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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 생명의 지혜로부터 바라보기 (1) 본문

인지학

크리스마스 - 생명의 지혜로부터 바라보기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12. 3. 15:37

크리스마스 - 생명의 지혜로부터 바라보기 (1)

 

1907년 12월 13일, 베를린
루돌프 슈타이너



정신과학(인지학)을 충분히 깊이 이해하고 있다면 (유물론적 사고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오히려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 정신과학이 직접적인 삶 속으로 우리를 더욱 더 이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운동의 사명을 성격 짓기 위해서 여기서, 또 다른 곳에서 이런 저런 자리에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진짜 삶-그들이 삶이라고 일컫는 그것-이란 정신과학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몇은 다행히 정신적 인식이 인간을 실제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끄는 데 최소한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신과학은 실행됩니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에서도 또 가장 큰 것에서도 행해집니다! 정신과학이 공식적이거나 또는 그 외의 다른 모든 일들과 관련을 맺고 완전히 관철하게 할 때 현대의 모든 문제들을 방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온전한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문제들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모든 잡다한 혼란들, 건강하지 못한 우리 시대의 모든 관계들, 시대적 질문이라고 부르는 것들, 오늘날 이러저러한 관점으로 아마추어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들은 우리 동시대인들이 정신과학의 진리로 자기를 관철하여 익숙하게 되면 순조롭게 해결의 자루를 쥐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문제 제기만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신적 인식의 감정적 측면에 더욱 몰두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고를 더욱 영혼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추상적이고 메마르며 이성적이고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그러한 시대에, 깊이 있고 느낌으로 가득한 삶의 이해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의 커다란 축제가 (크리스마스, 부활절 또는 성령강림절 같은) 다가오면 마치 거기에 외적인 형태, 외적인 조치들만이 이 축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선조들이 그러한 축제에서 영혼으로 느꼈던 생동하는 것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선조들에게는 전체 우주와 그것의 신적 토대를 향한 인간의 관계에서 저 깊은, 영혼을 생기 있게 하는 감정의 끌어당김이 있었습니다. 그 당김은 특별히 축제 기간 동안 살아납니다. 이 축제 기간 동안 영혼 안에 뭔가 실재인 것이 존재했습니다. 영혼은 이 기간 동안 1년의 다른 날들과는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낮이 점점 짧아져가는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까이 올 때, 또 땅 위의 눈이 천천히 녹고 땅 아래 숨겨진 것들이 다시 표면으로 올라올 때, 오늘날의 사람들은 선조들의 영혼을 이끈 것들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우리시대의 사람들에게 진리와 감정은 추상적이고 이성적이며 공허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통속적으로 선물을 나누는 축제 이상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 외에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우리 선조들을 완전히 이끈 것들과는 거의 관련성이 없습니다. 인간은 삶과의 관련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감정, 느낌으로 이 관련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정신과학의 사명입니다. 오직 통속적으로 정신과학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사람은 정신과학에 대해서 가장 적은 것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인식이 가슴과 영혼에서 살아갈 때 인간의 전체 감정세계와 감각세계가 다르게 변화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추상이 되었던 것, 한동안 그 의미를 잃어버렸던 우리 축제의 깊은 의미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 세상을 향한 친밀한 관계가 다시 파악되면 마치 정신적인 응시로 축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다시 살아서 영혼 앞에 등장할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자리에서 크리스마스의 깊은 의미에 몰두했었습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의 다른 측면이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인지학의 생각과 사상이 우리 감각(느낌)세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실제적으로 축제가 인간에 의해 