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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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수업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니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교육계 역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학교에 가야 할 아이들이 정상적인 등교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염의 우려에도 개학을 강행하는 교육당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치료제나 백신이 나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전염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고, 꼭 필요한 일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학교에서 확진자가 안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최대한 관리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교실 문을 열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교직원이 두려움을 견디며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부디 확진자가 나왔다 해서 학교나 교사를 비난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화상수업이 보편화되고 있지만, 이 현상에 대해 우리가 아무런 반성 없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의학계에서는 아이들의 미디어 중독 문제를 심각하게 지적해 왔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컴퓨터와 태블릿,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과거 TV가 보급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의 정서장애, 인지장애, 과잉행동, 애착결핍, 문해능력장애 같은 현상들이 급증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대놓고 아이들에게 전자기기를 쥐어 주는 상황이 되었으니 미디어 중독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동통신 전자파의 영향이나 시력 저하 같은 문제를 제하고서라도, 가장 우려되는 일은 자아 형성의 왜곡 문제이다. 과연 화상수업의 대중화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수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제기를 한다면, 왜 아이들은 학교에 와서 수업을 받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교사나 부모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아이의 성장을 중심에 놓고 고민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이는 아직 자아가 독립하지 않아 발달에 따라 일정 부분 보호를 받고 교육이 필요한 영유아 및 아동, 청소년을 뜻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필요한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수업을 들으며 배우는 것은 교과지식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느낌을 말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류하는 법, 수업내용을 가슴으로 느끼는 체험 등이다. 아이들은 배우는 내용들을 소화하여 개념을 형성하지만,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아이 자신과 함께 성장하고 발달하는 것이다. 배우는 기쁨은 여기에서 온다. 예전에 알았던 것이 새롭게 다가오고 분명하게 깨달아가는 과정을 아이는 수업 속에서 스스로 얻어간다.
화상수업 역시 쌍방향 교류가 가능하겠지만 일상의 수업처럼 활발할 수 있을까? 아이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교감하는 일이 얼마나 가능할지 의문이다. 필요하다면 가서 어깨도 두드려 주고 함께 몸을 움직이며 활동을 해야 하는데, 화상수업은 그게 빠져 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받아야 한다. 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교사의 관심과 사랑, 격려를 받음으로써 더 배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뿐 아니라 아이들은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아야 한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움직임 욕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체적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지 못한 아이에게 짜증이 많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부정적인 에너지는 자칫 자기 자신 또는 타인을 혐오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접촉을 최대한 줄이더라도 몸을 움직이며 친구들과 노는 일은 커 가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쌓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경험이지 않을까. 그 속에서 아이들은 관계맺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소중함을 느끼며 자기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아를 가진 정신적 존재다. 인간에게 교육이 필요한 것은,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능동적으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 중심의 화상수업은 아이들에게 수동성을 더 강화할 우려가 크다. 가만히 앉아서 화면만 보아도 뭔가 재미있고 유익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런 느낌조차 없이 멍하니 시간을 때우는 식으로 가기가 쉽다. 잘 이해가 안 되면 손을 들어 묻고 재차 설명을 들어야 아이들은 확신을 갖는다. 교실에서라면 손을 들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거나 멍하니 있는 아이에게 직접 교사가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화상수업에서 이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양육자의 도움일 텐데, 가정마다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교육당국이 무리를 해서라도 학교문을 여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 때문일 것이다.
온종일 전자기기를 끌어안고 지낼 아이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더 자극적인 화면이 아니면 이 아이들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유튜브의 콘텐츠는 갈수록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영상이 인기를 끈다. 아무 생각 없이 봐도 좋을 만한 콘텐츠들에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성이 파괴된 내용도 존재한다. 조회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속성 역시 일부분 그렇게 자극적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사람들의 도덕적 상식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서는 것 같다가도 결국에는 상식 내부에 머물고, 그 상식을 강화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고 있는 유튜브의 동영상 중에는 아예 그걸 파괴하고 미친 소리, 미친 짓을 과감하게 해대는 내용들도 다수 존재한다. 화상수업을 아예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정과 학교에서 협력하여 아이가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지도를 하는 것 역시 핵심사항일 것이다.
이제 학교에 오는 아이들과 교실수업에서 더 적극적으로 벌여야 할 활동은 손과 발을 더 많이 사용하여 움직이는 것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작업이다. 더 자주 악기를 연주하고 놀이를 하고 수공예를 하고 종이접기와 찰흙 만들기 등을 할 필요가 있다. 연극적인 활동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눈과 귀로만 화상수업을 받던 아이들에게 균형이 생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고요한 시간을 갖는 것도 너무나 필요한 일이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도 우리는 좀 더 인간적인 활동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화상수업은 우리의 길이 될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의 생생한 만남이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2020.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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