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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사랑의 회복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7. 6. 11:27

사랑의 회복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누군가를 사랑할 때 또는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알 수 없는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여기에 두려움이 없다면 남는 것은 순수한 기쁨뿐이다. 이 현상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순히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가슴이 뛰고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이 솟아나는 생리적 현상은 사랑이라는 정신 현상의 물리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알콜이나 마약에 중독되는 것은 사랑 속에 있고 싶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이 막혀버린 사람의 몸부림일 것이다.

 

물질주의의 세상에서 사랑은 낯선 현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실 영성(spirituality)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기쁨이 머리를 채우면 눈이 빛나고 의지가 샘솟는다. 바라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은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비경제적이고 불합리한 행위를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 지치고역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라면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다. 업무를 위해 장거리 출장을 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는 것이라면 내내 즐거울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 역시 억지로 애를 쓰는 것이라면 우울감이 들지만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면 아무리 번거로운 일이라도 감사하며 행할 수 있다. (물론 기초적인 체력은 중요하다.)

 

사랑이 고양된 상태에서 맺는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호혜적이다. 나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 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상호적이라면, 그리고 여기에 성숙한 태도가 겸비된다면 갈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쩌면 과거와 현재의 갈등은 미래의 갈등 없음을 위한 수련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회복적 정의에서 추구하는 관계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가 아닐까. 최소한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 관계를 우리는 꿈꾼다. 사랑은 의무가 아니므로 미움이 없는 관계 정도가 현실적 대안일 수 있겠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필요한 힘이 낭비되는 일이니까. 정말로 미워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미움이라는 관심조차 아까울 것이다.

 

온전한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이 그 지향점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1. 구성원 각자가 두 발로 서서 자기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고유한 정신적 자아를 가진 특별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 건너오면서 우리는 각자의 과제와 소질, 소명을 갖는다. 우리가 평생 이루어야 할 것은 자아의 실현이다. 자기 길을 올곧게 찾아가는 사람은 넘어질지언정 무너지지 않는다. 사랑은 두려워하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손을 내미는 행위에 가깝다. 자기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고, 자기 세계를 창조해 가는 사람이 성장할 수 있다. 교육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일이다.

 

2. 자기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욕구와 두려움을 이해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오직 사랑만을 갈구할 뿐 세상의 그림자를 직시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이해 못할 행위를 했을 때는 왜 그런 행위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 현상 역시 탐구해야 한다. 그 원리를, 인과적 힘을 찾지 못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세상을 저주하기 쉽다. 비난은 무지한 사람의 절규와 같다. 자기를 비난하고 타인을 비난하기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현상의 이면을 살펴야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3. 내가 바라는 것을 명확히 알되 손해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적 과제는 개인적으로 깨어나는 것이자, 성숙해지는 것이다. 깨어남은 반감을 동반한다. 비판적인 태도 없이 현실을 냉정하게 보기는 어렵다. 사랑은 호감만으로 주조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적절한 반감, 다시 말해 반사회적 힘 또한 필요하다. 나의 관점, 나의 의견, 나의 주장, 나의 욕망을 외면하고 성숙한 자세를 갖출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만 매여 있다면 관계는 형성될 수 없다. 나의 주장을 갖되, 불의하지 않다면 전체의 의견을 수용하고 입장을 내려놓는 사회적 힘도 키워야 한다. '공동체 사회란 약간씩 손해보며 사는 것'이라는 관점이 없다면 반감의 칼날에 서로 상처입을 수밖에 없다.

 

4. 새로운 오늘을 열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사랑은 계산하는 행위가 아니다. 마음을 내기 전에 득실을 따지고 전략을 짜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이다. 특정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기 이익 또는 집착에 얽매여 있다면 가볍게 새로운 마음을 내기가 어렵다. 지나간 일은 값진 경험이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변화는 새로운 시도가 누적될수록 그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의 정신적 자아는 스스로의 과제를 실현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고, 존재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은 건강하게 자아가 형성된 사람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자아는 정신적 존재이기에 현실세계에서는 구체적인 매개물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생각, 통찰, 충동, 욕구, 의욕, 감정, 기분 등은 우리의 자아를 드러내 주고 실현해 가게 한다.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존엄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이기주의의 발로라기보다 자기 공감에 가깝다.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지를 깨닫는 과정이 곧 사랑의 회복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일이 벌어지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고, 덜 외면해야 하며, 서로를 치유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을 사랑의 실천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수용하며 용서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울 수 있다. 이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남의 일에 신경쓰느라 일생을 보내기도 한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든 자기 존엄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존재감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것은 유일무이한 존재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행위든 사랑이 없을 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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