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내란세력의 탄핵을 넘어 진정한 회복적 사회로의 이행을 바란다 본문
내란세력의 탄핵을 넘어 진정한 회복적 사회로의 이행을 바란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연설에 담긴 저 말을 우리는 4.3 제주와 5.18 광주에 이어 12.3 서울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무장한 계엄군은 국회부터 무력화하려 했다. 헬기가 날아왔고 장갑차가 출동했다. 계엄군은 창문을 깨고 총을 든 채 국회 경내에 난입했다. 경찰들은 오히려 국회의원과 시민들을 막았다. 윤석열의 무능 덕분인지, 야당과 시민들의 유능 덕분인지 국회는 계엄을 무력화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중요한 건 과거가 오늘을 살렸다는 점이다. 과거의 국가폭력을 되살리지 않기 위해 시민들이 모였고, 우리는 마침내 군인들을 물리쳤다.
만약 12.3 내란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수많은 사람이 납치 및 고문을 당하고 살해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공기처럼 누렸던 자유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거짓과 폭력이 세상을 뒤덮었을 것이다. 회복적 정의는 이러한 국가폭력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옳을까? 당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가 떠오른다. 나는 남아공의 진화위는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고 본다. 백인들의 기득권이 너무나 강했고, 넬슨 만델라는 그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그 타협적인 방식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파르트헤이트를 불러온 기득권 체계는 변화되지 못했다. 불평등과 인종차별이 해결되지 못한 지금 남아공의 경제와 치안은 참혹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회복적 정의는 국가폭력을 저지른 관료나 군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해주는 방식이라기보다, 피해자들이 자기 고통을 말하고 대중에게 인정을 받은 뒤 피해 회복을 위한 실질적 보상을 받는 방식에 그 본질적 특성이 있다. 물론 가해자들에게도 인권이 있고 명령에 따른 행위이므로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있지만 국가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저지른 폭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경우에는 속죄와 함께 강력한 처벌이 필요 불가결하다. 나는 프랑스가 나치 협력자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독일이 나치 부역자들을 지금도 찾아내 엄벌에 처하는 것이 회복적 정의의 이념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사회가 개인 차원과 구조 차원으로 층화되어 있다는 걸 잊곤 한다. 그래서 사회 구조적인 문제, 예를 들어 빈부격차로 인한 불평등 문제를 개인들의 게으름이나 사치의 문제로 환원시켜 생각한다. 또는 기쁨과 슬픔, 아픔과 두려움의 감정과 인간적 관계, 내적 필요를 가진 개인을 무시하고 구조 차원에서만 제도를 구성하기도 한다. 사법제도가 특히 그러하다. 하워드 제어가 기존의 형사사법을 응보적 사법이라 부르고 비판한 것은 국가가 당사자인 개인들의 상처와 필요를 도외시한 채 처벌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회복적 정의는 응보적 사법의 대응점(反)에 놓여 있다기보다 그것을 포괄하는 변증법적 합(合)에 가깝다. 다시 말해, 회복적 정의는 사법체계라는 구조적 차원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한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더 나은 사법이다.
국가폭력은 국가를 장악한 권력집단이 기존 체계를 부정하는 동시에 개인들에게 폭력을 저지른 범죄 행위이다. 다시 말해, 국가 시스템을 교란하고 생활세계의 개인들에게 해를 끼친 범죄인 것이다. 그렇다면 회복적 정의는 시스템의 차원과 생활세계의 차원을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 개인들이 입은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피해는 대화를 통해 해결해 가는 것이 올바르다. 이번 내란 사태는 온국민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준 사건으로 우리는 서클을 통해 충격과 상처, 불안,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점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시스템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민주공화정 체계에 깊은 상처를 준 내란 세력에게 용서란 무의미하다. 그들은 용서를 배신으로 갚는 집단이다. 기득권 체계가 지금처럼 유지되는 한 그들은 다시금 반민주적 쿠데타를 벌일 것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계엄을 획책했던 자들을 검찰이 무죄 방면해준 결과 지금의 12.3 내란 사태가 벌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개인도 비도덕적 집단에 소속되는 순간 비도덕적 존재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이는 비도덕적 집단을 개인처럼 대할 수 없음을 뜻한다. 구조 차원의 범죄는 법률에 근거해 단호하게 처벌하되 개인 차원의 범죄는 대화를 통해 자발적 책임과 피해 회복을 지향하는 것이 회복적 정의의 이념에 부합한다. 우리 형법 제88조는 내란죄를 “집단범죄의 특질에 비추어 그 관여자를 수괴(首魁), 중요임무 종사자(모의참여·지휘 등), 부화수행자(附和修行者) 및 단순 관여자(單純關與者)로 나누고, 각자의 역할에 따라 형(刑)의 경중(輕重)을 두어 최고 사형에서부터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禁錮)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이렇게 강력한 처벌 규정을 둔 것은 내란죄가,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세계를 붕괴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체계의 관점에서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철처한 수사와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탄핵시위는 촛불시위에서 응원봉 시위로 이행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응원봉을 들고 대중가요를 부르며 우리는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우리의 빛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나침반으로서 회복적 정의의 방향은 분명하다. 더욱 인간적인 삶, 민주주의, 사랑, 진실, 평화 등의 가치이다. 이런 가치가 우리의 생활세계뿐 아니라 시스템까지 변화시키려면 기존의 기득권 체계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 회복적 정의의 인간적 접근이 권력자들의 합리화 수단으로 쓰여서는 결코 안 된다.
성소수자와 장애인, 여성, 이주민 등 차별받던 이들이 지금 광장을 메우고 목소리를 높이며 연대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회복적 정의는 어떤 차별도 불평등도 없는 회복적 사회를 꿈꿔야 한다.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이렇게 말한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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