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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교육은 치료다" - 발도르프 특수교육학의 관점 (3)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특수교육

"교육은 치료다" - 발도르프 특수교육학의 관점 (3)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8. 6. 15:27

"교육은 치료다"

- 발도르프 특수교육학의 관점 (3)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치유교육은 소아정신의학과 직접 연계되어 있고, 그 밖에 소아의학과 신경학, 그리고 심리학의 지원으로 발전되었고, 발전되고 있는 과학이다. 동시에 치유교육은 지속적으로 만개하고 있는 실용예술이다. 치유교육은 교육분야와 특수교육 분야뿐 아니라 언어치료, 신체치료, 오이리트미와 치유오이리트미, 수채화, 회화, 음악과 음악치료, 직조(weaving)와 도자기, 그리고 목공예와 같은 수공예, 직업치료와 같은 분야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치유교육을 광의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치유교육이란 과학이자 실용예술인 동시에 인간의 태도이다. 이 치유교육은 파괴되고 있다는 위협 아래 있는 인간에게 치료약처럼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치유교육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이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치유작업의 의미이자 가치이다."
 
(칼 쾨니히, <Sinn und Wert heipadagogischer Arbeit>, Die Drei, 1974: p229)
 
장애를 선택해서 내려온 정신 존재는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커다란 의도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기적 욕망을 쫓으며 살아가는 대중에게 장애인의 존재는 소위 '정상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역시 '비정상적인' 모습이 있음을 일깨우고, 부족한 우리 모두가 서로를 도우며 살 수밖에 없다는 통찰을 준다. 그러나 장애인의 삶은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헌신이 있어야만 그 삶이 가능해서도 안 된다. 그는 단지 장애가 있을 뿐 온전한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 역시 비장애인과 똑같이 존엄한 존재로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이들에 대해 차별과 배제를 일삼았던 과거의 공동체는 인류의 낮은 의식 수준을 보여준다. 우리는 좀 더 높은 의식 수준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많은 부분에서 장애를 지닌 아이들은 자신을 가르치는 교사의 스승이었으며, 자신을 치료하는 치료사의 치료사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한쪽으로 치우쳐 발달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전체성의 잠재력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우리 자신의 고결함과 성숙 그리고 충만감을 발전시키게 해주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줄곧 지원자인 동시에 동행자였습니다. 많은 분야에서 현대과학이 꿈과 같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인간의 행복감이나 안녕감(well-being)은 증가되지 않았습니다. 또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신념도 증가시키지 못했습니다. 미래에는 더 넓은 의미의 공동체인 사회가 생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소위 '정상인'과 '장애인'이 서로를 인식하고 돕는 행위에 기초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한 사안이 될 것입니다."
 
(토마스 와이즈, Auchterarder의 Ochil Tower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공개 강연회)
 
발달 과정에서 어려움을 가진 어린이를 돕는 일은 최상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 슈타이너는 우리 자신이 교사로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말이나 행위 같은 모습, 학벌과 같은 스펙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 자신은 어떠한 인격인가? 우리는 어떤 과제를 가지고 이 세상에 왔고, 또 어떤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의 기쁨과 괴로움은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질문은 또한 아이들을 향해야 한다. 특히 발달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위해 우리는 더 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로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신비에 대해 더욱 더 큰 흥미를 발달시켜야 하며, 이러한 흥미와 관심 속에서 어려움이 있는 아이를 충만한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인지학에 따르면 정신세계에서 온 존재가 유전적 결함이 있는 신체를 고르는 것은 인간의 유기체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카르마에 의한 불가피성으로 생기는 일이다. 우리가 지상의 삶에서 주변 환경에 대한 흥미를 발달시키지 못하면 죽음 이후 인간 유기체에 대한 우리의 앎은 약화된다. 아이들의 흥미를 발달시키지 못하는 교육은 아이들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이어서 인식 능력의 저하를 불러온다. 발달 장애를 지닌 어린이를 교육한다는 것 역시 대부분 의지의 결함과 관련된다. 사고의 결함은 이에 비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천재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다음 생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하감옥에 갇혀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예를 들어, 위대한 티벳의 스님이 다음 생에 태어났을 때에도 일찍 출가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천재지만 중국공산당의 폭력에 의해 지하감옥에 갇혀 평생을 보내고 사망하였다고 해보자. 위대했던 그는 인간 신체의 내면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 생에서는 정신질환자가 되고 말았다. 이때 우리는 그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를 무시하고 그의 아스트랄체와 자아를 바라봐야 한다. 그의 비정상적 모습을 충만한 사랑으로 바라봐야 한다. 현재의 증상을 묘사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카르마의 관련성과 외부 세계에서 주어진 삶의 상황 속에서 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발달 장애 어린이를 치료한다는 것은 카르마에 관여하는 것이다. 죽음 이후 신적 존재들이 하는 일을 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작업은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방식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신들의 일에 관여하는 것으로 나중에 완성된다. 우리는 정신세계에서 새로운 힘을 부여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책임감과 양심을 강화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영혼 생활을 피상적으로 고찰할 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결코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없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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