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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울타리 안과 울타리 밖으로 갈린 세계 - 천관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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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안과 울타리 밖으로 갈린 세계 - 천관율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9. 19. 11:41

시사IN 천관율 기자의 글 <'조국 대란'이 드러낸 울타리 게임>(2019.9.16)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계급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점에 왔다는 판단이 듭니다. 신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는 트럼프와 아베, 브렉시트의 보리스 존슨 등이 상징하듯 혼란스럽지만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슈타이너의 인지학 사상, 특히 사회삼원론은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 고민해 봅니다. '유리 바닥', '기회 사재기'라는 개념에 유의하며 글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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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구도는 가장 직관적인 정치적 세계관이다. 이 직관은 때로 현실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다. 구의역 김군의 동료 정주영씨가 토로하는 현실은 ‘좌우로 갈린 세계’가 아니라, ‘울타리 안과 울타리 밖으로 갈린 세계’다. 울타리 안에는 좋은 대학을 다니고,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고, 상위 20% 안쪽으로 돈을 벌어, 대도시에서 중산층으로 자리 잡는, 공론장에서 발언권이 큰 사람들이 있다. 울타리 밖에는 머릿수로 다수이지만 목소리를 얻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논문 제1저자 파동은, 정치를 바라보는 상상력을 ‘좌우의 세계’에서 ‘울타리의 세계’로 바꿔낸다.  

 

‘울타리 게임’은 불법과 비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교육과 입시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중상류층 가정은 집값이 비싼 동네에서 살 수 있다. 이런 곳은 대부분 학군이 좋다. 자녀에게 다양한 체험을 시켜줄 여유가 있다. 자녀를 인턴으로 보낼 대학교수 인맥이 있을 가능성도 더 높다. 그 결과,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라 불리는 최상위 명문 대학일수록 고소득층 비율이 높아진다. 격차는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다. 합법이야말로 ‘울타리 안쪽’의 무기다.

 

 

 

어떤 의미로, ‘조국 대란’은 한국 정치를 글로벌 정치의 대세에 합류시켰다. ‘좌우로 갈린 세계’에서 ‘울타리 안팎으로 갈린 세계’로 바뀌는 경향은 세계적인 추세다. 불평등은 커지고, 계층 이동 가능성은 낮아진다. 계층과 불평등 문제를 연구하는 영국 출신 미국인 리처드 리브스는 ‘유리 바닥’과 ‘기회 사재기’라는 개념을 히트시켰다. 유리 바닥은 상위 20%가 계층의 하향 이동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설치하는 각종 안전망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육아 환경, 학군, 대학 입시, 부모들의 네트워크가 모두 포함된다. 이 트랙을 탄 상위 20% 가정의 자녀들은 계층 하락을 겪을 위험이 낮아진다. 물론 합법이다. 기회 사재기란 자녀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갖도록 기회를 싹쓸이하는 전략이다. 부모의 연줄을 동원해 자녀에게 무급 인턴 기회를 잡아주고 생활비를 부모가 부담해준다면, 연줄과 경제력이 없는 집 자녀보다 더 많은 기회를 쟁여두는 셈이다. 역시 합법이다.

 

지식인 대 부유층의 ‘울타리 안 싸움’  

 

악순환 고리가 드러난다. 불평등이 커질수록, 중상류층은 계층 하락을 더 두려워한다. 중상류층 부모가 자녀에게 유리 바닥을 깔아줄 필요도 커진다. 기회 사재기가 만연한다. 이 노력이 성공하여 유리 바닥이 튼튼해지면, 이제 중상류층은 자녀가 계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정책에 세금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게 된다. 다시 불평등이 증가한다. 리브스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계층 이동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하위 계층의 무기력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위 계층이 자기 자리를 유지하려고 쓰는 여러 전략이 성공해서다. 우리 용어로 울타리 게임이 성공해서다.  

 

‘좌우로 갈린 세계’와 ‘울타리 안팎으로 갈린 세계’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인식은 새롭게 떠오른 아이디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이 두 세계관은 같은 말이었다. 대체로 좌파 정당은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고 우파 정당은 부자를 대변했으니, ‘좌우’란 ‘울타리 안팎’과 동의어였다. 그런데 이게 흔들렸다. 그 때문에 21세기 정치의 최대 지각변동이 등장했다.

토마 피케티는 불평등 연구서인 <21세기 자본>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경제학자다. 그는 후속 작업으로 “왜 정치는 불평등의 증가를 막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2018년에 나온 논문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불평등의 증가와 정치 갈등 구조의 변화(Brahmin Left vs Merchant Right:Rising Inequality & the Changing Structure of Political Conflict)’에서 그는 이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2차 대전 이후인 1950~1960년대에, 좌파 정당의 핵심 지지 기반은 저학력·저소득 노동자였다. 1970년대 이후로, 고학력 유권자가 좌파 정당의 핵심 지지층으로 부상했다.  