뭔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지는지, 인간이 다시금 정신적 삶의 맥박을 감지하고, 세상을 관통하는 온기 - 정말로 모든 존재를 살아 있게 하는 온기로 느끼고 그것이 뜻하는 바를 다시 알게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인간이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볼 때 추상적인 천문학에 의해 하늘의 별들은 추상적이고 물질적인 천구(天球)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천구는 인간에게 다시 영혼과 정신의 몸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주 공간은 인간에게 다시금 정신으로 관통되고 혼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우주를 마치 친구의 가슴에서 느끼는 따뜻함과 같이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영혼, 각각 하나의 육체에 살고 있는 개성적인 영혼을 단지 인간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존재에게서는 다른 종류의 영혼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동물들도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의 영혼을 여기 물질계에서 찾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집단자아’라고 부르는 ‘동물자아’는 아스트랄계에 있습니다. 친척 지간인 동물의 전체 집단-예컨대 사자 무리, 호랑이 무리, 모든 고양이들–인 동류 형태에서 한 개의 집단은 공동의 자아를 가집니다. 여기 땅 위에서 장소의 분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자가 여기 동물원에 있든 아프리카에 있든 완전히 같습니다. 모든 사자는 모두 함께 비학 연구자가 아스트랄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자아에 속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개인성이 여기 물질계 위에서 배타적인(독립적인) 것처럼 집단자아도 아스트랄계에서 배타적인 개별성입니다. 여러분의 손가락 열 개가 여러분의 완결된 개별성에 속한 것처럼 모든 사자는 사자의 집단자아에 속합니다. 우리가 아스트랄계에서 각각의 집단자아를 알게 되면 집단자아들의 가장 눈에 띄는 성질이 지혜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에 비해 땅 위에 있는 각각의 동물들은 우리에게 거의 지혜롭지 않게 비쳐질 것입니다. 아무도 여기 개개 동물들의 특성이 집단자아의 특성, 즉 아스트랄계에 있는 동물의 개별성에도 해당된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손가락들이 각기 개성적인 자아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보기 힘든 것처럼 개개 동물이 집단자아의 특성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이 집단자아들은 지혜롭게 움직입니다. 이 개개의 동물자아들은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동물들의 능력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은 집단자아의 작용입니다. 그들은 우리 지구 주변에, 대기에 살고 있습니다. 가을이 다가올 때 새들이 어떻게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날아가는지, 그리고 봄이 가까이 올 때 어떻게 다시 남서쪽으로부터 그들의 고향인 북동쪽으로 날아가는지 여러분이 새들의 비행을 따라가면서 질문한다면, 누가 이 새들의 비행을 지혜롭게 이끌고 각각의 종과 종류의 집단자아에서 지시자와 지휘자를 찾는다면 여러분은 비학 연구자가 됩니다. 모든 동물 무리 안에 아스트랄 자아가 살고 있습니다. 아스트랄계에서는 그것이 여기 인간의 자아와 같은 자아입니다. 단지 더욱 지혜로운 자아입니다. 여기 물질계보다 더 영리한 자아들은 거기 아스트랄계에서는 여기 물질계의 개개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집단 개별성입니다. 개개 동물들을 지혜롭게 조정하고 있는 것은 동물 집단자아의 드러난 지혜입니다. 도처에서 우리가 그들의 행위를 보고 그 존재를 관통하여 살아갈 때 세상을 다르게 통과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식물세계를 봅시다. 이 식물 영역의 자아는 동물의 집단자아보다 더 높은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정신세계 또는 데바찬(Devachan)에 식물의 자아가 놓여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식물의 자아는 아주 적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식물자아는 여기 땅에 있는 식물의 모든 종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식물자아를 공간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면 땅의 중심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식물자아는 지구 중심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자아들이 모두 저마다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면, 그것은 자아와 정신에 대한 짧은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정신 안에 모든 것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특별히 신지학자들에게만 추천되는 책에 담겨 있는 의견을 갖게 됩니다. 그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천 년 동안 수 억만 명의 인간이 살았다면, 그렇게 많은 수의 영혼이 지구 주변에 있어야만 한다면 지구 주변의 공간은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 이런 생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부합니다.

