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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교사 신뢰서클 10월 모임 이야기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교사 신뢰서클 10월 모임 이야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8. 11. 00:24

교사 신뢰서클 10월 모임 이야기

 

김훈태(슈타이너사상연구소)

 

 

1027일 월요일, 내가 생명의 숲 센터에 도착한 것은 두시 반이었다. 멀리 논산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터라 기차 시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일찍 오는 편이다. 그런데 이 날은 모임 내용을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좀더 일찍 왔다. 기합이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센터 앞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숨을 고른 뒤 주변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그간 신뢰서클 모임을 하며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지 돌이켜보았다. 아주 천천히 걸으며,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걸 확인하며.

 

신뢰서클은 내게 무척 낯익은 모임이다. 12년 전 병역거부를 결심하면서 만난 병역거부자들의 월례모임 장소가 서울 퀘이커예배당이었다. 퀘이커예배에 관심이 생긴 나는 대전 퀘이커모임에 종종 나갔고, 그곳에서 맛본 고요함이 감옥살이를 견뎌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지금도 이따금 대전모임에 나가고 있다. 내면의 빛에 의지하여 영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작업은 불교도인 나에게도 편안한 방식이다. 신뢰서클을 처음 제안한 파커 파머가 유명한 퀘이커교도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교사들, 특히 대안초등학교 현장에서 일하는 교사들을 위한 모임이라는 게 좋았다. 개인적으로 올해 2, 다니던 발도르프학교를 그만 둔 내가 과연 자격이 되는지 마음에 걸릴 때도 있었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반가웠다. 발도르프교육에 관한 강연을 하는 일 외에는 사람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는 것도 이 모임이 반가운 이유이긴 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마음 깊이 묻어둔 삶의 문제들을 솔직히 털어놓고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330, 모임은 침묵의 종과 함께 시작한다. 은은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종이 우리를 침묵으로 이끄는 동시에 신뢰서클이 시작됨을 알린다. 센터피스, 그러니까 둥글게 앉은 우리의 한가운데에는 꽃과 색보자기로 꾸며진 아름다운 탁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상징인양 촛불이 타고 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진행자가 낭송한 여는 시는 도종환의 다시 가을이다.

 

다시 가을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은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그렇다. 어느덧 10월 하순이고, 상강도 지나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은 분들이 많다. 구름은 지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덜 관심을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하루 하루 벌어지는 대형 사건사고에 충격을 받는 와중이다. 진행자는 이러한 시절에 우리가 가을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지 나눠주길 부탁했다. 몇몇 선생님이 모임에 대한 그리움과 갑갑했던 속내 등을 풀어주신다. 누구는 몹시 바빴고 누구는 아팠으며 누구는 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격의 없는 이야기들 속에서 서클이 점점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 이어서 신뢰서클의 주춧돌을 돌아가며 읽는다.

 

안전한 공간을 형성하는

신뢰서클의 주춧돌

 

언제 어떻게 참여할지 스스로 선택하기

항상 초대하고 침해가 되지 않도록 한다. 항상 기회를 제공하고 요구가 되지 않도록 한다.

 

존재에 참여하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마음을 내고, 이를 유지한다.

 

차이를 받아들이기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진실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한다.

 

자신을 위하여 말하기(Speak for yourself)

나 말하기(I statement) 방식으로 자신의 진심을 말한다.

 

침묵의 공간 마련하기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침묵을 자주 가지면서 내면의 교사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치거나 충고하지 않기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의 해결책을 찾아주려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으며, 깊은 경청과 정직하고 열린 질문으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바가 명료해지도록 나눈다.

 

대화의 흐름이 거칠어질 때, 새로운 시각으로 전환하기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배우려는 마음을 내며, 감정적 반응과 판단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경이로움과 따뜻함으로 묻고 배운다.

 

개인의 사적 공간을 지켜주기

안전함이 지켜지도록 서로 나눈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기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경청함으로 생기는 우리의 통찰을 표현하되 그들의 사적인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다.

