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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 공격성에 대하여 - 볼프강 쟈스만스하우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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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 공격성에 대하여 - 볼프강 쟈스만스하우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25. 06:36

유아기 공격성에 대하여



2006. 11. 서남발도르프 어린이집의 부모강의

볼프강 쟈스만스하우젠 박사

 


저는 1997년부터 서남발도르프 어린이집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부터 시행된 발도르프 유치원으로의 전환 과정에도 함께 참여했는데 매번 이곳에 올 때마다 집에 오는 느낌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곳에서 일하시는 동료 교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어린이를 키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없었던 행동방식들을 많은 어린이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엄청나게 낙담하고 절망하는 부모나 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많은 나라에서 발견됩니다. 한국이나 독일이라는 특정한 몇몇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 점점 더 많은 어린이 그런 공격성들, 공격적인 행동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아이들 삶의 초반에 말이죠. 한 번의 강연으로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설명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강의에서 시도해 보겠습니다.


어린이들이 보이고 있는 이러한 장애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정상적인) 어린이의 발달 과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체험했던 건데 확실히 드러나는 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독일의 한 휴양지였습니다. 굉장히 쾌활하고 신나는 전통적인 인형극 공연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할머니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악어가 숨어 있다가 나와서 주인공 카스파를 물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백 명의 어린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이 어린이들이 어떻게 할까요? 어린이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카스파 조심해!”라고요. “카스파 뒤를 돌아보란 말이야.” 몇 명 어린이들은 앞으로 뛰어나와 인형이 뒤를 돌아보도록 두드리려고 합니다. 또 어떤 어린이들은 이 주인공을 붙잡죠. 이것이 바로 어린이들의 매우 정상적인 행동방식입니다. 어떤 어린이들도 바로 이 상황에서 뭔가 명상을 하면서 이 상황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은 곧바로 행동하면서 이 과정에 개입하게 됩니다.


이것은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이나 우리 어른들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일종의 어떤 ‘거리’를 둡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지켜보고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내면에서 어떤 상(이미지)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어떤 거리를 두지 않습니다. 곧바로 그 일어나는 사건에 들어갑니다. 아이의 눈앞에 보이는 어떤 것과 자기 자신의 행동 사이에 거리라는 필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걸음마, 말하기를 어떻게 배우는가를 관찰할 때 그것은 훨씬 더 뚜렷이 나타납니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발달


어떤 어린이도 걷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엄마도 그것을 아이가 어떻게 배워야 할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은 그것을 저절로 배우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스스로 배우게 되는 걸까요?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자기가 스스로 일어나고 걸어갈 수 있는 어른들을 체험하면서 움직임을 따라 하게 됩니다. (모방)


심리학에서 아주 유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약 90년 정도 된 사례입니다. 인도에 유명한 늑대 아이가 있었습니다. 두 아이였습니다. 늑대가 낚아채 간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늑대는 아이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늑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일어나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척추가 그대로 굽어져 있었습니다. 늑대가 움직이는 것처럼 아이들은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인도의 한 선교사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 이 아이들이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배우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이미 그 시기가 지나버렸다는 겁니다. 아이의 척추 발달은 이미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여기에는 굉장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탄생과 함께 이미 완성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겁니다. 동물들이 보이는 모든 행동방식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내재된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새로운 것들이 첨가되지는 않습니다. 원래 자기 안에 잠재된 것들이 퍼져나가는(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갓 태어난 고양이를 태어나자마자 엄마로부터 떼어내 사람처럼 먹이를 주고 키운다면, 이런 경우에도 고양이가 자랐을 때 건강한 고양이가 될 수 있습니다. 즉 고양이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말하는 방식대로 말을 하는 겁니다. 모방할 고양이를 보지 못해도 스스로 고양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만이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면 발달이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연구자가 있습니다. 스위스 출신의 아돌프 포츠만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은 생리학적으로 볼 때 조산한 경우"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겐 두 번째 모태(자궁)가 필요합니다. 이때 두 번째 모태라는 것은 바로 사회적 모태입니다. 첫 번째 모태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인간적 자질들은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바로 관계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선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 그 다음은 말하는 법 그리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들에게 인간적 자질이라는 모든 것 기본(기초)은 관계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가?


