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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러스 켈리. 이것은 나의 이야기... 나의 삶!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러스 켈리. 이것은 나의 이야기... 나의 삶!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8. 8. 01:16

러스 켈리. 이것은 나의 이야기... 나의 삶!

 

번역 김훈태(슈타이너사상연구소)

 

 

십대 시절, 러스 켈리와 그의 친구는 술에 취한 채 스물두 가정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고 기물을 파손했다. 담당 보호관찰관은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에 두 젊은이가 피해자를 만난 다음 손해를 배상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 편지에서 켈리는 자신을 범죄로 이끌었던 삶의 행로와 피해자를 직접 만났던 일의 충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현재

 

안녕하세요? 좋은 날입니다! 제 이름은 러셀 켈리이고, 지금은 20059월입니다. 제가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한 지는 14년째가 되는군요. 2년 전에 저는 키치너(Kitchener) 시의 코네스토가(Conestoga) 대학에서 법학과 안전 관리 프로그램을 졸업했습니다. 여가시간에는 워털루 지역의 지역사회 정의구현(Community Justice Initiatives)이라는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합니다. 제 활동은 지역사회 중재와 밀접한데, ‘피해자-가해자 화해 프로그램에서 회복적 정의와 관련된 약속에 대해 객원으로 강연하고 있고, 보통은 지역사회 정의구현 단체에서 그곳의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일은 라디오와 TV, 그리고 신문 인터뷰 등을 통해 진행되기도 합니다.

 

올해는 캐나다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이 일어난 지 3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046월에는 워털루 지역의 지역사회 정의구현 단체의 역사를 담은 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온타리오 주의 키치너 시에서 어떻게 회복적 정의 운동이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이 운동의 역사에 대한 선명한 그림들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의 저자는 저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했습니다. 제가 왜 이 책을 위해 인터뷰했는지, 이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분은 궁금해 하실 수도 있겠지요.

 

 

나를 만들어온 시간들

 

제 일곱 형제자매와 저는 온타리오 주의 높은 산속 숲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돌봐야 할 아이를 여덟 명이나 맡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맏이인 형이 제 공식적인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형은 막 결혼을 하였고 자신의 삶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은 몇 가지 나쁜 선택과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었기 때문입니다. 형의 문제를 지적하고 보호해 줄 아버지가 없어서이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그때가 참 두려운 시간이었지만 형에게는 도전적인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형의 보호 아래 살 때는 형의 규칙을 따라야 했는데, 형은 제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원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형을 존경합니다. 형은 자신의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부당한 고통의 느낌과 어머니를 잃은 깊은 상처로 인해 저는 혼란스러운 십대를 보냈습니다. 1971, 그러니까 제가 어머니를 잃고 비통함과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는 온전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었습니다.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저는 여전히 아버지의 상실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저는 학교의 상담교사를 찾아갔고, 오로지 제가 미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정된 정신과의사를 만났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감정과 분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도움이 될 만한 일은 해 주지 못하셨습니다. 제 문제와 관련하여 제 형제자매를 언급하는 것은 아무런 선택사항이 아니었고, 이모와 삼촌들은 우리 가족과 긴밀한 관계라고 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감정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저는 마약과 알콜에 빠져들었습니다.

 

 

비행으로 변한 나쁜 습관

 

1974년에 저는 만성이 된 제 습관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들, 즉 마약과 알콜과 관련해 강력한 의존관계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후에 비통함과 고통은 당연히 긍정적으로 해소되거나 환기되지 못했고, 마약과 알콜에 취하거나 이따금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다고 느껴질 때면 적개심에 불타서 날뛰었습니다. 분명하게 생각하거나 현명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는 싸움에 말려들었고, 거의 날마다 필름이 끊겨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시적 기억상실 증세는 항상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도 못했고, 제 부모님이 원했던 대로 살아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자랑스러워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오고 갈 데 없는 길에 놓였습니다. 제 삶은 말도 안 되는 처지였습니다.

