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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자연적 필연성의 질서> 옮긴이의 말 (2) - 로이 바스카의 생애 본문

책소개 및 서평

<자연적 필연성의 질서> 옮긴이의 말 (2) - 로이 바스카의 생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3. 17. 10:05

로이 바스카의 생애

 

램 로이 바스카는 독창적 사상가인 만큼 그의 인생 역시 독특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의사였고, 어머니는 영국인 간호사였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515, 그는 런던 남서부의 테딩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두 형제의 맏이였다.

 

인도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바스카는 어릴 적부터 인종차별을 견뎌야 했다. 영국 사회에서 인도계는 직간접적인 억압과 배제를 당해 왔다. 이러한 환경이 그에게 주류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결국 초등학교 시절 원래 이름에서 인도풍의 을 빼 버리지만 2000년대 들어 자신의 뿌리에 대한 관심 속에서 다시 을 되찾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후기사상에 다르마와 카르마 같은 인도식 용어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부모는 신지학협회 회원이기도 했는데, 훗날 영성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그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고, 의사가 될 것을 강요했다. 그는 그 시절이 불행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스카는 스포츠를 좋아해서 학창시절에는 크리켓 경기에 열중했다. 한 경기에서 400점을 득점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책에도 나오지만 그는 열광적인 축구 팬이기도 하다. 그러나 11살에 무릎을 다치면서 철학과 음악, 춤에 열중하기도 했다. 흔히 건초염, 건막염이라고 하는 병에 걸렸던 그는 말년에 다시 신경성 근위축증을 얻어 다리를 수술하고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인간과 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바스카는 18세에 옥스퍼드대학교 발리올컬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흔히 PPE라 불리는 철학, 정치학, 경제학 과정에서 공부했는데, 이 과정은 정치가나 고위공직자 양성을 목표로 한다. 그 와중에 그는 나이트 클럽의 경비원으로 일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다. PPE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고민 끝에 그는 경제학부 대학원에 진학한다. 여기에서 그는 제3세계에서 유학 온 학생들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마르크스를 공부했다. 1968년 사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몇 차례 검사에게 소환되기도 했던 그는 영국 사회주의자협회의 창립 회원이 되었고, 사회주의 운동의 철학-정책집단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1968년에 그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과 노동운동에 관한 저서로 명성을 얻은 힐러리 웨인라이트(Hilary Wainwright)를 만나 1971년에 결혼을 했다. 신혼 기간에는 모잠비크해방전선과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의 초청을 받아 모잠비크와 앙골라의 해방구에서 지내기도 했다(두 사람은 나중에 별거를 했지만 평생 친한 친구로 남았고, 이혼하지 않았다). 이 해에 그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사회과학에서 설명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제출한다. 그러나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심사를 거부당하고 1973년 에딘버러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옥스퍼드를 떠난다. 사실 옥스퍼드의 경제학부 대학원에서 그는 <발전도상국에 대한 경제 이론의 적합성>에 관한 논문을 쓰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서구에서 개발한 경제 이론들이 소위 저개발국가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는 그의 문제 의식에 대해 관심을 갖는 교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주류경제학에서는 이론과 실재 세계의 비교를 금하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그들은 실재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 별로 의미 있는 논의를 하지 못했다.

 

바스카는 경제학부를 떠나 전공을 철학부로 옮겼다. 과학철학자인 롬 하레(Rom Harré)의 지도 아래 경제학에서 실재에 대해 다루는 것을 왜 금기로 여기는지를 밝혀내고자 했다. 그러나 철학에서도 실재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금기였다. 주류학문의 정상과학에 안착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했다. 실재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근대철학 전반에 대해 연구하던 그는 주류학문이 실재에 대해 침묵하는 이유가 존재론의 은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초월적 실재론을 통해 새로운 존재론을 정립해 냈다. 현실적합성이 부족한 사회과학의 원인이 인식론적 오류에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1974년 다시 논문을 제출하지만 끝내 통과되지 못했다. 옥스퍼드의 주류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자신들의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바스카의 태도를 탐탁치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하여 세 권의 저서, 실재론적 과학론(1975), 자연주의의 가능성(1979), 그리고 과학적 실재론과 인간 해방(1986)을 차례대로 출간했다. 과학철학, 사회과학의 철학, 이데올로기 비판을 주제로 삼은 프로젝트였다.

 

그는 정교수가 될 가능성이 없는 에딘버러를 떠나 서섹스대학교, 런던시티대학교 및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여러 대학교에서 비정규 교수를 지내며 제도권에서 벗어난 채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말년에는 런던대학교 교육연구소에서 교육, 평화, 갈등 해결, 기후변화 등을 주제로 학제간 연구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20141월에 심부전증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를 받으면서 5-7월 사이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온라인 동영상 강연을 마쳤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해 1119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고, 그의 곁을 지킨 이는 레베카 롱(Rebecca Long)이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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