이 기본적인 발달을 가능케 하는 것이 부모들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른이나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과 같은 그런 방식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제가 오늘 한국말을 배워야 된다라고 하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통역자에게 한국어의 구조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도 한국어의 구조에 대해 아이에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저보다 훨씬 더 빨리 한국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요? 저는 두 가지 측면을 말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어린이는 언어를 듣습니다. 바로 이때 기적이 일어나는데 젖먹이 아이부터 7세까지 어린이가 체험한 모국어는 아이의 발성기관을 변화시킵니다. 아이는 초반에는 전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으로 자기가 들은 언어를 이미 체험하고 있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아이에게 말을 하면 아이는 이 언어를 자기 몸속에서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성대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나중에 다른 발성(언어)들을 배우기가 어렵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제 이름은 볼프(f)강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제 이름을 발음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이 볼프(p)강 뭐 이런 다른 발음을 내는 겁니다. 한국어에서는 흔한 발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한국 사람들의 이름을 발음해야 되는 상황에도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듣는 것이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똑똑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우리가 체험한 언어를 통해서 형태를 갖기 때문입니다.


일반화시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체험한 모든 것을 자기 내면에서 내면의 움직임을 통해 함께 행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반적인 동사변화는 과거형을 만들 때 ‘-ed’를 붙입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불규칙 동사의 형태가 있습니다. “나는 정원에 갔습니다(went to the garden).” 아이들은 그런 말(goed)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아이는 ‘가다(go)’의 과거형을 ‘goed’라고 실수를 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저지르는 이런 실수가 아이들의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틀린 형태(goed)는 구조상으로는 맞는 것입니다. 다만 예외적인 것(went)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굉장히 일찍 언어의 구조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런 설명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어린이가 어떻게 지각하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지각은 우리 어른들과 학령기의 어린이들보다 훨씬 더 예민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지각할 때 우리는 외적인 측면만을 보게 됩니다.


제가 허구적인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저녁에 어린이집에서 부모님들을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모두 저를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제가 내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실 겁니다. ‘내일부터 피곤한 세미나가 시작되는데 왜 오늘 밤에도 강연을 해야 하는 거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무도 모르실 겁니다. (웃음)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점에서 서로 속일 수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하는 이야기가 사실은 내면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일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는 그렇게 안 됩니다. 어린이들은 바로 알아차립니다. 다른 예로 “네가 와서 정말 좋구나!”라고 제가 아이에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정반대의 마음이라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이 지각한 바를 바로 드러내놓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지각과 내적 의미가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른이나 학령기 어린이는 그것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우리에게 앞의 사례에서처럼 언어적인 실수를 보일 때 그들은 언어를 들으면서 곧바로 언어의 구조를 포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어린이들은 자기가 함께하는 것의 내적인 존재와 항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화와 어린이의 삶


오늘날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문명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어른들의 문화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삶의 태도에 임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내적인 의미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한 예로 제가 더러운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집어넣으면 그것이 다 끝난 다음에 그릇들을 빼내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 과정을 우리는 경험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론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지, 그것을 체험할 수는 없습니다. 냉장고, 세탁기, 자동차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적인 경우로는 컴퓨터의 화면, 텔레비전의 화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세계는 직접적으로 그것들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를 같이 경험하는 어린이의 내적인 활동성이 곧바로 한계에 부딪칩니다. 이 한계가 극단적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일찌감치 어린이에게 세계를 설명해 줍니다. 어린이가 세계와 만날 수 있는 도구를 일찌감치 차단해 버리는 겁니다. 어린이의 움직임은 계속해서 어른들의 문화에 의해 제동이 걸립니다. 이런 것들이 어린이에게 방해를 야기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식기세척기, 텔레비전, 컴퓨터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인 저로서도 그런 기술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들이 제대로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알콜()의 경우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주는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젖먹이에게 그것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아이에게 필요한 다른 것을 줍니다. 아이가 성장하면 포도주를 즐겨도 되겠죠.


어떤 것이든지 그 나름의 적당한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이들(7, 8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간단하게 같이 움직이면서 직접 이해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세계입니다. 100년 전 아이들은 들판에서 부모들이 일하는 것 또는 집 짓는 것 등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삶의 초반부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같이 따라할 수 있었고, 곧 세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작업을 하는 아버지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혹시 아버지가 집에 계셔서 뭔가 작업을 하시는 경우 보통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고 계실 겁니다. 이제 컴퓨터 자판의 키 하나만 누르면 화면의 그림들이 변합니다. 아이는 컴퓨터 자판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 그림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마법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같이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른들의 경우에는 같이 체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요. 우리 같은 경우 어느 정도 삶의 경험들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와 삶의 관계를 어느 정도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우리 삶을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우리에게 있는 그런 기초가 없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어린이에게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데에서 삶의 기본모델(같이 움직이는 것)이 뭔가 병리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머리나 감정이 아니라 움직임이 병리적인 증상, 즉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어린이들에게서 보이는 대부분 장애의 상당수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가 독일 어린이집의 경험 사례로 말씀드리면 아마 한국 동료 교사들도 그런 부분을 확인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의 움직임 특성과 공격성