 

 

주춧돌 읽기는 자발적인 읽기이다.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도 그렇지만 주춧돌 읽기는 모두에게 초대된다. 한 사람이 다 읽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면서 읽는 것도 아닌, 원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한 구절씩 읽는 방식이 처음에는 낯설 수도 있다. 한 구절이 끝난 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같은 구절을 읽기 시작해 어색해지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자발적인 읽기 방식은 스스로의 질서를 찾아간다. 내적으로 정말 원하는 사람이 읽기 때문에 진지하고 자연스레 경청하게 된다. 무엇보다 침묵이 감싸는 기분이 들어서 편안하게 내용에 접근할 수 있다. 다 읽은 뒤에는 자신에게 특히 와닿았던 구절을 나누는데, 매번 와닿는 구절이 달라짐을 느낀다. 삶의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런 이야기도 함께 나눈다.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마음가짐이 충분히 갖춰졌다. 이번 달의 주제는 나는 동료교사로부터 배운다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의아했지만 프로그램이 중반쯤 되자,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홀로비추기를 한 뒤 함께 나누기를 하며 다른 분들의 이야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첫 번째 소주제는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였다. 먼저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 나는 OOO가 된 기분이다OOO를 채워야 했다.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이 가장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나서 위의 빈 칸을 채워 본다. 재빨리 떠오르는 것을 직관적으로 쓴다. 떠오르는 메타포를 가지고 저널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좀더 탐구해 본다. 메타포에서 가르침과 자신에 대해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진행자는 꼭 가르칠 때가 아니라 자기가 지금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떠올려도 괜찮다고 부드럽게 덧붙여 주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과 함께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미지보다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 나는 가슴이 뜨겁고 벅찬 느낌이 든다. 마치 다같이 음악 연주에 심취한 것처럼. 그래서 처음에는 음악가라고 쓰려 했다. 그러나 이어 든 생각은 음악가보다 음악 그 자체가 더 분명한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 음악이 되어 흐르고 쏟아지고 퍼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주위로 밝고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가는 듯한 그림을 색연필로 그렸다. 그리고 저널로 다음과 같이 썼다.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 나는 음악이 된 기분이다. 듣는 이들과 하나가 된 듯 경계가 사라지고 심장이 뛰고 하늘을 날 듯 기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또렷해지며 춤을 추는 듯한 몸짓을 한다. 신명이 난다고 해야 할까. 내 가르침이 듣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 때 더욱 기쁘다. 눈빛이 반짝이고 몰입하는 게 보이니까. 그때 참 자유롭다. 그러나 이제 그런 순간일수록 절제해야 함을 안다. 자아의 확장은 어느 순간 자아의 본질과 연결이 희미해질 수 있으니까. 단지 카니발적인 기쁨으로 변질된다면 그건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듣는 이들 역시 자아의 본질에서 벗어나 열광으로 끝난다면 공허해질 테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 나는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파도를 유려하게 탈 때 그게 지나쳐 파도 속으로 형편없이 내동댕이쳐지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배우는 거니까. 나는 음악가이자 악기이며 음악 그 자체가 되는 일을 사랑한다.”

 

홀로비추기 20분 동안 그림과 저널을 작은 도화지에 한 장씩 작업했다. ‘음악이라는 메타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렸을 적 몹시 가난했던 나는 음악을 거의 접하지 못하고 자랐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했지만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일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교육대학교에 다니면서도 음악은 동경과 함께 공포의 대상이었다. 발도르프학교에 근무하며 날마다 아이들과 노래하고 리코더를 불면서 비로소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제는 서툴게나마 동요를 만들어 아기에게 들려주기도 하니까. 못해도 즐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셋 나누기를 하면서 생각이 좀더 분명해졌다. 다른 두 분 선생님들께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본래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안 맞았음을 떠올렸다. 초등학교에서 가르칠 때도, 사춘기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꼬맹이들과 생활할 때도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적응했고 자신감도 생겼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다고 해야겠지. 어쩌면 이번 생은 잘하는 일을 더 잘하기보다 잘 못하는 걸 배우려고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만일 적성에 맞는 일만 했다면 나는 이렇게나마 성장할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동료들과 일을 하면서 나는 더 넓어지고 깊어진 것 같다. 가르치는 일도, 음악도 나에겐 한번도 안 써본 근육을 쓰는 것과 같았다.

 

두 선생님은 각각 바람과 촛불을 떠올리셨다고 했다. 바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연못에 파문을 일으키고 나뭇잎을 흔들리게 하는 바람. 문득 발레리의 시가 떠올랐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싯귀를 좋아한다. 그렇게 바람은 자유롭게 불어와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생명, 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프뉴마도 본래 바람, 숨이라는 말이었다고 하지 않나. 교사가 바람과 같은 존재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촛불을 떠올리신 선생님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밝고 따스한 촛불처럼 다가서는 교사의 모습, 상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천상 선생님 같은 분이었다. 동료교사로부터 배운다는 주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커뮤니티 속에서 배우기

 