 

19745월의 어느 밤, 저는 소위 친구라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온타리오 주의 엘마이라 시에 갔습니다. 물론 그 방문은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친구와 저는 한 상자 또는 두 상자의 맥주와 함께 운전을 하려고 갔습니다. 우리는 뒷길로 돌아서 몇 시간씩 맥주를 마시며 운전을 했고 시시각각으로 취해갔습니다. 우리가 경찰에 의해 길 한쪽으로 차를 댔던 건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경찰은 우리의 맥주 왼쪽에 무엇이 있는지 살핀 뒤 엄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인사불성이 되어 미쳐버린 밤

 

우리는 시내로 돌아와 친구들이 사는 아파트에 갔습니다. 아파트에 다 왔을 때쯤, 제 친구는 나가서 지옥을 만들어버리자고 부추겼습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였지만, 저는 어깨를 으쓱하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지옥이라고? 안 될 게 뭐 있어!” 저는 친구에게 어떤 생각이 있는지 물었고, 친구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게 있으면 다 때려 부수고 짓밟아버리자고 했습니다. 엘마이라에서 한 짓이 자랑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분에게 전부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버튼을 누르면 날이 튀어나오는 칼을 가졌고, 제 공범은 날카로운 부엌칼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승용차 24대의 타이어를 터뜨렸습니다. 카시트를 칼로 찢었고, 차의 냉각기를 부숴버렸습니다. 돌을 던져서 가정집의 커다란 유리창을 깼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역의 맥줏집 창문들도 깨버렸습니다. 보트를 길거리로 끌고 와 구멍을 내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전망대를 망가뜨리고, 교차로에 있는 신호등을 박살냈으며, 지역 교회에 세워진 십자가를 꺾어버렸습니다. 승용차의 사이드 미러와 앞유리를 맥주병으로 내리쳤습니다. 정원 탁자를 연못에 빠트렸고, 울타리를 망가뜨렸습니다. 모두 합해 스물두 가정의 재산에 해를 입혔습니다. 이 모든 일이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 두 시간 동안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미친 짓들을 마음껏 벌인 뒤에 아파트로 발걸음을 옮겼고 필름이 끊겼습니다.

 

 

체포되다

 

경찰이 문을 두드린 건 아침 7시쯤이었습니다. 누군가 뒷마당을 통해 달려가는 우리를 보고 경찰에 신고를 했던 것입니다. 전날 밤 길가에 차를 대게 했던 젊은 남자 둘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공범과 저는 조사를 위해 별도의 방에 수감되었습니다. 경찰들은 우리에게 좋은 경찰 나쁜 경찰이라는 상투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난밤에 있었던 모든 범죄행위를 우리가 저질렀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저질렀던 그 엄청난 일을 알았고 끔찍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난장판을 만든 제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제 공범은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가 자백을 한 건 제가 먼저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안 뒤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얼마나 심각한 짓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결과를 직면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습니다.

 

 

사법 시스템의 변화

 

엘마이라 사건이 벌어졌을 때, 마크 얀치(Mark Yantzi) 씨는 보호관찰관이자, 키치너 시의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의 자원봉사자였습니다. 마크 씨는 우리 사건을 담당했는데, 다른 봉사자들과 회의를 할 때 이렇게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이 젊은이들에게 피해자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균형 잡힌 일이지 않을까요?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을 책임지고 피해 입힌 것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마크 씨는 이러한 접근법에 어느 정도 치유적 가치가 있다고 느꼈지만, 이 기발한 아이디어가 얼마나 더 큰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봉사자인 데이브 워스(Dave Worth) 씨가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공감하며, 범죄행위를 조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판사에게 제안을 하자고 했습니다. 마크 씨는 사전 보고서에 그 내용을 덧붙여 판사에게 제출했습니다. 고든 매코넬(Gordon McConnell) 판사는 법적으로 전례가 없는 이 아이디어를 허가했습니다. 매코넬 판사 역시 회전문 같은 재판에 피로를 느꼈고, 새로운 접근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 공범과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법적인 토대가 없었기 때문에 마크 씨는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것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조언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기발한 제안을 따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분명히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피해자들을 만나는 데 동의함으로써 판사가 우리의 보호관찰 명령의 일부로서 포함한 이 제안은 비로소 문을 열었습니다.

