니즘과 인문학 열풍을 타고 주류가 되었다. 

 

과학은 자연을 탐구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자연처럼 사회 역시, 밋밋한 평지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층화된 존재이며 지속적인 동시에 변형 가능하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가 받는 시대적 요구의 핵심은 삶을 과학화하라는 것이 아닐까. 간디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저마다의 진리 실험 이야기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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