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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 생명의 지혜로부터 바라보기 (2) 본문
크리스마스 - 생명의 지혜로부터 바라보기 (2)
1907년 12월 13일, 베를린
루돌프 슈타이너
우리가 지구 발달의 미래를 바라본다면, 딱딱한 것들이 더 액체화되고 녹아버리는 현상을 떠올려보아야 합니다. 지구는 최후에 우리가 아스트랄 지구라고 부르는 상태로, 지구 물질이 점점 미세해질 때까지 변화합니다. 지구 형성과정의 절반에서는 아픔과 괴로움 아래서 우리의 생활을 위한 단단한 무대가 되는 것을 봅니다. 반대로 마지막에 점점 더 축복받은 행복감이 지구 형성을 관통합니다. 그리고 지구가 우주의 아스트랄 존재가 되는 하늘의 행성으로 변화하면 전체 지구는 행복감에 빠집니다.
비학 입문자가 이러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들은 진술 안에서 언제나 깊은 비밀을 드러냅니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비밀을 여러 방법으로 이해되는 문장으로 진술합니다. 비학 입문자였던 바울은 언제나 중의적인 문장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정신세계로, 우주의 이해로 자신을 넓혀갈수록 바울의 진술은 더 깊이 있게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지구유기체가 고통 아래서 단단하게 되었고, 그들의 해체 또는 정신적-천상적 존재가 되는 것은 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양자로 받아들이기를 고대하면 자연 전체가 고통 아래서 탄식한다!> 우리가 서 있고 걸어가는 단단한 광물을 만들어낸 고통을 입문자 바울은 이런 깊이 있는 언어로 생각했습니다.
정신과학을 단지 사고체계라고만 생각한다면 정신과학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사상을 감정으로 변화시키고, 우리가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일입니다. 우리는 탐구하는 것마다 우리가 외부적으로 보았던 것들을 새롭게 느끼고 감각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교 비학을 알았던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연에서 살아 있는 것을 향한 모든 즐거움과 고통의 감각을 아직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저술가를 18세기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글을 통해 말합니다. 그 글들은 그들에겐 사실로써 이해되지만 오늘날 인간에게는 단지 문장일 뿐이거나 (기껏해야) 수준 높은 비유나 그림일 뿐입니다: “너희들은 자연에 대하여 사고만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그것을 감각하고 맛보고 느껴야 한다!” - 그들은 낫을 든 사람이 밀을 수확하는 것을 보면서 들판 위로 멀리 번지는 기쁨을 맛보고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채석장에서 석수장이가 돌을 떼어내는 것을 보면서 자연의 행복감에 공감했습니다.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흙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 쌓이는 흙과 함께 고통의 감정이 쌓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럴 때 자연은 우리에게 완전히 생기 있게 살아 있게 됩니다. 그렇게 인간의 영혼은 좁은 곳으로부터 나와서 세계 속에서 삽니다. 감정은 주변세계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주변에 놓여있는 전체 자연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주변에 놓여 있는 전체 자연과 한 조각 한 조각씩 하나가 되면 자연의 정신성, 영혼성에서 커다란 사건을 느낍니다. 봄에 낮이 점점 길어질 때 점점 더 많은 빛이 땅으로 흘러들 때, 땅 속에 있는 씨앗이 비밀로 가득한 땅 속으로부터 식물로 자랄 때,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초록으로 뒤덮일 때, 우리 눈에 보이는 초록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영혼적으로 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반대로 대지로 오는 빛이 점점 적어지고 낮이 점점 짧아지는 겨울에 식물들은 다시 움츠러들고 초록은 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녁에 잠을 자러 갈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연이 깨어나는 봄에도 무언가를 느낍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에게 단지 비유가 아니고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변화, 즉 자연의 정신과 영혼의 변화를 느낍니다. 여름 중반이 되면 모든 것들이 아래로 향해가는 것처럼 우리 땅의 영혼도 잠자는 상태로 기웁니다.
저녁에 인간이 잠자는 상태로 기울면(잠이 들면) 우리가 자주 언급했던 그런 살아 있는 과정을 우리는 가집니다. 점차로 인간의 자아와 아스트랄체가 빠져 나와 자유롭게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 고유의 본래 세계로 흘러갑니다. 인류의 현재 발달 상태에서 인간은 아스트랄체를 에테르체와 물질체에서 들어올릴 때 정신적인 의식을 빛낼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일과 정신적인 세계가 물질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쉽게 자신의 물질체로부터 나와 다른 존재형태로 등장합니다. 오늘날의 발달 상태에서 인간은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의 지구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아스트랄체는 1년을 통해 변화합니다. 이 변화는 지구의 두 개의 반구(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다르게 일어납니다. 오늘은 그것을 다루지 않겠습니다. 우리 지구의 아스트랄체는 대체로 식물과 생명이 땅으로부터 솟아오르고 그와 함께 지구의 자연존재가 활동하는 시기 중에 활동합니다. 아스트랄체는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살핍니다. 그것은 초록이 되고 번성하는 땅 위의 모든 것을 보살핍니다. 그리고 가을에 땅이 잠자는 상태가 되면 지구의 아스트랄체는 그의 정신적인 잠으로 넘어갑니다.
