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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기 아이들과 만나는 방법 - 클라라 아르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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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기 아이들과 만나는 방법 - 클라라 아르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10. 7. 12:52

유치원기 아이들과 만나는 방법

 

클라라 아르츠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가 제가 아는 유일한 한국말입니다. 좋은 통역자를 옆에 두었으니 이 시간 동안 여러분과 잘 연결되길 바랍니다. 저는 중부유럽에 살면서 한국에 처음 왔는데요, 여러분에게 들려드릴 그림이 어떤 것이 될지 기대가 큽니다. 저는 여러분과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기 때문에 제가 들려드리는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맞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람은 굉장히 친절하다고 들었습니다. 제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도 ‘아, 그렇구나...’ 하실까봐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많이 긴장하고 걱정했는데 지금은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다른 지역에서 왔지만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들려드리려고 하는 것은 동료로서, 어머니로서, 한 여자로서, 유치원 선생님으로서, 인지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너무나 많은 과제가 있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이야기해도 모자랄 수 있겠지요. 우선은 기본적인 것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우리 시대의 양극성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시대를 보면 극과 극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사회를 보면 우리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도구들이 있습니다. 수업시작 전에 사회자가 핸드폰을 꺼달라고 하자 여기 계신 분들이 다 꺼내서 끄셨습니다. 집에 머무르지 않아도 핸드폰이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라고 하지요. 페이스북이나 스카이프, 트위터 등으로 멀리 있는 사람과도 연결됩니다. 

그걸 통해 우리는 무얼 좋아하고 무얼 안 좋아하는지도 공유합니다. 거기에 우리는 글을 올리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어떻게 감정적인 효과가 일어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상을 적기도 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내용을 적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내가 해보지 않았지만 관심 있는 것들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상한 현상일 수 있는데 우리는 서로 마주보지 않고도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구들을 우리가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전세계의 다른 사람들과 더 크고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지만 잘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도전거리입니다. 제대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은 결과를 낳겠지만 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도전도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요즘 어린 아이들이 더 우울해지거나 자살충동을 느끼고 자살을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세상과 관계 맺는 걸 더욱 어려워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자폐성향, ADHD 등의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관계 맺는 걸 어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는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그 안에서 가이드북을 보면서 한국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방송되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방송 프로그램이 아시아 지역에 많이 퍼져 있고 유명하다고 써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들을 충분히 볼 수 없으니 뭐라 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리얼리티쇼입니다. 제가 그걸 보면서 굉장히 놀라웠던 것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생활까지 카메라 앞에 노출하고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걱정이나 불만 등 사실은 자신의 가까운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을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하고 TV 앞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TV 앞에서는 하면서 자기 가족, 가까운 사람들과 해야 할 일을 왜 하지 못할까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감정을 전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환경적인 모습이나 이런 감정적인 모습을 보더라도 양극성을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와 같은 훌륭한 도구를 통해 지금 우리들과 지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볼 수 있고, 미래를 위해서 지구의 건강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지구를 더 건강하게 보존하는 방법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좋은 의지를 통해 행동으로 옮기는 노력은 부족해 보입니다. 요즘 교육을 보면 조사나 실험을 통해 과학적인 방식이 아주 많습니다. 