 

 

피해자들을 만나다

 

피해자들을 만나는 일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습니다. 보호관찰관인 마크 얀치 씨와 자원봉사자인 데이브 워스 씨는 우리와 함께 피해자의 집 현관까지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사과를 하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피해 보상금액을 정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를 겨냥해 벌인 짓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기물을 파손했던 행위였음을 납득시키려 했습니다.

 

어떤 피해자들은 용서를 해주기도 했지만 다른 분들은 우리가 적절한 처벌을 받길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난폭한 범죄 행위에 의한 피해자들을 만났고, 한두 달이 지난 뒤에 우리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직접 갚아야 할 손해 배상 비용으로 보증수표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피해 보상을 위한 총금액은 대략 2,200 달러였습니다. 제 공범과 저는 각각 550 달러를 피해 보상을 위해 지불했고, 200달러씩의 벌금을 냈습니다. 또한 우리는 18개월의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로써 제 인생의 부끄러운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사법적 시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로부터 피해자-가해자 화해 프로그램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해답을 찾다

 

무거운 물건을 반복하여 들어 올리는 일을 포함해 오랜 세월 공장 노동을 하면서 저는 허리를 다쳤습니다. 직업을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안전(security) 분야의 일을 새롭게 선택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입학해 법학과 안전 관리 프로그램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객원 강사를 통해 다양한 주제에 관한 발표를 들었습니다. 하루는 지역사회 안전에 관한 수업을 하는데, 워털루 지역의 지역사회 정의구현 단체에서 객원 강사가 오셨습니다. 줄리 프리센(Julie Friesen) 선생님은 보호관찰관인 마크 얀치 씨가 담당했던 1974년의 특별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크 얀치 씨는 그 당시 저의 보호관찰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줄리 선생님은 젊은 두 주정뱅이가 엘마이라 시내에서 벌였던 기물 파손 행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저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말 그대로 한 대 맞은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저에 관한 것임을 알았고,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가 제가 벌였던 문제에 집중되면서 제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고 심장은 지나치게 쿵쾅거렸습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듯 제 얼굴은 새빨갰을 것입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줄리 선생님은 사건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두 가해자에게 연락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잠깐 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거기에서 단지 20분 거리였으니까요. 두 시간 수업이 끝나고 숙고를 거듭한 뒤 줄리 선생님에게 제가 누군지 말씀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번호를 교환하고 나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벌어진 지 28년 만에 마크 얀치 씨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위로받은 시간

 

다음과 같은 일들 모두 저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저는 지역사회 정의구현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화해 조정 훈련을 받았고, 형사재판에서 피해자-가해자 화해 프로그램에 따라 주 정부 검찰관과 변호사,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조언하는 자원봉사를 250시간 넘게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여가시간이 허락하는 한 다른 화해 조정 사건에 참여했고, 회복적 정의의 철학을 확산하기 위해 제가 자원봉사하는 기관과 그곳의 많은 프로그램을 홍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들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제 이야기를 모두와 함께 나누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이 편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저는 제가 벌였던 일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대단히 자랑스러워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수 있고 또 그런 일이 아주 많은 이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저를 여전히 놀랍게 합니다.

 

끝으로, 저는 화해 프로그램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개선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교사, 판사, 그리고 사법 시스템 종사자 분들을 포함합니다. 또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화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많은 피해자와 가해자 분들도 포함됩니다. 화해 프로그램은 갈등 해결로 가기 위한 좋은 방법입니다!

 

덧붙여, 제가 신청했던 사면 요청은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 캐나다 정부로부터 받아들여졌습니다. 확실히 범죄경력 조회의 허가에서 자원봉사의 허가로 바뀐 것입니다. 일들이 어떻게 풀려 가는지를 보면 정말 재밌지 않나요?

 

이것이 저의 이야기이고, 제 인생입니다!

 

http://restorativejustice.org/10fulltext/kell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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