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과응보의 세상에서 회복적 정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본문
인과응보의 세상에서 회복적 정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어린 시절, 옛이야기를 읽으며 세상엔 참 못된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빼앗고, 공연히 손아랫사람을 괴롭히는 인물들을 보면 화가 났다. 약자들에게 감정이입이 돼 세상이 참 무섭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 위로를 받았던 게 악인들은 꼭 벌을 받는다는 결말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홀레할머니>에서 주인공의 언니가 역청을 뒤집어쓰는 장면이라든지, <흥부와 놀부>에서 놀부가 골탕을 먹는 장면은 통쾌할 뿐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이치를 배울 수 있었다. 지은 업에 따라 좋은 일에는 좋은 결과가,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따를 것이라는 믿음이 이때부터 생긴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실제로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동화를 통해 형성된 '세상에 대한 신뢰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인과응보는 권선징악(勸善懲惡)과 그 결이 약간 다르다고 생각한다. 인과응보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기인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이 있으면 과보가 따른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것은 기복과 같은 신비주의적 사고방식과 다르다. 말이든 행동이든 업을 지었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강물에 돌을 던지면 돌은 바닥에 가라앉는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돌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당시 브라만교 교인들에게 행한 부처의 설법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 굿을 하든, 비싼 변호사를 사서 무마를 하든 잘못한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며 결국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게 인과응보의 관념이다. 선업을 지었다면 어떻게든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 다만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서 후대의 자손에게 그 결과가 올 수 있고,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권선징악은 인과응보의 실천적 강령과 같다.
권선징악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도덕적 명령이 될 것이다. 선을 권하고 악을 응징해야 한다는 이 단순한 명제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기본적 정의관으로 자리 잡았다. 도덕과 정의는 무엇보다 공동체의 유지를 기반으로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은 선이지만 공동체에 해를 끼치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악행을 보고 눈감는 행위 역시 악에 가깝다. 권선징악은 응보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응보주의는 악행에 벌을 주는 것뿐 아니라 선행에 상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제비를 살려 준 흥부는 복을 받고,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린 놀부는 벌을 받지 않는가. 그러나 권선징악은 실천되어야 할 강령이지, 현실이 그러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동화와 다르다. 당장의 현실에서 선한 사람은 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악행을 저질렀지만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태어날 때부터 선한 사람이 따로 있고 악한 사람이 따로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적절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느끼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기만 한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범죄가 발생할 확률도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자기 이익, 자기 감정에 우선해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악의 문제는 개인의 심리 현상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문제, 다시 말해 사회구조적 문제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기 쉽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힘까지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인간이지만 안타깝게도 권력은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는 그래서 모순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는 추구되어야 할 이상이지 당장의 현실은 아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만든 법규범은 힘이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견제한다.
옛이야기 중에는 교묘하게 순응주의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효와 충을 강조하는 우리의 전래민담은 더욱 그렇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종종 권선징악의 탈을 쓰고 권력의 불평등을 은폐하며 부조리한 질서를 합리화한다. 이것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도덕적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손들에게도 부를 물려주기 위해, 정치를 하는 행정가들 역시 정치권력을 상속하기 위해 제도를 왜곡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억눌러왔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도덕주의를 낳았고, 교육을 왜곡시켰다. 노인은 젊은이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남성은 여성에게, 거주민은 이방인에게 도덕적 비난을 일삼는다. ‘감히’ 또는 ‘주제넘게’ 같은 부사는 권력자의 탄식으로 쓰이곤 했다. (그런데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우리는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는 문화에서 살아왔다.
냉혹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보다 더 우월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미성숙한 자기중심주의의 발로이기 쉽다. 안정된 존재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굳이 우월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월감은 물구나무 선 열등감일 뿐이다. 살다 보면 ‘특정 부류’의 사람은 결코 개선의 정이 없고, 원래 그렇다는 식의 편견 섞인 평을 듣곤 하는데, 이 역시 우월감의 발로다. “그런 인간들은 남 괴롭히는 걸 좋아해요. 사기를 쳐도 죄의식이 없어. 용서해줘도 소용 없다니까. 절대 반성하지 않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짐작이 간다. 자기 경험 안에서 좋게도 말해 보고, 기회도 여러 차례 주었을 것이다. 수 차례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면서 포기를 했을 거라 예상한다. 그런 다음에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드는 수순이리라. 누군가를 악마화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것은 상투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최종적인 결말이 항상 강력한 처벌뿐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하거나 가둬두고,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며 더 심한 경우에는 사형을 원한다.
“악마 같은 놈들이 더 잘 산다”며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건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의롭지 않은 세계관이 분명하니까. 여기에서 몇 가지 짚어보고 싶은 것은 대체 ‘악마’ 같은 사람이란 무엇이고, ‘잘 산다’는 건 무엇이며, ‘착하다’라는 건 또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이다. 전두환 같은 인간을 악마 같다고 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전두환을 악마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광주 시민을 학살하도록 명령해 놓고 발뺌하는 모습이며, 수 조원 대의 재산을 은닉했다는 의혹을 사는 그에게 연민의 정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더 잘 산다’는 건 납득할 수 없다. 아직도 “각하” 소리를 들으며 흥청망청 살아가는 그가 잘 사는 것 같지는 않다. 전두환과 이순자, 그리고 그의 자손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갑질을 일삼는 일부 기업주들, 하급자를 무시하는 일부 상급자들은 잘 살고 있는 걸까?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인과응보의 세상에서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를지,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다. 착하게 산다는 건 악마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인과응보의 냉엄한 이치를 깨달아 악을 멀리하고 선업을 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잘못을 저질러놓고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사람은 세상 이치를 모르거나 외면하려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굳이 선과 악으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과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 만약 일생 동안 흡연을 지속해 왔다면 폐가 건강할 수 없다. 폐뿐 아니라 몸의 여러 기관에 질병이 발생하기 쉽다. 이로 인해 암에 걸렸다면 신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물론 그 역시 담배산업의 희생자일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 속에서 범죄에 노출된 피해자는 특별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무언가를 잘못하지 않아도 범죄로 인해 피해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든 예를 확장한다면, 흡연자의 가족이 간접흡연으로 질병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잘못이 없어도 의도치 않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왜곡된 권선징악의 논리는 피해자를 돕지 않는다. 보통 권선징악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무언가를 잘한 사람은 상을 받고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피해자에게 벌어진 일은 '잘못한 게 없음에도 벌을 받은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인과응보의 원리를 공적으로 확장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비난하거나 가해자를 비난하며 내적으로 피폐해질 가능성이 크다. 회복적 정의는 여기에서 질문을 던진다. "악을 응징하고 선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여기에 어떤 필요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가해자는 자기 잘못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고, 피해자는 피해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어떤 종류의 피해든 피해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 처벌보다 우선할 것은 피해자의 피해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가해자 처벌은 그 다음 일이다. 피해자 역시 응징보다는 자신의 고통에 먼저 집중할 필요가 있다. 가해자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합당한 보상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권선징악이라는 응보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에 더 빨리 반응하는 것은 진화의 결과라고 한다 쳐도,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질문을 통해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가해자 처벌도 중요한 사안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회복적 정의는 (일종의 중력 법칙처럼 확고한) 인과응보의 원칙에 머물지 않고 본질을 쫓는다. 그렇다고 인과응보가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양자역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뉴턴의 근대역학을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인과응보의 기반 위에서 우리는 응보주의를 포함하면서도 초월할(포월)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벌어진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더 중요하고 더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회복적 정의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정한 자극일 것이다.
2020.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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