지구는 하나의 행성이자 하나의 전체 유기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식물의 자아를 지구의 중심에서 찾습니다. 머리카락이 여러분의 기관인 것처럼 우리 지구의 기관 가운데 한 부분인 식물은 자기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지구 유기체의 구성원입니다. 식물의 아픔과 즐거움은 지구 유기체의 아픔과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에 식물의 고통과 즐거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식물에 (대체로 윗부분에 해당되는) 상처를 낼 때 이 상처가 우리 지구 유기체의 고통의 느낌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땅에 행복감이 퍼집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마치 송아지가 어미 소의 젖을 빨 때 행복감과 연결된 것과 같은 그런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식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 딱딱한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초록은 지구 유기체에게는 동물 유기체의 우유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을에 농부가 낫으로 짚을 벨 때 정신과학의 사상을 영혼의 감각으로 깊이 이해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단지 추상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낫으로 베는 것은 들판 위를 뒤덮는 즐거움의 숨결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곡식의 수확은 밭에 즐거운 감정을 뿌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의 가슴에서 느끼는 것처럼 지구 기관과 함께 느끼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식물을 뿌리째 뽑자마자 지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땅의 고통을 이해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가 식물을 뿌리째 뽑으면 그것은 지구에게 고통입니다. 꽃을 꺾기보다 식물을 뿌리째 옮기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식으로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상황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흰 머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젊음을 유지하려고 첫 번째 흰 머리카락을 뽑습니다. 그러면 고통을 느낍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에 놓여 있는 자연에서 느끼는 법을 배우고, 자연은 우리에게 점점 더 영혼과 정신이 됩니다. 채석장에서 석수장이가 돌을 두드릴 때도 우리가 정신과학의 사상을 영혼의 감정을 향해 몰두하면 그것은 뭔가 추상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냥 암벽에서 돌이 떨어져 나오는 것만을 보지 않습니다. 바위가 튀어 오르게 되면 그것은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저기 외부에 영혼이 스며 있고 정신이 스며 있는 자연이 느끼는 것을 공감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우리가 물이 들어 있는 유리잔 앞에 서 있을 때, 물에 소금이나 설탕 한 조각을 넣고 어떻게 소금 또는 설탕이 녹는지 바라볼 때 거기에서 뭔가를 느끼게 됩니다. 거기에는 영혼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영혼이 들어있는지 알기 원합니다. 이때 일상적인 분석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석수장이가 돌을 떼어내는 것은 자연에게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쉽게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광물세계에서 쪼개지는 것은 자연에게 커다란 기쁨, 내적인 행복감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설탕 한 조각이나 소금을 물에 녹이면 그것은 내적인 행복감입니다. 녹아버리는 광물체의 행복감이 물로 흘러듭니다. 다른 경우에는 다릅니다.

지구의 태곳적 시대를 상기해 봅시다. 그 시대 지구는 불타는 액체 상태였고, 모든 금속과 광물은 우리 지구 안에 녹아 있었습니다. 지구는 그 상태로 계속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무대,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단단한 무대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금속과 광물은 액체 상태에서 굳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고형화되어야 했습니다. 액체 성분으로 녹아있던 것이 뭉치고 결정화되어야 했습니다. 비슷한 과정이 소금을 녹인 물 한 컵에서도 일어납니다. 물을 차갑게 식혀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소금 결정이 단단한 물체로써 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따라가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광물세계의 고통의 감정입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광물 영역의 부서짐, 쪼개짐은 땅의 행복감입니다. 견고화되는 모든 것, 단단하게 되는 모든 것, 모든 결정화는 고통 아래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고통 아래에서 모든 암석이, 우리가 걸어 다니는 삶의 장소인 단단한 광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크고 작게 우리 지구 영역의 고체화 과정에서 있었습니다.


(계속)



[출처 : http://cafe.daum.net/Gemeinschaft12/PzWy/57?q=%B7%E7%B5%B9%C7%C1+%BD%B4%C5%B8%C0%CC%B3%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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