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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자연적 필연성의 질서> 옮긴이의 말 (1) - 사람들은 과학자의 지식을 신뢰한다 본문

책소개 및 서평

<자연적 필연성의 질서> 옮긴이의 말 (1) - 사람들은 과학자의 지식을 신뢰한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3. 15. 15:31

옮긴이의 말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주의 역사에서 인간만이 지성적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주 어딘가에는 또 다른 생명체가 있을 것이고, 인간보다 더 우월한 지성의 존재들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직 확인된 바 없으므로 인간이란 종의 의식 발달에 경의를 표하는 게 특별히 오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과학자의 지식을 신뢰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대상에 대한 지식에서 지식에 대한 지식,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에까지 관심을 확장해 왔다. 초기에 인간은 지식을 신적 존재가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대상과 신과 자신이 모두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지성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유를 통해 현상을 설명하려 했고, 스스로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자 애썼다.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철학 이론을 갖게 되었다.

 

지식을 얻는 방법에 변화가 온 것은 과학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세계는 과연 존재하는가?”라고 묻던 철학자들과 달리 과학자들은 세계는 존재한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가?”라고 질문하며 세계 그 자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계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리고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실제로 탐구한다. 그들은 탐구의 중심을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에 둔다. 그래서 관찰하고 실험한다. 과학자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세계에 벌어지는 일들의 인과적 힘이다. 우리가 경험한 사건 이면의 현상, 현상 이면의 실재 또는 근본 원인, 즉 자연적 필연성의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다.

 

물론 철학자들도 그것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로이 바스카는 그 원인을 철학자들의 인간중심주의에서 찾는다.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했던 그들은 지식의 확실성이 인간의 경험 또는 지성에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철학자들은 관념론에 빠지거나 경험주의 또는 실증주의의 길에 들어섰다. 인간중심적인 그들의 시각이 세계를 얼마나 왜곡시키는지, 정작 자신들은 몰랐던 것이다. 2층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것보다 1층 현관문으로 나가는 게 왜 나은지 모르겠다느니(흄), 실재의 세계는 결코 탐구할 수 없다느니(칸트) 하는 궤변은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보여 준다. 그 후예들은 관측자에 의해 양자도약이 결정되는 것이라며, 오히려 과학이 한계에 이르렀다(남경태))는 억지를 부린다.

 

세계를 관조하는 철학과 달리, 세계의 인과적 힘을 탐구하는 과학 덕분에 우리는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중력을 이겨내는 비행기를 만들 수는 없다. 반면, 과학자들은 달과 화성, 태양계 바깥까지 날아갈 수 있는 로켓을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과학자의 지식을 신뢰한다. 실천적 결과에서 과학에 패배한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로크의 말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과학의 앞길을 청소하는 조수의 역할도 야심만만한 일일 것이다.

 

바스카는 그 일을 했다. 자연과학에서 사회과학으로, 사회과학에서 통합적인 인간과학으로, 그는 한 발씩 나아가며 조수의 일을 충실히 해 왔다. 이제 그의 물질적 몸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기저 상태(ground state)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우리와 함께 작업하고 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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