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가짜는 싫다, 진짜이고 싶다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가짜는 싫다, 진짜이고 싶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5. 28. 11:06

가짜는 싫다, 진짜이고 싶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어느날 문득 자신의 삶이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무거운 마음이 됩니다. 그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몰두할 것을 찾거나 아니면 그 생각 자체에 빠져들 수 있겠지요. ‘이건 아닌데, 이건 내 진심이 아닌데, 이렇게 사는 건 거짓인데...’, 이런 마음이 자꾸 든다는 것은 오히려 좋은 신호일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양심(conscience)의 발현입니다. 우리의 본질적 자아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관찰하고 성찰하며 관조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묻습니다. ‘이것은 진실한가? 거짓되지는 않은가?’

 

동심천사주의를 옹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진실한 것 같습니다. 재밌게 놀고 싶고 맛난 걸 먹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죠. 마음이 떠오르면 그 즉시 그렇게 행동합니다. 어린아이들이 혼란스러울 때는 어른들이 이중명령을 아무렇지 않게 내릴 때입니다. ‘고분고분 내 말 들어, 하지만 네 주장도 해봐.’ 또는 ‘귀찮지 않게 가만히 있어, 하지만 아이답게 활기차게 놀아.’ 아이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가만히 있어라, 하지만 알아서 행동해라.’

 

이것은 메신저의 무책임함을 숨기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메시지는 일관되어야 하지만 그 결과를 책임지고 싶지 않을 때 이중명령이 나옵니다. 책임은 지기 싫고, 요구는 하고 싶을 때 이상한 태도가 나옵니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적 현상만이 아니라 심리적 현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나를 내버려둬, 하지만 나에게 관심을 가져줘.’ ‘꼴도 보기 싫어, 하지만 내 곁에 있어줘.’ ‘그만 두고 싶어, 하지만 더 하고 싶어.’ 내적 갈등은 흔히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양갈래의 욕구 중 어느 것도 버리지 못할 때 벌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분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보통 자아가 약한 사람이 스스로도 그렇고 주변 사람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고통을 줍니다.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걸 인정할 만큼 강하지 못하니,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방식으로 말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따뜻한 공감과 지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아가 바로 서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와 ‘나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 때 자아는 힘을 갖습니다. 이러한 인식 능력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강해지는데, 역설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인정할 때 참다운 인식이 가능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차오르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짜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가짜로 살기 싫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우리 사회만 보더라도 여러 부침을 겪으며 의식 수준이 상당히 성숙해진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지, 혐오하지 않고 비판하는 법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회의 기득권이 어디에 있는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검찰과 언론이 어떻게 협업하고 작동하는지를 적나라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그 패턴을 파악했기 때문에 여론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론은 사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옳기만 한 건 아닌 것처럼 사회의 마음도 이리 휩쓸렸다가 저리 휩쓸렸다가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요근래 온갖 일을 겪으며 국가공동체의 주권이 소수의 기득권 세력에 있는 게 아니라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이 주인임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습니다.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세력들은 더욱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요.

 

가짜가 보인다는 건 한편 괴로운 일입니다. 가짜인 걸 눈 감을 때 안전해질 수 있고 그래야 생계도 유지된다면 비참해질 수밖에 없지요. 몰랐으면 모를까, 분명히 알고 느끼게 되면 가짜인 걸 견디는 게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사회적 참사나 학살이 일어났을 때 많은 대중이 그 현상을 부인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머리로 현상을 인식한다 해도 의지를 내는 건 어렵습니다. 우리가 관념의 세계에 사는 것은 아니니 일정 부분 타협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이 우리의 양심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른다면, 진지하게 고민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가짜를 견디고 살 때 우리는 무기력해지고 우울감에 빠질 수밖에 없으나, 우리가 진짜로 살아갈 때 삶은 더욱 단순해질 수 있고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삶은 고정된 답이 없기에 진실할 수 있습니다. 양극단 어느 쪽에 기대어 있는 게 아니라 그 중간 어디쯤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고 때로 번민하며 이따금 기쁨을 느끼는 게 진실함이고, 깨어 있는 것이며, 진정한 편안함은 여기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야 하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분명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살아 있다는 느낌은 결국 진실함에서 올 것입니다.

 

 

 

2020. 5. 2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