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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서부지법 폭동과 법치주의의 위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5. 3. 9. 22:17

서부지법 폭동과 법치주의의 위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회복적 정의를 공부하면서 법은 우리 삶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이 명확해졌다. 삶에서 문제 상황이 벌어진다면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대화와 합의를 통한 해결방식을 추구해야 하겠지만, 만약 그러한 접근이 좌절된다면 우리는 결국 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응보적 정의라 해도 사적 폭력을 행사할 것이 아닌 이상 기댈 언덕은 사법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공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법조차 소용없는 세상이 된다면 어떠할까? 그야말로 홉스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될 것이다. 그래도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발전한 합리적인 법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그런데 그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2024123일 밤, 대통령은 법과 절차를 무시한 채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회에 무장한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리고 2025119일 새벽, 내란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지지자들은 서울 서부지법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켰다. 살면서 법원이 침탈당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 법원의 유리문을 깨고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불을 지르려는 사람들, 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린치하기 위해 흉기를 들고 판사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뉴스로 보면서 대통령의 계엄 선포 때처럼 현실감을 잃었다. 이것은 법치주의 자체를 흔드는 매우 중대한 범죄이고,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폭력이다. 이 혼란을 우리는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

 

근대사회는 왕의 지배(인치)를 벗어나 법의 지배(법치)로 나아갔다. 법치는 세계를 평정한 거의 유일한 정치이념으로까지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법치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독재자들도 법치주의와 준법정신을 부르짖는다. 물론 그들의 법은 차별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법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시대에 우리는 최소한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고 믿었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되었고 이제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2.3 계엄 이후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너무나 허약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독재를 청산했다고 평가됐던 87년 체제가 외적 파시즘은 제거했을지언정 내적 파시즘, 즉 우리 안의 파시즘은 손도 못 댄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지지자들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수사권도 없으면서 대통령을 불법체포하고 구속 수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을 짚어보자면 공수처는 공수처법 24호에 따라 고위공직자의 범죄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직접적인 관련자로 대통령을 수사할 수 있다. 그 적법성 여부의 판단은 영장판사에게 달려 있고, 법원의 영장발부는 공수처의 수사가 적법하다는 걸 입증한다. 또한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은 형사 면책 특권이 아니다.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을 규정한 헌법 84조에 대한 헌법 주석서 III(법제처, 2010)의 해석을 보면 재임 기간 중이라도 임의수사와 수사의 개시는 가능하다.

 

체포영장을 발부한 서부지법이 관할법원이 아니라는 주장 역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공수처법 제31조를 보면 수사처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는 고위공직자범죄등 사건의 제1심 재판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관할로 한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어서 다만, 범죄지, 증거의 소재지, 피고인의 특별한 사정 등을 고려하여 수사처검사는 형사소송법에 따른 관할법원에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공수처가 대통령실과 대통령 관저를 관할하는 서부지법을 관할법원으로 해 영장을 청구한 것은 아무런 하자가 없다.

 

서부지법 폭동 사건은 한편 법치주의의 위기지만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로 보아야 한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말한다. 헌법 제1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 선거를 통해 국민이 주권을 위임한 국회의원들을 척결 대상으로 명명하고, 입법 심의와 합의 과정, 결의를 북한 공산 세력이 야당에 침투해 나라를 전복하려 한 행위라고 주장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대통령의 지지자들 역시 똑같은 이유로 야당과 법원, 그리고 헌법재판소까지 공격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역사상 이러한 시도는 독재화를 향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작금의 상황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않으려는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고 홍세화 선생은 똘레랑스를 설파했으나 앵똘레랑스(intolerance) 세력에 대해서는 앵똘레랑스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똘레랑스는 역사적으로 앵똘레랑스에 단호히 반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마치 똘레랑스를 나와 다른 남을 용인하는, 그래서 무엇이든지 모두 다 용납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똘레랑스는 이에요. 단호함입니다. 즉 앵똘레랑스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입니다.”(2004.05.12. 오마이뉴스 인터뷰) 그렇다면 앵똘레랑스 세력을 단호하게 반대하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얼 해야 할까? 법치주의를 파괴한 이들을 법에 따라 엄하게 책임을 묻는 것이 첫 걸음일 것이다. 최후의 보루인 법이 무너졌으니 법의 위엄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행위를 벌하는 것이다. 그들을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그들과 같아지는 길이다.

 

다음으로 할 일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동체 안에서 민주적 절차를 고수하고, 합의에 이르려는 존중의 자세를 통해서 확립될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한 개인의 감정과 고통에 공감하며, 올바른 규범을 합의하고자 하는 회복적 정의의 접근법은 민주적 관계 형성의 길을 제시한다. 현재 우리는 헌법재판소와 형사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계엄으로 인한 한국 사회의 경제적 손실과 국민의 정신적 피해 등이 그 판결만으로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문화가 두텁게 쌓여야만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난 뒤에, 건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상상하고, 실천해 갈 다음 행보에 대해 다같이 고민해야 한다. 그 길에서 회복적 정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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