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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깔린 패배주의 - 황현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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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깔린 패배주의 - 황현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5. 27. 04:53

번역에 깔린 패배주의

새로운 텍스트와의 대결의식 가져야

 

황현산(고려대 교수·불문학)

 

 

개항 이후 우리의 번역사는 그 시작부터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국권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서양의 문물과 대면했고, 이어서 식민지 시대가 있었다. 밖에서부터 들어온 것은 많은 경우 우리의 것과 '다른 것'에 그치지 않고 '절대적인 것'의 형식을 띠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우리 글로 학문을 했던 경험이 많지 않았고, 국문학 전통은 일천한 것이 아니었지만 우리 글로 쓴 문학 작품이 국경을 넘어간 적은 거의 없었다.

 

같은 어족을 가진 언어와 교류할 기회는 매우 적었으며, 국경 안에서도 학문의 억압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공식어의 위치를 빼앗기기까지 했으니, 한국어는 지역적으로 특수한 언어, 정서적으로 폐쇄된 언어의 처지를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외국의 글을 우리 글로 번역하려 들 때, 그것은 특수성으로 보편성을 가늠하려는 일이나 같았다. 그 보편성이 의심스러운 것임이 끝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헤아릴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없었다. 사태가 그러하니, 적어도 이 일에서는 선진국이었던 일본의 번역을 흉내낸다고 해서 그것을 나무라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그 여파이며, 그것이 우리 번역자들의 태도를 결정짓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본어 중역의 폐해

 

문학에만 국한하여 말한다면, 구미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또는 대량으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50년대말부터 여러 질의 '세계 문학전집'이 출간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일본어를 사이에 둔 중역이었으며, 이른바 원서의 이용도는 참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이야 말하기조차 새삼스러운 비밀이다. 또한 중역의 폐해를 말하기도 새삼스럽다.

 

그것은 두 언어를 거치는 동안에 일어나게 되는 원문에 대한 오해나 인접 언어의 영향력에서 오는 모국어의 왜곡 같은,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을 번역하게 되면 그에 따라서, 대상 외국어와 그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그와 연관된 다른 사항들에 대한 지식의 습관, 우리말에 대한 성찰, 번역 기술의 발전 등을 동시에 꾀할 수 있지만 중역의 경우는 그 기회가 처음부터 봉쇄된다는 점도 그 폐해 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역을 하고 있는 번역자의 자의식이다. 애초부터 뒤따라가는 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는 대상 텍스트와의 대결의식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으니 자신의 작업에 성실할 수 없다.

 

텍스트에 나타나는 단어 하나하나의 어의를 따진다거나, 일상어와 문학어 사이의 미묘한 변조를 파악하는 일 따위는 중역의 성격상 우스꽝스런 노력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으며, 언어적 상상력과 역사적 · 문화적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이해의 부족을 메꾸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주석 붙이기 등은 귀찮고 따분한 노역으로만 여겨진다. 번역자는 자신이 임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버릴 수 없으며, 그 결과도 미봉책의 텍스트에 머물고 만다. 번역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 앞에 처음부터 패배하고 있었다.

 

50년대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번역은 일본어를 사이에 둔 중역이 대부분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역을 하고 있는 번역자의 자의식에 패배주의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번역의 뒷세대에 대물림되면서 자신의 상상력과 모국어의 감각을 과도하게 믿는 '건방진 번역'의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건방진 번역'의 시대

 

일본어에 크게 의지하였던 이 일세대 번역자들은 이제 번역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그들의 '일본어 실력'은 전수되지 않았다. 자신의 번역과정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는 처지에 있었으니, 그 '노하우'를 전수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패배주의만은 그대로 대물림되었으며, 그것은 뒷세대들에게 이상한 허영심으로 나타났다.

 

번역 작품은 그득하나 번역은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들은 번역된 글을 읽으며,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왜 그렇게 번역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상상력과 직관과 모국어감각을 과도하게 믿게 되고, 오직 거기에 의지해 새로운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급기야 '건방진 번역'의 시대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번역해야 할 가치가 있는 치밀한 글들은 낱말 하나만 잘못 파악해도 전후 문맥이 연결되지 않는데, 이 천재 번역가들의 상상 속에서는 그 오해된 문맥이 벌써 합리화되어 있다. 원문을 정확히 이해했다 싶은 곳이나 우리말 표현이 난삽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는 자기류의 과도한 해석을 끼워 넣어 '의역'을 뽐낸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말에 대한 상투적 습관을 모국어에 대한 직관으로 잘못 인식한 나머지 번역 대상 텍스트를 상투적으로 읽어 상투적으로 옮겨 놓는다. 번역은 그 형식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옮기는 것이라는 식의 번역론에 대한 섣부른 이해가 또한 대상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자세를 면제해 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에 출판사의 상업주의와 독자들의 게으름이 한몫을 한다. 출판사는 성실한 번역보다 잘 읽힐 수 있는 번역을 선호하고, 잘 읽히기 위해서는 독자를 성가시게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한때 자주 나타났던 건너뛰기 번역 대신에, 원문이야 어찌되었든 '유려한 우리말'로 얼버무린 번역이 판을 친다. 독자는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작가나 석학들이 자기와 똑같은 어조로 그저 그런 소리를 했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성실한 번역에 세밀한 역주가 있고 개정 · 보완이 뒤따르는 섬세한 배려가 오히려 역자의 잘난 체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영합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패배주의가 있고, 독자도 내심으로는 그 점을 모르지 않는다. 패배주의는 게으름을 낳고 게으름은 다시 패배주의와 만난다.

 

방편적 텍스트에서 새로운 사고로

 

번역은 학습의 편의와 정보전달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하나의 사고는 그 언어체계 속에서 얻어져 그 언어로 표현된다. 그 사고가 다른 언어 속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존립하고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를 염려하는 일은 모든 사고의 근본 문제이다. 모든 언어는 결국 한 지역과 한 시대의 방언이기 때문이며, 그 방언 속에서만 유효한 사고는 지역적 · 시대적으로 특수한 사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언어에서 가능했던 사고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인 번역은 그 사고의 가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 되며, 그것을 옮겨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모국어가 지닌 사고의 폭과 그 표현의 보편성을 시험 · 확장하는 일이 된다. 이 점에서 번역된 글은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부족한 텍스트, 방편적 텍스트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가 다른 언어의 시험을 거쳐 나타난 새로운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번역가의 임무가 또한 거기에 있다. 우리의 번역이 패배주의에서 벗어나는 길도 이 임무를 자각하는 데서부터 비롯할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출처 : 출판저널 (대한출판문화협회)  193권,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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