 

대학에 가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는데, 고학력자들은 대체로 진보 성향이 강했다. 이것은 좌파 정당에게 기회로 보였다. <그림 2>는 미국·영국·프랑스 세 나라의 좌파 정당 득표를 교육수준에 따라 분석한 결과다. 대졸 유권자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한 비율에서, 고졸 이하 유권자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한 비율을 뺀 값이다. 즉, 그래프에서 플러스 값이 클수록 고학력 유권자의 영향력이 강하고, 마이너스 값이 클수록 저학력 유권자의 영향력이 강하다. 세 나라 모두에서, 좌파 정당(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 프랑스는 좌파 계열 정당 합산)을 고학력자들이 장악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고학력자들이 핵심 지지층이 되면서 좌파 정당들은 저학력·저소득 노동자와의 연결고리를 놓쳐버렸다. 좌파 정당은 재분배 정책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압력을 점점 덜 받게 되었다. 고학력 유권자들이 관심 있는 인권, 환경, 정치적 올바름, 정체성 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른 반면, 불평등과 재분배 이슈가 시나브로 뒤로 밀렸다. 피케티는 이 새로운 좌파 정당을 ‘브라만 좌파’라고 불렀다.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상층이면서 지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제 계급이다. 여전히 부자들의 대변자인 우파의 별명은 ‘상인 우파’다.  

 

이렇게 해서 정치는 상하 계층의 대결에서 상층 엘리트들 간의 대결(지식인 대 부유층)로 바뀐다. 이제 좌우 갈등은 울타리 안팎의 갈등을 대변하지 않는다. 좌우 모두가 울타리 안에서 싸운다. 울타리 밖에는 거대한 유권자 블록이 정치적 대변자를 찾지 못해 좌절하며 뒤처진다.

 

미국의 유명 정치 논객 토머스 프랭크는 일찍이 이 좌절에 주목했다. 2016년에 펴낸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은 미국의 좌우 정당이 더 이상 울타리 밖 유권자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졸자들이 대거 민주당으로 몰려왔다. 최초에 이들은 민주당을 급진화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졸자들은 곧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다. 민주당은 지식인 계급의 정당으로 탈바꿈했고, 울타리 밖 목소리에 반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민주당 리더들은 이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채, 여전히 좌우 전선이 울타리 안과 밖의 전선과 같은 것이라고 착각했다. 즉, 실제로는 동료 지식인 계급에 충성하면서 울타리 밖을 대변한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프랭크가 ‘민주당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일갈한 이 책은 2016년 3월에 나왔다. 8개월 후인 11월에는 울타리 밖 유권자들의 분노를 끌어당기는 데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 사건은 브라만 좌파(민주당)는 물론이고 상인 우파(공화당)마저 경악하게 했다. 한국에서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2018년 9월에 이 책을 당내 개혁 성향 의원 연구모임에 돌려 화제가 되었다. 11개월 뒤인 올해 8월에는 ‘조국 대란’을 통해 한국에서도 울타리 게임이 정치 의제로 떠올랐다.

 

한국이 글로벌 정치의 추세를 따라가고 있을까. 그럴 토양은 있다. <그림 3>은 한국노동연구원 홍민기 연구위원이 2019년 2월 <월간 노동리뷰>에 발표한 자료다. 소득수준 상위 10% 집단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준다. 상위 10% 집단은 2002년에는 전체 소득 중 37.1%를 가져갔다. 2017년에는 이 비율이 50.7%로 뛴다. 홍 연구위원은 “자본주의 발전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논평했다. 2003~2007년 구간에 상위 10% 집단의 소득 집중도가 특히 크게 올라간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이철승 교수(서강대 사회학과)는 신간 <불평등의 세대>에서, 노동시장의 지위에 따라 계층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그림 4> 참조). 질문은 셋이다. 대기업에 다니는가? 정규직인가? 노조가 있는가? 셋 다 ‘예’인 그룹의 노동소득이 가장 높다. 전체의 6.8%가 이 그룹에 속한다. 대기업·정규직이지만 노조는 없는 그룹이 그다음으로, 전체의 2.9%다. 중소기업에 다니지만 정규직이고 노조가 있는 그룹이 세 번째다. 전체의 11%다. 대략 여기까지가 노동시장에서 상위 20%에 속한다. 이들과 하위 80%의 차이가 벌어지는 추세다.

 

노동시장 연구자들은 한국 노동시장의 대표 특성을 ‘노동시장 이중구조’라고 설명한다. 법과 노조로 보호받는 ‘내부 노동시장’과, 가혹한 ‘외부 노동시장’의 경계가 뚜렷하다. 울타리 밖 직장은 커리어의 디딤돌이 되는 게 아니라 커리어의 발목을 잡는다. 대졸 하향 취업자 10명 중 6명은 직장을 두 번 옮겨도 상향 이동을 하지 못한다. 첫 직장이 중소기업인 대졸자가 2년 뒤 대기업 정규직으로 ‘점프’에 성공한 비율은 7.5%다. 노동시장의 울타리 게임을 정확히 이해하는 한국의 구직자들은 취업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가려 애쓴다.  

 

 

 

 

교육과정과 노동시장에 울타리 게임이 만연한 결과로 불평등이 증가한다. 이러면 유리 바닥이 튼튼해지고, 유리 바닥은 다시 불평등을 가속시킨다. 이 악순환을 해소할 힘은 정치가 갖고 있는데, 바로 그 정치가 울타리 안쪽에만 머무르는 순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다. 21세기 세계 각국의 정치가 흘러가는 길인 동시에, ‘조국 대란’이 얼핏 드러낸 징후다. 먼저 이 길을 간 나라들의 교훈을 보면, 길 끝에는 포퓰리즘이 기다리고 있다.

 

 

 

[출처 : 시사IN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2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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