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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오직 마음 - ‘깨달음의 알속’에 대한 해설 본문

명상수련/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오직 마음 - ‘깨달음의 알속’에 대한 해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7. 11. 15. 10:33

오직 마음

- ‘깨달음의 알속에 대한 해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inter-being). 인간과 인간 사이(人間), 비어 있음과 비어 있음 사이(空間), 때와 때 사이(時間), 하늘과 땅 사이(天地間)에서 한 자루 촛불처럼 불사르며 타오르는 게 인간이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생명은 무릇 물질에서 타올라 정신으로 사라진다. 불은 결코 스스로 일어날 수 없다. 불은 불이 전해주어야 한다.

 

 

제법무아

 

부처는 아함경과 같은 초기경전에서 색수상행식의 다섯 요소가 인연에 따라 모인 것이 인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온은 틱낫한 스님의 말씀처럼 어느 것 하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서로를 의지하여 존재하고, 그렇기에 비어 있다. 없이 있는 것이다. 무릇 만물은 언제나 삼라만상과 더불어 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 와서 강조된 공의 가르침이다.


오온에서 색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물질적인 몸을 뜻하며, 수상행식은 마음에 해당한다. 수는 감수작용인 느낌이고, 상은 표상, 지각, 개념 등을 구성하는 생각을 뜻한다. 행은 느낌과 생각 이외의 마음인 의지이며, 식은 이러한 수상행을 고요하게 비추는 마음, 즉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색수상행식 중 어느 것도 고정된 요소가 아니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고정된 라고 할 만한 게 어디에도 없다(無我). 부처는 요소설을 부정하였다. 요소설은 인간이나 자연이 생멸변화하지 않는 요소들(四大 또는 五蘊 따위)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오온은 단지 실상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색은 수상행식에 의존하고, 수는 색과 상행식에 의존하며 상과 행과 식도 그러하다. 십이처와 십팔계도 매한가지이다.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과 감각대상인 색성향미촉법 육경六境이 만나 마음, 즉 육식六識을 일으킨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그것이다. 이 중 안식부터 신식까지를 전5前五識이라 하고, 의식을 제6第六識이라 한다. 5식은 육체적 감각기관에 의해 생기는 동물적인 반응, 즉 감각적으로 유쾌하면 기쁘고 그렇지 못하면 슬프거나 괴로운 감정적인 차원의 마음이다. 충동과 욕구, 갈애와 욕망 등이 이 느낌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에 비해 제6식은 전5식을 종합해서 내린 이성적인 판단이다. (5식에 비해 제6식은 더 복잡하고 넓은 영역이다.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도 포함하며, 잠재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단순화하여 전5식을 다른 말로 감각혼이라 하고, 6식을 오성혼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일체개고

 

감각적인 만족과 불만이 희노애락의 감정을 만들어낸다. 감정은 유동적이어서 추울 때는 옆 사람의 체온이 고맙다가도 더울 때는 같은 이유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된다. 감정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실 사람의 몸은 마음보다 지혜롭고 진실하여서 생각보다 감정’, ‘느낌에 귀를 기울일수록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과거와 미래를 어지럽게 오가는 제6식을 멈추고, 5식의 지금 여기몸의 느낌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적인 쾌락에 집착을 한다면 탐진치 삼독에 빠지게 된다. (탐은 탐욕으로 좋아하는 대상에 집착해, 그것을 취하고자 욕심을 내는 마음을 말한다. 진은 진에로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성내고 분노하는 마음을 말한다. 치는 우치로 어리석은 마음이다. 여기에 만을 더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만 또는 아만으로 잘난 체하는 마음이다. 부처는 삼독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팔정도의 길을 제시했다.)


부처는 고통의 근원을 번뇌라고 하였다. 그래서 번뇌의 불길을 끄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번뇌가 생기는 까닭은 동물적인 마음의 전5식과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제6식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부딪히는 게 번뇌이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려는 감정의 마음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생각의 마음은 쉼 없이 충돌한다. 하지만 보통의 대중은 제6식이 전5식에 봉사하는 삶, 즉 오성혼이 감정혼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간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이다.


6식인 의식을 세분하여 제7식인 말라야식과 제8식인 아뢰야식까지 마음의 영역을 확장하여 다루기도 한다. 6식을 깨어있는 의식이라고 한다면, 7식인 말라야식은 꿈꾸는 의식, 8식인 아뢰야식은 잠들어있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말라야식과 아뢰야식은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다. 우리는 제7식과 8식을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 두 잠재의식은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준다. 번뇌의 불길을 끄기 위해서는 의식뿐만 아니라 꿈꾸는 말라야식, 더 나아가 잠자는 아뢰야식까지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말라야식은 앞의 여섯 마음을 통해 자신을 고정된 실체인 로 여긴다. 바로 자의식이다. 살아가면서 전5식과 제6식을 통해 갖게 된 고정관념과 편견이 라는 고정불변의 형상을 만든다. 는 에고ego라 할 수 있는데, 단지 생각일 뿐이지만 자신을 다른 생각들의 주인이라 여긴다.