아주 어린 시기에 놀이를 통해 자기 자신과 친밀해지고 나와 연결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혀주는 과학적인 결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나 정부기관을 보면 더 어릴 때부터 지적인 교육을 하도록 압박합니다. 독일의 한 생물학자가 말한 것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게럴드 훈터라는 분입니다.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에는 뇌의 작용에 대해 다룬 것이 있는데요, “우리의 두뇌는 우리의 유전적인 습성을 통해 발달하지 않는다. 우리의 근육을 훈련시키는 방법으로도 되지 않고 훨씬 더 간단히 해결된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함에 따라 발달한다. 우리의 관심(열정, 영감)을 통해 발달한다.” (*독일어로는 열정, 관심, 영감 등이 한 단어로 되어있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을 잘 끌어내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이건 우리의 교육과정이니까 그냥 하는 거야’, 이렇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극단적이고 모순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양극적으로 쪼개져 있는 상황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까요? 양극이 아니라 조화롭게 중도의 힘을 강화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그런 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제가 찾은 것이 인지학이고 인지학을 통해 발견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세계가 있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다양한 극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을 받는 것이 ‘중간영역을 찾아서 거기에 어떻게 머무를 것인가?’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현명하지 못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가운데에만 머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양극을 오가며 가운데를 찾을 뿐입니다. 양극을 잘 이해하고 엮어가면서 찾아갈 수 있겠지요. 서커스를 하는 사람을 보면 양쪽을 오가며 중심을 잘 잡고 있지요. 가운데만 있으려고 한다면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극을 오가면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또 비행기에서 가이드북을 보면서 한국에 대한 특이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몇 글자를 보았습니다. 그게 뭔지 힌트가 없어도 괜찮아요. 마치 어린 아이가 배워가는 것처럼 그 글자들을 본 것입니다. 글자도 보고 그 소리도 들으며 ‘아, 이게 뭘까?’ 하고 빠져들었습니다. 한국의 ‘아이’라는 글자를 보면서도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 안에서도 양극성을 발견했습니다. 한쪽에는 전세계 공통의 모습이 있고 다른 쪽에는 굉장히 개별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 칠판에 공통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함께 그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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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있는 동그라미는 전세계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왜냐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옆에 곧은 선을 보면 아주 개별적인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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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지 않습니까? 한국말로 ‘아이’ 라는 말을 보면 이런 식입니다. 전세계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동시에 있는데 두 번이나 있습니다. 글자 말고 소리만 들어도 양극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는 벌려지는 소리고 ‘이’는 곧바로 서는 소리입니다. 그것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린 아이에 대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 올까요? 아이의 존재는 처음 태어날 때 시작하는 걸까요? 아니면 부모 두 사람이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다’ 하는 순간부터 생겨나나요? 아니면 아이가 이 세상에 내려가고 싶다고 하는 순간부터인가요? 여러 방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데 모든 질문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주게 되지요. 사람들은 아이가 어디에서 오는지 비밀을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세포를 복제하기도 하고 계속 살기 위해 죽음을 극복하려고도 했습니다. 종교에서도 많은 노력을 했고 과학에서도 그렇게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고대 신화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창조신화가 나라마다 다양하게 있는데 다양한 색채를 보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각자가 다른 이야기 같지만 거기에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사람이 생겨나기 이전과 이후를 같이 다룹니다.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이 지상에 없는 존재, 다시 말해 영적인 존재의 도움을 통해 생겨난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들 사이에서 두 개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의 이야기처럼 아이가 잉태되기 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아이가 수정되는 건 설명할 수 있지만 아이의 개별성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부분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또 신화에서 사람이 생겨나는 것처럼 아이가 태어난 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어난 이후의 아이들 모습은 슈타이너가 이야기한 발달단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발달에 대해 얘기한다면, 모든 사람은 똑같은 단계를 따릅니다. 수정되고 분할하는 과정도 거치고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머리부터 태어나지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지도 거치고요. 그리고 5,6세가 넘으면 이갈이도 시작합니다. 14살쯤 되면 2차성징도 겪게 됩니다. 그리고 21살쯤 되면 사람이 다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성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주변의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 쪽에서 점점 독립적인 쪽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가 발달하는 데에 세 단계가 있다고 할 때 영혼적으로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특징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똑바로 서서 걷고 말하고 사고하는 단계를 거치며 아이들은 배우게 됩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항상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세 단계에 따라 특별하게 일어나는 순간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세 가지 능력을 갖기 위해 시기별로 아이들이 보여주는 특별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문지방’이라고 부르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문지방을 넘을 때마다 아이들은 개별적인 모습을 더욱 강화해나갑니다. 

