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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회복적 사고, 혼란의 시대에 올바르게 사고하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5. 3. 4. 13:03

회복적 사고, 혼란의 시대에 올바르게 사고하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영국에는 ‘회복적 사고(Restorative Thinking)’라는 회복적 정의 실천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회복적 실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복적 실천은 하나의 철학이다. 우리의 사고, 말, 행동을 인도하고, 우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철학이다. 어떻게 긍정적인 관계를 세우고 유지할지, 어떻게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책임을 물을지, 그리고 어떻게 대립과 갈등을 해결할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회복적 정의의 철학에 따라 올바르게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간을 해방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인간을 억압하기도 한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우리의 이성에는 도구적 이성과 의사소통적 이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도구적 이성이 주체와 객체(대상)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의사소통적 이성은 주체와 주체의 관계에 주목한다. 도구적 이성은 체계의 목적성과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행정 체계와 경제 체계 같은 거대 체계가 목적합리성에 맞게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까지 침투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구체적인 개인보다 체계의 규칙에 얽매일 것이고,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보다 이미 벌어진 일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누군가 규칙을 어겼다면 그에 걸맞는 벌칙이 부과될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 앞의 누군가를 하나의 주체로 여기기보다 체계의 목적을 위한 대상 또는 수단으로 인식하게 한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경쟁주의와 능력주의는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이에 비해 의사소통적 이성은 타인을 나와 똑같은 주체로 여기고, 대화를 통해 합리적 해결책을 찾도록 이끈다. ‘도구적 이성은 나쁘고 의사소통적 이성만이 옳다’는 얘기가 아니다. 도구적 이성의 부작용을 해결하고 보완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적 이성을 좀 더 계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의 생활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저마다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므로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의 말을 들어보아야 한다.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중심으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상식적 사고는 의사소통적 이성의 패러다임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
 
도구적 이성의 과도한 추구로 인해 산업사회 이후 인류는 전에 없던 위기에 봉착했다. 환경파괴는 이제 기후위기를 넘어 인류멸종의 위기를 초래했고, 자본주의는 막장에 이르러 ‘대안은 없다’고 자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 산업 자본주의에 이어 도달한 (생산 없는) 금융 자본주의는 이제 자멸의 길에 접어들었다. 성장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스스로 붕괴하며 신뢰 자본을 파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경제 성장에 의존해 유지되던 민주주의 정치 체계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내몰렸다.
 
전 세계가 극우화의 파고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는 더욱 심각하다.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했다. 모든 것이 불법이었지만 성공했다면 독재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친위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은 탄핵될 것이며, 조기 대선이 이어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시민과 야당 정치인들의 신속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 덕분에 세계로부터 재주목받았다. 동시에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일부 기독교인들, 극우 세력이 보여준 폭력으로 인해 다시금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지 드러났다.
 
계엄 이후 야당 유력 정치인과 반정부 인사들을 잔인하게 살해할 계획이 있었다는 것도 끔찍하지만, 그러한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이들의 집회에서 혐오와 증오의 언어가 넘쳐나는 것도 끔찍하다. 심지어 대형 집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목사들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내가 아는 예수와 저들이 섬기는 예수는 다른 존재일까? 아니면, 저들은 단순히 이단 사이비인 것일까? 비록 일부지만 저들의 언어를 듣고 있으면 이성이 마비된 반지성주의자들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야당 대표를 죽이고 헌법재판소를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위 ‘목사’들과 그 지지자들의 사고방식은 파괴적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이 실재하는 것처럼 사탄 역시 실재하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는 사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은 악이고, 북한과 화해하고자 하는 야당 또한 악이며, 성경에서 금하는 동성애에 대해 인정하는 차별금지법을 추진하는 야당은 사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반공과 반동성애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맹목적 신념이 저들의 합리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나는 악의 반대가 선이 아니라 또 다른 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악은 극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고리대금업자인 스크루지는 악에 가까울 정도로 인색하다. 구두쇠 스크루지의 대척점에 선 인물은 누구일까? 나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떠올린다. 딸들을 위해 돈을 흥청망청 낭비한 고리오 영감은 디킨스의 스크루지 영감에 대적할 상대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격이지만 동시에 공통점을 갖는다. 바로 경직성과 고착성이다. 스크루지는 언제나 지갑을 닫고, 고리오는 늘 지갑을 연다. 병적인 양극단의 상태에서 벗어나, 쓸 때는 여유 있게 쓰고 평소에는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 즉 선한 사람일 것이다. 따라서 선한 자는 극단에 사로잡히지 않고 유연하며 균형점을 찾기 위해 흔들리기도 한다.
 
특정 종교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고려 말기에는 불교가 만악의 근원처럼 여겨졌고, 조선 말기에는 유교가 그랬다. 문제는 종교의 맹신성이다. 덮어놓고 우리 편은 선이고 상대편은 악이라고 믿는 일은 단순해서 쉽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우리에게는 이성이라는 신의 선물이 있다. 칸트에게 계몽은 타인에 의존하는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용기 있게 알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나는 계몽되었다”), 우리들 저마다가 주체임을 깨닫는 적극적 의지 행위이다. 우리는 자율적 주체로서 특정 사안에 대해 사실 관계와 진정성, 사회적 규범 등에 대해 그 타당성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모든 사안은 무언가 벌어진 일을 토대로 한다. 그것은 실재한다. 다만 다르게 경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은 한편으로는 상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주의로 빠져드는 것은 사실 관계를 무시하고 대안적 진실을 맹신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사고는 자칫 ‘얘도 잘못했고 쟤도 잘못했다’는 식의 양비론("거대 양당이 문제이고 정치인들은 다 똑같다")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낫게 판단할 수 있다. 천동설보다는 지동설이, 뉴턴의 역학보다 아인슈타인의 역학이, 응보적 정의보다 회복적 정의가 더 합리적이라는 판단적 합리성을 우리는 갖고 있다. 물론 이는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할 문제이다. 어떤 극단에 빠지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무엇인지 우리는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 영국의 ‘회복적 사고’ 단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활용해보라고 조언한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그 동안 어떤 생각을 했나요? 그때 어떤 감정이 들었나요? 그 일에 대해 지금 어떤 기분인가요? 그 일로 인해 누가 영향을 받았을까요?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을까요? 피해를 바로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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