마음을 깊이 탐구해 들어가 보면 결국 만나는 것이 바로 이 이다. 모든 욕망의 뿌리는 이 라는 의식으로 귀결된다. ‘나는 엄격하다거나 나는 고집이 세다’,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등의 근거 없는 생각들이 바로 말라야식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시끄럽게 잡념이 올라오는 이유는 의식 아래 머물던 생각들이 활개를 치기 때문이다. 말라야식의 상태는 이처럼 꿈을 꾸듯이 뒤죽박죽인 생각의 상태이므로 적절히 통제하지 않는다면 정신병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말라야식은 단지 자의식(‘라는 생각)일 뿐이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말문을 잃게 된다. 생각으로서의 가 어떻게 참된 를 알 수 있겠는가? 날카로운 질문을 통해 전도된 망상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선불교의 수행법인 간화선이다. 화두는 흔히 상식을 벗어난 말장난 같지만 자의식을 꼼짝 못하게 하는 올무와 같은 것이다.


8식인 아뢰야식은 살면서 겪는 모든 것이 저장되는 심층 무의식이다. ‘의 삶, 즉 습관화된 모든 생각이나 감정, 행위 등은 아뢰야식이라는 마음의 저장고에 쌓인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업과 습은 사라지지 않고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다음 생에도 이어진다. 현생의 일뿐만 아니라 오랜 윤회를 통해 쌓인 업습의 기억이 제8식인 아뢰야식을 이룬다. 이러한 아뢰야식이 자의식인 말라야식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인 아뢰야식까지 정화시켜야 할 것이다. 사람이 윤회하는 이유는 오염된 마음, 즉 아뢰야식에 의해 태어남과 죽음이 있고, ‘나라는 실체가 있다라는 망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거울처럼 깨끗이 닦은 마음, 깨달음을 이루어 무명에서 벗어난 순수한 마음을 제9식이라 하기도 한다. 해탈 또는 열반의 경지에 이른 청정무구한 마음인 제9식을 아마라식이라 부르는데, 아마라식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전에서는 이 아마라식을 반야라고 보기도 하지만, 반야를 땅속에 숨은 보석처럼 잠재의식 저편에 숨어있는 또 다른 마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반야는 마음이 일어나는 현상 전체를 환히 밝혀주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방편적으로 순수의식을 제9식이라 한다면, 수행자로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가 바로 아마라식이다. 아마라식이 곧 불성인 것이다.

 


제행무상

 

결국은 모두 마음일 뿐이다(唯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하나의 주장이 아니라 우리의 고정된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적 가르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이 물질로만 이루어졌다는 물질주의나 물질마음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분별심을, 연기법을 통해 세상 어느 것도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공의 사상이다.) 물질세계라는 것도 나의 마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정신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삼라만상이 곧 나의 마음이고, 만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덧없고 비어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강물은 바다가 되고 바다는 구름이 되어 비로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종이 안에 구름이 흐르고 풀과 나무가 자라며 당신과 내가 있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고정된 채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덧없기에 사람은 끊임없이 생로병사하며 우주는 성주괴공한다. 그렇게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는 더불어 있는 것이고, 없이 있는 것이다. 무상이고 무아다. ‘오직 마음뿐인 세계에서 마음을 벗어난 차원의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말할 수 없다. 부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침묵하였다. 더 이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언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언어란 피안으로 건너가기 위해 사용하는 유용한 뗏목과 같다. 하지만 귤의 맛을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 맛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 손에 들고 맛봐야 한다. 부처는 당장 우리 몸에 박힌 독화살부터 빼라고 하였다. 화살이 어떤 재질이고 독의 종류는 무엇이며 누가 쏘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불교는 이렇듯 실천윤리이지,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물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형이상학의 건축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집이 있어야 허물 수도 있는 법이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부처가 침묵한 지점 이후의 세계를 정교한 언어로 정신 혹은 영이라 부르며 고차원의 세계를 안내하는 듯하다. 9식이야말로 슈타이너가 말하는 의식혼과 정신자아가 합일된 마음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연기법은 진리의 실상을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가르침이다. 세상 어느 것도 고정된 라고 할 만한 것이 없지만, 분별심으로 더럽혀진 마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며 집착하기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번뇌에 휩싸이게 된다. 망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순수한 생각으로 마음을 하나하나 살펴야 한다. 올바른 관찰과 사유 등 팔정도 수행을 통해 더불어 있음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자유로운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질문이 들었을 때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해소하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펼친다. 보통 질문 자체가 잘못된 생각의 믿음 위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그러한 질문이 나오게 된 생각의 바탕을 되살피게 함으로써 번뇌의 뿌리를 끊도록 한다.


진리를 찾는 길에서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가 내 마음의 밖에 어떤 진리의 실체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런 길은 없다. 오로지 잘못된 생각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업이 쌓이고 그 업의 무게로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업장이나 괴로움을 원수 보듯이 할 필요는 없다. 업장이 있기에 괴로움이 있고, 괴롭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찾는다. 괴로움 덕분에 거듭날 수 있고 깨어날 수 있는 것이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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