이러한 지구의 과정을 생생하게 감각하는 이들은 태양이 높이 떠 있는 봄부터 가을까지 밖에서 싹트고 번성하는 모든 것에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지구정신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가을이 다가오면 그들은 자유롭게 된 지구정신의 맞은편에 서 있습니다. 낮이 짧아질 때 그것은 외적인 물질체의 삶이 대부분 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정신의 삶이 깨어납니다. 지구의 정신적인 삶은 무엇입니까? 누가 지구의 정신입니까?
이 <지구정신>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구의 정신으로써 지칭하였습니다: <이 빵을 먹는 자는 나를 디디며 살 것이다.> 그리고 그는 땅이 인간을 위한 안정된 양식을 가져온다고 암시했을 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을 관통해 흐르는 과즙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 피다.> 그 당시 그는 이 두 가지 진술로 지구 스스로가 그의 기관임을 지칭하였습니다.
서기 이전에는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그것은 서기 후와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시대에(서기 후에) 지구발달의 특정한 순간에 처음으로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고대의 성스러운 비의가 행해질 때 입문의식을 치르는 자는 낮이 짧아지는 동안 그들의 모든 영혼적인 태양존재와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략 우리가 크리스마스라고 일컫는 날의 자정에 태양을 볼 수 있도록 성스러운 신비 속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는 영시능력이 요구되었습니다. 현대 인간은 자정에 태양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 세상에(지구의 저편) 있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자에게는 물리적 지구가 태양을 보는 데 방해물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태양을 그의 정신적 본질성 안에서 봅니다. 입문자가 자정에 성스러운 비의에서 태양을 볼 때, 그들은 태양의 통치자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은 그 당시 아직 전적으로 태양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골고다 위에서 상처로부터 피가 흘렀을 때 그것은 전체 지구 발달을 위한 의미 있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신비적 사실과 맞닿아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도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시력을 가진 누군가가 먼 행성에서 수천 년 간의 지구 발달을 뒤따라 갈 수 있다면 그는 단지 지구의 물리적 육체만이 아닌 지구의 아스트랄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 지구의 아스트랄체는 수천 년 간 특정한 빛, 색, 형태를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 그것이 변했습니다. 다른 형태가 나타나고, 다른 빛과 다른 색이 빛났습니다.
그것은 골고다에서 속죄자의 상처로부터 피가 흐른 순간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인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에 의해 태양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그리스도 자아가 지구로 왔습니다. 그것은 지구와 결합했고 우리는 지구의 정신에서 그리스도 자아, 태양자아를 발견합니다. 입문자들이 크리스마스 자정에 고대의 성스러운 비의 안에서 찾던 태양정신을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지구중심 정신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정신과 자신이 생생하게 연결된 감정 안에 그리스도교 의식이 놓여 있습니다. 단지 일상적인 그리스도교 의식이 아닌 그리스도 입문자의 의식입니다.
이것은 해마다 낮이 짧아지고 자연의 땅이 잠이 들면 일어나는 과정에 존재합니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구의 정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임의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입문의 원칙에서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시간에 구원자의 탄생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뭔가 영원하고 의미 가득하며 정신적인 것이 짧아지는 낮과 길어지는 밤과 연결됨을 보고, 이 사건에서 지구 발달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영혼이 존재함을 느낍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할 때 그들은 교리나 생각의 집합을 지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교 교리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진술하는 문장으로만 누군가를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문장들을 다른 종교 지식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뭔가 특별한 것으로 볼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오늘날 교육받은 집단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 합치한다는 데 특별한 가치를 둡니다.
그것은 옳습니다. 예전에 이미 가르쳐지지 않은 교의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가르침 하나만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인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말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인이 아니고 그리스도 정신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인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은 실제로 땅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와 자기-연결-감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교 교의를 시인하고 그리스도교를 설교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설교하는 것은 태양의 주관자로써 우리가 성격 지은 정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정신은 골고다에서 상처로부터 피가 흐른 그 순간에 지구로 그의 일을 옮겨왔고 그것에 의해 지구는 태양의 일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리스도교가 전도될 때 단지 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개인을 전도하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도록 재촉함을 느꼈습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성스러운 산에 있었을 때 우리는 그를 보았다.> 그가 거기에 있었던 것, 그들이 그를 보았던 것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그의 상처를 만졌다.> 그들은 그의 상처를 만진 것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으로부터 모든 미래 지구의 인간발달이 나옵니다. 당시에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산에 있었던 것에 큰 가치를 둔다... 우리는 진리와 지혜로부터 온 예언자의 말이 그에게서 이루어진 것을 큰 사건으로써 이해한다.>
예언자가 미리 알았던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에 고대의 성스러운 신비 속에서 크리스마스 자정에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예언할 수 있었던 예언자와 입문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알고 있던 것이 성취되었다고 첫 번째 그리스도 제자들은 골고다의 사건을 이해했고, 커다란 근본적인 변화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인 과거로 가면 갈수록 모든 사랑이 혈연에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나온 유대민족 안에서 우리는 아직 혈연으로 된 친척 간에서만 사랑을 봅니다. 우리는 공동의 피가 흐르는 자를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봅니다. 과거에는 언제나 공동의 피라는 자연적 토대 위에 사랑이 머물렀던 것을 봅니다. 피와 살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적 사랑은 그리스도와 함께 지구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는 이 격언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를, 아내와 아이를 떠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사랑이 피와 자연적 토대에 종속적인 사람은 이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커다란 형제의 끈으로 인류를 관통하는 정신적 사랑이 그리스도교 사건입니다.