어느 순간 보면 아이들은 이 세상을 보면서, “아니야! 싫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시기에 ‘싫어, 아니야’ 하는 아이들을 만나보신 분은 알겠지만 얼마나 강하게 주장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싫어, 난 당신과 가지 않겠어!” 필요하다면 아이들은 드러누워서 발버둥치며 고집을 부리지요. 우리는 빨리빨리 하라고 하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빨리 하지 않습니다. 주변이 반응을 해줄수록 주변에 더 관심이 생깁니다. ‘아니야!’ 하는 순간 내 바깥의 세상이 있고 내 안의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시기 전의 아이들을 보면 한 아이가 울면 모든 아이가 따라서 울게 됩니다. 그 시기 아이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가 없습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게 아니라 외부환경에 따라 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3,4세 때 고집부리는 아이들을 보면 친구들이 막 울 때 예전에는 같이 울었는데 이제는 지켜보다가 조그만 인형을 갖다 주기도 하지요. 아이들은 어느 순간 알게 됩니다. 다른 친구가 울고 있다고 해서 나도 같이 울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자로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이 고집을 부릴 때 평온하게 받아주는 모습도 있어야 하고, 어려운 것을 풀어가는 융통성도 있어야 하며, 아이의 흥미를 쉽게 다른 쪽으로 끄는 방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평온함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먹고 자고 쉬고, 여기서도 양극성이 보이는데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모습과 교육자로서 개별적으로 곧게 서는 모습의 양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7세 이전의 아이들을 보았는데요, 물론 7세 이후의 아이들에게도 문지방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학령기 직전인 6세 아이를 보겠습니다. 이 땅에서 6년쯤 살았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그전에는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놀던 아이들이 지루해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와서 자기 아이가 이제 학교 갈 준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육받을 준비가 되었다고요. 그래서 어떤 날은 전화를 해서 “우리 아이가 유치원 가기 싫다고 해요” 합니다. 그 다음에 아이에게 물어보는 거죠. “왜 유치원 가기 싫어? 선생님이 싫어?” 부모님은 계속해서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어떤 일이 아이에게 벌어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전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자기 상상력을 가지고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계속해서 놀이를 만들어내다가 왜 갑자기 이렇게 확 변하게 되는 걸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7년 주기 동안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저희에게 행운인 것은 슈타이너가 이 부분을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각 시기별로 특징적인 부분이 있는데 각 단계마다 그 부분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해갑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낳는 그런 힘처럼 그러한 생명력으로 아이들은 그 힘으로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 시기 아이들은 아주 유연해서 아주 쉽게, 말하고 쓰는 걸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저는 조금 일찍 와서 강연 전에 몇 군데 유치원에서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들이 말씀하시길, 정부가 얼마나 유치원 교육에 관여하려고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정부에서는 3세부터 국가 교육과정을 강제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유치원들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고 운영하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 정부는 어린 아이 때부터 정책을 시행하려고 할까요?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을 보면 정부가 정책을 통해 사회를 끌고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술자가 부족하면 정부는 교육을 강화해 기술자를 많이 키우려고 합니다. 여성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여기면 탁아소를 많이 운영해서 여성들이 일을 많이 하게 하지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정부는 정책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 7년 주기는 자신의 내장기관과 몸을 형성하기 위해 온힘을 쏟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른 시기부터 교육이 들어와 신체형성의 힘을 분산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갖고 있는 생명력이 자유롭게 본래 해야 할 역할을 할 수 있게 아이들을 대해야 합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머리부터 태어나는 것처럼 신체가 형성되는 것도 머리부터입니다. 첫 7년 주기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상할 수 있지만 사람에 대해 설명하려고 그린 그림입니다. 세 단계에 따라 어떻게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발달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태어나서 2.5세까지. 5.5세까지, 7세까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겠지요.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해 도움이 필요한 모습입니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정말로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다른 포유동물 새끼를 보면 태어난 지 몇 시간도 안 돼 네 다리로 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보면 자기 두 발로 서기까지 1년이 걸립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아기는 계속 움직이지만 몸은 전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거기에 있지요. 눈을 보면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계속 움직입니다. 팔다리도 배가 고프거나 만족스럽거나 아프거나 하는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입니다. 아이들은 기본적인 반사신경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엄마의 젖을 찾거나 손가락을 꽉 쥐는 반사신경이 있습니다. 태어난 첫 해에는 반사신경을 통해 자기 몸을 움직이고 조절하는 것을 배웁니다. 