다시 침묵의 종이 울리고 공간에 새로운 기운이 흘러들었다. 진행자는 지난 주말 마음비추기 피정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정 장소 근처의 카페에 갔을 때 보았던 가족들의 모습이다. 어느 가족이나 하나 같이 부모는 스마트폰에 빠져 있고 아이들은 멍한 얼굴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 우리 주변의 친숙한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말 홀로 있기 어려운 세상에 산다. 동시에, 함께 있어도 각자 다른 세상에 산다. 진행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좀더 빨리 스마트폰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SNS에 중독된 채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파커 파머가 쓴 가르칠 수 있는 용기’ 6장의 내용 중 일부를 프린트한 종이를 나눠받고 다시금 자발적인 읽기를 했다. 내용을 간추려 보자면, 파커 파머는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 자신이 양치기 개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 양치기 개의 이미지로부터 교사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온전성을 탐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치기 개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그는 교실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해결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파머의 이야기 중 정체성에 대한 언급이 와닿았다.

 

우리는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내가 누구인지찾아가도록 돕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이덴티티를 찾지 못한 사람의 내면은 끝내 붕괴하거나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에 자신을 의탁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 교사들도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해 오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살아왔고 아이들을 가르쳐왔다.

 

두 번째 소주제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랐다.

 

* 이 메타포(이미지)가 들려주는 교사로서 나의 정체성과 성실성(온전성)에 대한 단서는 무엇입니까?

* 이 메타포가 내게 말을 거는 장점과 그것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무엇인가요?

* 교실에서 난국을 만났을 때, 이 메타포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헤쳐갈까요? (문제 해결이나 기술 차원이 아니라 그 메타포 속에서 탐구해 봅니다.)

* 이 메타포에 머물면서 살펴볼 때 어떤 정신적 힘이 나타나는지요? 또한 나를 도와주는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요?

 

나는 다른 질문보다 그림자에 대한 것이 신선했다. 장점만 생각했지, 그것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파커 파머는 양치기 개의 그림자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양떼라는 말을 나쁜 의미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너무 유순하거나 바보 같거나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 만약 내가 이런 그림자를 나와 학생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나는 잘 가르치지 못할 것이다. 양치기 개의 메타포가 나의 그림자를 의식하게 만드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나와 학생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떠올린 음악이라는 메타포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계속되는 음악으로 인해 침묵이 사라지는 것이 그 그림자 아닐까, 했지만 좀더 생각해 보니 학생들을 청중으로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연주하고 노래하고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존재로 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가르침도 아니고, 배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악기인 것처럼 학생들도 제각기 다른 악기이므로 내가 음악을 시작하면 모두 어우러져 음악이 되는 그림을 떠올리니 다시 가슴이 벅찼다. 거기에는 침묵도 있을 것이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침묵이, 그리고 침묵과 침묵 사이에 소리가 존재한다. 불협화음과 거친 음정이 생긴다면 기다릴 것이다. 마음을 열고 기다린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조율될 것이고 새로운 악상이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수업은 하나의 연주회와 같다. 나에게는 그것이 살아 있음이고 자유로움이다.

 

다른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점들을 엿볼 수 있었다. 창공, 울타리, 기구, 빨래줄, 숲길... 우리의 정체성은 저마다 다르고 독특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그림자 역시 다른 것이지만 놀랍게도 다른 분들의 성찰에 깊은 공감이 갔다. 나에게도 분명 그런 면모들이 조금씩이나마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이 찾고 그 그림자를 포용하려 애쓴다는 것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은 언제나 놀랍다. 이러한 노력들이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도 스며들 것이다. 정체성을 찾고 온전성으로 나아가는 교사를 보며 아이들 역시 그 길을 따를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거기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 시는 데니스 레버토프의 선물이었다. 좋은 시였지만 번역의 장벽이 느껴졌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조금 고쳐보았다. 돌아보니 신뢰서클은 올해 나에게 주어진 커다란 선물 같았다. 그래서일까. 고마움이라는 감정이 올해만큼 내 안에 자주 생겨난 적도 없다. 신뢰서클 모임을 준비하고 이끌어주신 분들, 참여해주신 분들, 나를 초대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이 시로써 전하고 싶다.

 

선물

 

당신 자신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하찮고 케케묵은 질문들처럼 여겨지는 순간,

당신에게는 질문들이 주어진 것이다,

다른 이들이 품고 있는 질문들이

당신의 비어 있는 두 손 안에 주어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따뜻하게 품어준다면

노래하는 새의 알들은 아직 부화할 수 있다,

나비들은 당신이 자기들의 반짝이는 솜털과

가루를 다치지 않게 할 것을 믿으며

당신의 움푹한 손바닥 안에서

자기 자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한다.

당신에게는 다른 이들의 질문들이 주어진 것이다,

마치 그들이 당신의 모든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처럼, 그래, 아마도

이 선물은 당신의 대답일 것이다.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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