어린이들이 자유놀이 시간에 방에서 여기저기 나뉘어서 놀고 있습니다. 몇몇 어린이들은 뭔가 집 같은 것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 아이가 옵니다. 방을 돌아다니다가 이 아이가 친구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무너뜨려버립니다. 그리고 난 후 도망가버리는 겁니다. 교사가 와서 아이의 손을 잡으면서 “왜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면 아이는 거기서 빠져나오려 합니다. 그리고 방어를 합니다. 자기가 친구들을 다치게 한 일을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교사는 아이에게 그것을 설명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일부러 의도했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저것을 망가뜨려야지’라고 내면에서 미리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저절로 그렇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직접적인 움직임으로 나가버리는 겁니다.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두 명의 아이가 아주 즐겁게 말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말 역할을 하는 한 아이가 서 있던 아이의 곁으로 지나갑니다. 바로 그 순간에 서 있던 아이가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합니다. 말 역할을 하던 친구가 다치게 돼서 웁니다. 우리가 살펴보니 이 일을 저지른 아이가 놀라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뭔가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공격성은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어린이들이 전혀 생명력이 들어 있지 않은 형태로 늘어져버린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이였을 때는 걱정 없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길거리에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나무 위로 올라갈 때 일입니다. “빨리 내려와 위험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린이집에 나무가 있다면 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쳐야 한다고 청소년 행정기관에서 유치원을 통제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가 나무 위로 올라가려 하면 교사는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됩니다. (웃음) 만약 아이가 떨어지면 교사는 엄청난 처벌을 받게 되고 그 직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완전히 공황상태가 돼버립니다.


많은 어린이에게 건강한 움직임이 어렵게 되어가는 상황입니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런 세계는 어린이들에게 적합하지 않고 오직 어른들의 세계입니다. 건강한 움직임의 발달 과정이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린이들의 발달 과정에 가장 나쁜 것은 전자매체입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어린이들을 지켜보면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되어 가나요? (입을 딱 벌리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여기에는 객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아래턱을 지탱하는 근육이 화면을 보면 더욱 약해집니다. 신체적 움직임이 조작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전체적인 운동 과정이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내용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연령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습니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움직임(운동)을 조작한다는 것이 안 좋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연구 사례가 있습니다. 한국 나이로 4~10세 연령에 해당됩니다. 두 어린이가 있습니다.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가 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슬로모션 비디오를 통해서 확인된 연구 결과입니다. 이런 공격적인 움직임에도 그 공격성을 막는 ‘저지선’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곧바로 때리고 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내면에 주저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공격적인 행동에서조차도 무의식적인 지도가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방식인데 서로 싸우다가 한 어린이가 ‘네가 더 세다’라고 포기하는 신호를 보내면 강자는 공격을 멈추게 됩니다. 이것은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이 포기하면 싸움이 끝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내적인 저지선은 점점 더 상실되고 있습니다. 많은 어린이에게서 내면의 저지선이 사라지게 돼버리고 상대방이 ‘가 이겼다’라고 포기를 해도 멈추지 않게 돼버립니다. 바로 이 움직임이 내면의 기대(저지선)를 이탈해 버립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이것은 어린이들의 적절한 나이 때의 움직임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재킷을 입어야 하는데 내 몸에 맞지 않게 소매가 긴 옷을 입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옷을 입고 도자기 가게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보면 선반에 있는 온갖 화병, 그릇들이 떨어지게 돼서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 됩니다. 내 움직임 속에 나 자신이 들어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움직임이 혼자 따로 논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지도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상황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린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고 평화로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교사가 동화를 들려줄 시간입니다. 어린이들이 그 동화의 상황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촛불을 켜고 짧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때 내면화된 분위기가 생겨납니다. 그 순간에 공격적인 태도로 이 상황을 어지럽히는 어린이가 생겨납니다. 한두 명이 가끔씩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바닥에 자기 몸을 던지고 반 전체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상황을 만듭니다. 뭔가 내면으로부터 분위기들이 만들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그런 상황을 만듭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바로 그 어린이 자신입니다.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는 곤란함 때문입니다. 이때 어린이에게 뭔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린이의 행동을 강화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럼 이 어린이에게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건강하게 같이 움직여나가는 과정이 가능한 세계, 즉 정기적으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경험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곳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는 활동들 말입니다. 꼭 그래야 한다는 의무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돕는 법