그것에서 인간은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커다란 자유, 커다란 내적인 완결성을 배웁니다. 아직 시편은 말합니다: <나는 오래된 시간을 기억하고 고대의 시간에 대해 숙고한다.> 이것은 과거 시간에 대한 끊임없는 감각이었습니다. 선조를 향하는 선조의 피가 아직 자신의 핏줄에 흐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유대인은 자기의 가장 고귀한 것을 말하기 원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아브라함과 하나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 (그의 가장 깊은 토대인) 아브라함의 무릎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엔 그리스도 예수가 인류의 의식 안으로 가져온 독자성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나는 나다(여호와)>라는 의식이 인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인간의 가장 내면에 있는 신적 존재의 완전한 신성>과 하나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나는 나다>를 느꼈습니다만 선조와의 관련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흐르는 공동의 피 속에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 예수가 와서 인간에게 가장 오래된 것, 가장 독자적인 것을 가져왔습니다. - <나는 나다>가 단지 한 민족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 각각의 개인 안에 있는 것, 그래서 사랑을 각각의 개인에게서 다시 찾아야 하며, 자기 스스로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닫혀 있는 여러분의 자아는 밖을 향해서 완결되어 있고, 밖을 향해 정신적 사랑을 찾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와 함께가 아니라 세상의 정신적인 아버지와 함께 이 자아를 하나로 느낍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는 아브라함에 이미 있었다’라고 그들이 말할 때 그리스도는 이것이 가장 깊은 것이 아님을 (그가 더욱 이성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깊은 말이 있음을 인간에게 분명히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전에 ‘나는 나다(여호와)’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써 있는 그 진술은 원래 본문에서 그런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전에 ‘나는 나다’가 있었다.> 그것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본질과 그리스도교의 삶 속으로 깊이 뚫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왜 <나는 세상 끝까지 모든 날들을 너희와 함께 한다>고 가르쳤는지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나다>의 시간을 초월한 태초부터 영원한 비밀을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에 매번 새롭게 말하는 크리스마스 송가의 문장을 제대로 의미 있게 느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노래를 기억으로써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났던 것이 아닌 매번 <오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태어났다>의 의미를 오늘 생각해 봅시다. 이 사건은 시간 외적인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전에 일어났던 가르침을 감정과 감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언제나 다시 새롭게 일어납니다.
그런 축제에서 생각하는 것을 인간이 다시 생생하게 감각하게 되면 정신적인 세계관이 다시 인간을 이끌 것입니다. 추상적인 가르침, 추상적인 이론은 인간의 사명이 아닙니다. 인간을 다시 생명으로 완전히 이끄는 것은 추상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도처에 영혼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채석장에서 돌이 쪼개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영혼을 느낍니다. 새가 나는 것을 볼 때, 낫이 들판의 곡식 위를 지나가는 것을 볼 때, 태양이 뜨거나 질 때 우리는 영혼을 느낍니다. 우리가 깊이 있게 사건을 관찰할수록 우리는 더 깊이 있게 영혼을 느낍니다. 일 년의 커다란 전환점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영혼의 현상을 느낍니다. 그리고 축제에 숨겨져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한 해의 전환점에서 다시 느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축제는 인간의 영혼을 관통하는 살아 있는 숨결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축제의 순간에 완전히 정신적이고 영혼적인 자연의 작용과 직조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인지학자는 개척자로서 인류가 다시 정신을 이해하게 되면 축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 축제에서 정신을 이해한다는 의미를 먼저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의 축제날에 자연의 감정과 감각에 대해 뭔가를 느낀다면, 그리고 정신적 인식을 삶의 가르침으로 인간에게 다시 가져온다면, 그것은 인간을 다시 실제 세상으로 이끌어내는 힘이 됩니다. 그러면 정신과학은 영혼의 살아 있는 사실이 됩니다. 그것은 생명의 지혜(Vitasophia)가 됩니다. 세계영혼이 아주 특별히 우리에게 내려와 특별하게 우리를 자기와 묶어버린 시간에 가장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Gemeinschaft12/PzWy/57?q=%B7%E7%B5%B9%C7%C1+%BD%B4%C5%B8%C0%CC%B3%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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