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서부지법 폭동과 법치주의의 위기 본문
서부지법 폭동과 법치주의의 위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회복적 정의를 공부하면서 법이라는 게 우리 삶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삶에서 문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인간적인 방법을 모조리 써 봐도 소용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회복적 정의의 방식으로 해결이 되면 좋겠지만 그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응보적 정의라고 해도, 사적 폭력을 행사할 것이 아닌 이상 기댈 언덕은 당장 사법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공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법조차 소용없는 세상이 된다면 어떠할까?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전쟁터일 것이다. 일부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인류의 역사만큼 발전한 합리적인 법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법은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후의 보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무너졌다. 1월 19일 새벽, 내란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지지자들은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켰다. 살면서 법원이 폭도로 인해 침탈당한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말도 안 되는 판결이야 얼마든지 있어왔지만 그렇다고 법원의 유리문을 깨고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불을 지르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아가 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린치하기 위해 흉기를 들고 판사실을 찾아다닌다? 불법계엄도 충격이었지만 서부지법 폭동은 상상을 넘어서는 충격이었다. 선을 넘는 게 아니라 선 자체를 지워버린 듯한 사건이었다. 이 혼란을 우리는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
근대사회는 왕의 지배를 벗어나 법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오늘날 법의 지배는 세계를 평정한 거의 유일한 정치이념으로까지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법치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도 법치주의와 준법정신을 부르짖었다. 물론 그들의 법은 차별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법이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에 우리는 최소한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믿었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되었고 이제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합의된 정신이었다. 그러나 12.3 계엄 이후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너무나 허약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보편적 인권을 갖고 있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왕과 같은 특수계급은 인정될 수 없다. 누구나 똑같이 법질서를 따라야 하고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믿음이 법치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이상이고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한국 최고의 재벌은 아무리 프로포폴을 상시 투약해도 구속되지 않는다. 7천만 원의 벌금을 내고 끝날 뿐이다.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부당합병과 회계부정 혐의가 뚜렷함에도 그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는다. 검사나 판사 같은 법조인들은 피의자로 입건되더라도 정식재판에 회부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아이러니하게도 불법계엄을 저지른 대통령부터 ‘기득권 카르텔을 혁파하고 공정한 법치주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주장해서 인기를 끌었던 검사였다.
법원이 습격당한 것은 헌정 질서가 파괴되는 일이었다. 폭도들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수사권도 없으면서 대통령을 불법체포하고 구속 수사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통령은 법원이 적법하게 발부한 영장을 경호처를 앞세워 여러 차례 거부했고, 내란세력은 법원과 공수처를 비난했다. 그러나 공수처는 대통령의 직권남용 범죄에 대해 임의 수사가 가능하며, 관련 범죄로 내란죄 수사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은 바로 이 입장을 추인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은 ‘형사 면책 특권’이 아니다. 재임 기간 중이라도 범죄를 저질렀다면 직무수행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수사가 가능하다.
그리고 폭도들은 체포영장을 발부한 서부지법이 관할법원이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공수처법 제31조를 보면 “수사처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는 고위공직자범죄등 사건의 제1심 재판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관할로 한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어서 “다만, 범죄지, 증거의 소재지, 피고인의 특별한 사정 등을 고려하여 수사처검사는 「형사소송법」에 따른 관할법원에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공수처가 대통령실과 대통령 관저를 관할하는 서부지법을 관할법원으로 해 영장을 청구한 것은 아무런 하자가 없다.
불법계엄과 서부지법 폭동 사건은 한편 법치주의의 위기지만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로 보아야 한다. 온갖 법기술을 부리며 재판을 지연하고 절차상 하자를 주장하는 대통령 측과 폭력적인 난동을 부리는 그 지지자들은 법의 지배보다 왕(독재자)의 지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계엄 이후 독재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계획들이 상세히 밝혀진 바 있다. 어쩌면 이들은 애초에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기득권으로서 기존의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든 법치주의든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독재국가가 이들에게는 나을 수 있다.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있고 처벌과 책임의 위험이 상존하는 민주주의 체제보다,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적극적으로 이권을 챙기며 억압을 행사하는 것이 편안한 것이다.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않으려는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고 홍세화 선생은 똘레랑스를 설파했으나 앵똘레랑스(intolerance) 세력에 대해서는 앵똘레랑스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똘레랑스는 역사적으로 앵똘레랑스에 단호히 반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마치 똘레랑스를 나와 다른 남을 용인하는, 그래서 무엇이든지 모두 다 용납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똘레랑스는 ‘칼’이에요. 단호함입니다. 즉 앵똘레랑스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입니다.”(2004.05.12. 오마이뉴스 인터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반민주주의 세력, 반법치주의 세력이 주류인 사회를 용납해왔다. 지금 그들과의 화해와 화합을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 역시 동일 세력의 일원일 것이다.
회복적 정의가 추구하는 정의는 유약한 정의가 아니다. 응보적 정의가 소극적 정의로서 형식적 민주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면, 회복적 정의는 적극적 정의로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지,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극우세력을 용인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적 대전환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법이고 민주주의고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 권력자들의 반지성적 논리를 무너뜨리고, 개개인이 모두 존엄하게 대우받는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의 입구 말이다. 새로운 사회는 탐욕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 연대의 경제, 특수계급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득권 카르텔이 해체된 해방의 정치가 꽃피는 사회일 것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 회복적 정의 운동이 지향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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