첫 7년 주기를 보면 0-2.5세 시기 아이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기 몸을 어떻게 쓰고 조절하는지를 배우는 게 가장 큰 과제입니다. 어떻게 서는지, 어떻게 걷는지 배웁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배우게 됩니다. 8-21세 아이들이 배우는 것에 비해 이 시기에 배우는 것들은 정말 기본적인 것들을 배웁니다. 7세 이후의 교육이 개별적인 것이라면 7세 이전에는 기본적인 것들을 배웁니다. 세상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내 감정을 어떻게 균형 잡는지, 독창적인 사고를 어떻게 하는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 첫 7년 주기는 기본적인 것을 다지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아이의 감각기관도 발달합니다. 눈으로 세상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 시각이 발달합니다.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것과 다르게 슈타이너는 12감각에 대해 말합니다. 그 중에서 지금은 하위감각 4가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네 감각은 자기 자신과 관계 맺고 세상과 관계 맺는 일에서 가장 기본적이기 때문에 이것들부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처음에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아기를 보면 우리의 몸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 우리 몸의 경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내 몸, 내 집이 어디에 있는지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내 몸의 경계가 어디인지 경험하는 것이 앞으로 내가 어디에 살고 어떻게 살 것인지 경험하는 것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때 아이가 안정감을 느끼는 게 앞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냐면 ‘아, 내 몸이 안전하구나’ 하고 느껴야만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자기가 경험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살아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에 대해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나중에 이것이 타인에게도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을 보면 건강한 경계에 대해 어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떨 때 보면 아이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놀라기도 합니다. 어떨 때 보면 아이가 이게 저 아이의 공간인지, 내 공간인지 모르고 경계를 넘어가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자기 경계를 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촉각에 대해 작업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부를 통해 전체적으로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옷을 갈아입힐 때 관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도와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기 아이들을 그냥 바구니에 눕혀 놓지 않고 계속 안아주지요. 요즘 아이들을 보면 정말 많은 시간을 바구니 속에서 보냅니다. 카시트에도 놓울 수 있고 쇼핑카트에도 올려둡니다. 바쁘게 사는 우리에게 그것은 편할 수 있지만 정말 아이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너무 바쁘니까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전화도 하고 TV도 보고 그럽니다. 어린 아이들에 관한 일을 할 때는 정말 집중을 해줘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관심을 갖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집중해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아이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생명감각이죠. 생명감각은 내적인 안테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건강하게 잘 있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약간 체했다거나 장이 좀 이상하다고 한다면 그때 ‘아, 뭔가 잘못됐다’ 하고 느끼지요. 아직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아이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합니다. 부모나 교사들은 아이들을 편안하게 위로해주는 게 하나의 방법이죠. 아이들을 다시 감싸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 등으로 도와줄 수 있겠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일을 해줘야 하는지 압니다. 안아서 흔들어주거나 하는 것들이요. 아이들에게 작은 리듬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배가 아프거나 할 때 도와줍니다. 아이들에게 규칙적으로 음식을 주고 재우고 돌봐주고 안아주는 외부의 리듬을 통해서 아이들이 그것을 내면의 리듬으로 가져가도록 해줍니다. 여기에서 또 어른들에게 도전과제가 있습니다. 어른의 리듬은, 아이가 필요로 하고 아이에게 줘야 하는 리듬과는 정말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내려놓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 번째 도움을 주는 감각은 운동감각입니다. 앞부분에서 설명 드렸듯이 아이들의 생명력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머리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들의 모습을 보면 처음에 고개를 들고, 이제 앉습니다. 기다가 이제는 머리를 들어 곧게 일어나는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자기 몸을 조정하는 것을 머리에서부터 시작해 배워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맞는 시간과 공간을 줘서 그런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요람에 아이를 계속 눕혀 놓기만 한다면 움직인다거나 주변의 일에 반응하는 기회를 잃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소리가 들려요’, 그러면 ‘아, 여기에 뭐가 있네’ 하고 보고 손을 뻗고 구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람에 누워 있기만 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가 가지고 온 관심을 잘 이용해 발달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풀을 잡아 뽑는다고 빨리 자라는 게 아니다.’ 이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아이들도 똑같이 자라는 데에 필요한 시기와 과정이 있기 때문에 충분한 공간과 시간을 줘야 합니다. 처음 7년 주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아이들이 해보고 해보고 또 해볼 수 있게 하는 게 의지입니다. ‘아, 나는 이제 내 몸을 어떻게 조정하고 다룰 수 있는지 알겠어!’ 할 때까지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놀이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바위 위에 올라가서 균형을 잡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모래 위에서 놀기도 하면서 자기 몸을 잘 다룰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세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겁이 아닌 자신감으로 세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감각이 균형감각인데요, 세 번째의 운동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전에도 균형감각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 균형감각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방에 들어갔다 해도 ‘나는 나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2.5세까지 내장기관이 움직이고 자랐다면 그 이후 2.5세에서 5세에는 상상력을 가지고 노는 시기에요. 세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봅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고 주변에 있는 것들을 본 그대로 모방을 합니다. 유치원에서 소꿉놀이를 하면서, 저녁식사를 만들면서 인형에게 “아, 지금은 아냐. 나 바쁘니까.” 하면서 주변에서 보았던 걸 하는 것입니다. 5세에서 7세가 되면 ‘문지방’이라고 하는 경계까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노는 시기였다면 이제는 자기 계획이 생기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벤치에 혼자 앉아 친구들이 노는 걸 보면서, ‘난 저걸 갖고 놀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뭘 하고 놀지 이야기만 합니다. 왜냐면 머릿속에 계획을 세워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충분히 그런 활동을 할 수 있게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주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양극성에서 어떻게 하면 중간지점을 찾아갈 수 있는지 말씀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봐줄 수 있다면 아이들은 양극성에서 중심을 가질 수 있겠지요.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랑이 있다면, 이러한 사랑을 갖고 아이가 어떻게 발달해 가는지 이해를 한다면, 그리고 아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오는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아이에게 시간과 공간을 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것들을 통해 자신의 내적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기를 다 담아갈 수 있는 내적인 세계를 아이는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믿고 있는 것들을 통해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교육자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아가는 기회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 하고 의심하는 순간이 오는데 이런 것도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를 하나 들려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의심이 우리의 스승이다

길을 따라 여행을 했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네.
확신이 확신을 심어주었네,
돌만큼 단단하게.
나는 진흙탕을 걷고 있네,
시간으로 새겨진,
의혹에 젖고 젖은.
내가 그 길을 지날 때
조심스럽게
나는 확신하네.
사랑만이 그 여행에 가치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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