간단한 예 들어보죠. 집이나 어린이집에서 비로 청소를 해야 할 경우에는 어린이가 잠잘 때가 아니라 어린이가 같이 옆에 있을 때 하면 좋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원한다면 아이에게 해보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초적인 활동이 해당됩니다. 우리가 손으로 설거지를 할 때에도요. 세탁기 옆에서 손으로 빨래를 해야 할 것이 있을 때 또는 어린이집에서 뜰을 가꾸는 일, 화분갈이, 뭔가를 수선할 때도 경험을 같이 하고 싶으면 어린이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이가 개입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린이는 활동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부모나 교사들의 목표가 아니라는 거죠. 특별한 것을 배우는 것은 이 시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학교에 가서 할 일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라고 말했다고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참여함으로써 배우는 것, 그런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내야 합니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움직일 수 있는 다채로운 가능성들이 아이에게 필요합니다. 어린이집에서 줄넘기 놀이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걷는 균형잡기 놀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일요일에 같이 산책을 나가 올라갈 수 있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좋습니다. 어린이집에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 놀 때 곧바로 “안 돼”라고 제동을 걸지 않습니다. 라이겐도 한 가지가 됩니다. 독일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던 손동작 놀이도 체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큰 움직임, 작은 몸짓 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는 반복돼야 합니다. 그래서 이 움직임이 리듬활동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앞의 동화 읽어주는 분위기의 예에서처럼 동화는 인간의 발달을 이상형으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동화는 일종의 명상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의 위대함에 대한 내면적인 그림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주와 왕자가 나쁜 용으로부터 구해지고 왕비가 되어 결혼하는 이야기는(다이애나 전 황태자비와 같은 결혼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발달에 대한 존경의 표현입니다. 감상적인 접근이 아니고 인간 내면의 발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뭔가 고차원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들려주실 때 조용하고 차분하게 읽는 것입니다. 촛불을 켜고 우리를 내면으로 이끄는 음악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내면으로 이끄는 움직임입니다. 텔레비전을 볼 때와는 아주 다른 상황입니다. 


선생님이 즐길 때 듣던 동화는 이때 어린이들에게는 굉장한 활동성입니다. 이때 어린이들은 굉장히 예민해집니다. 어른이 뭔가 고차원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아이도 함께 체험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동화를 듣거나 격언을 들을 때 아이들은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진짜로 진지하게 의도하는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바로 '내면화된 순간에는 어른도 깊은 참여로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깊은 진지함으로 가꾸시길 바랍니다. 머리로 아이에게 의식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대하시길 바랍니다.


독일 문화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독일에서는 인사를 정중하게 할 때면 오른손을 내밀고 악수를 합니다. 할아버지나 이웃의 나이든 어른들에게 인사를 해보라고 한 아이의 아빠가 말합니다. “할아버지에게 오른손으로 인사를 제대로 해보렴. 틀린 손 말고 맞는 손(오른손)으로.” 이것은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에게는 적절합니다. 그러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에게는 아닙니다. 어른에 대한 존중은 부모에게서 체험합니다. 내가 어린이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계속 왼손을 내민다면 아버지인 내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실제로 내가 그 어른을 마음속으로도 존경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요. 아버지가 아이에게 이야기합니다. “너 제대로 행동해야 해.” 그런데 아버지 자신은 바로 이 나이든 분에 대해 존경의 마음이 없습니다. 아이에게 깊은 상처가 생겨납니다. 바로 이때 아이들은 동화를 들려주는 때와 같은 축된 상황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 개인적인 충고를 드리자면 나 자신이 의식적으로 완전히 몰두해 있는 그런 상황에서만 아이에게 요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동화 들려주기에서와 같은 사례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그런 행동을 보이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버릇은 허용되지 않아.”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설명은 항상 어떤 거리를 만들어냅니다. 나 스스로 정말 어떤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이런 버릇은 안 돼”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한테 이런 것 없어, 허용되지 않아”라고 하면 나 자신이 원하는 상황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겁니다.



질문의 힘


요약을 하자면 어린이들이 보이는 공격성의 상당 부분은 항상 간접적으로 우리 어른들에게 던지는 문제입니다. 내가 강자라고 해서 어린이들이 보이는 공격성에 대해 곧바로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제동을 걸지 않고 우리가 거기에 질문들을 집어넣는다면 말이죠. ‘아이야, 너는 이런 행동을 보이면서 뭘 말하고 싶은 거야?’라는 질문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오늘 저녁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만요. 여기에는 아이들이 없거든요. 그렇지만 내일 시어머니가 오시면 시험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동화를 들려줄 때와 같은 시간이 되는데 바로 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아이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내 내면에서 차분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화를 내지 않고 나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보는 것, ‘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니?’라고 사건의 상황에 나를 개입시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이기는(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와 함께 여러 실험을 해보고 뭔가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곧바로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디에 오류(문제)가 있는지를 우리가 발견해야 할 자동차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이 과정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어린이도 함께합니다. 그리고 이 움직임 속에서 장애를 보이는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더욱 더 필요합니다. 우리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이 내면에서 인도(지도)되는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도록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그 문제 상황에서 바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 우리 자신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린이로부터 배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분위기를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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