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당신의 정의와 나의 정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정의 본문
당신의 정의와 나의 정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정의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감당하기 힘든 일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당혹스럽고 불안한 감정을 느낀다. 화가 나거나 우울하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때 느끼는 감정은 살아가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우리의 기본 욕구가 드러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체로 비슷한 기본 욕구를 갖고 있다. 안전, 평화, 존중, 인정, 사랑, 안정, 신뢰, 행복, 주체성...... 이것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의 감정은 들끓는다. 그리고 자아는 고통에 빠져든다. 벌어진 사건 그 자체보다 내면에서 들끓는 감정 때문에 더 큰 위협을 느낀다. 이로 인해 합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과 욕구에 깨어 있지 못할 때 자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한다. 정신분석학자인 안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심리적 전략을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불렀다.(<자아와 방어기제>, 1936) 방어 기제는 따로 배워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또는 일관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변화된 상황, 특히 원치 않는 사건에 대해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뿐 아니라 정황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조차 힘들다. 더욱이 자기 모순에 직면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방어 기제를 사용해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방어 기제를 사용하는 동안 우리는 상황을 좀 더 정확히 인식할 수 있고 힘을 키울 수 있다.
억압(repression)
감당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무의식으로 보내기
부인(denial)
위협적인 현실을 외면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전치(displacement)
문제의 초점을 바꾸거나 대상 바꾸기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
불편한 감정과 생각을 정반대로 표현하기
합리화(rationalization)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어 결과를 정당화하기
이지화(intellectualization)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경험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기
감정 분리(emotional isolation)
자신의 경험에서 감정과 생각을 분리시키기
퇴행(regression)
비교적 단순한 초기의 발달 단계로 후퇴하기
어쩌면 우리 삶은 방어 기제의 연속일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깨어 있지 않으면 말이다. 어린 시절 겪었던 학대를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갑질을 하는 상관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자기 억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봉인했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방어 기제가 맥락 없이 공격 기제로 전환되는 일은 흔하게 벌어진다. 자기 자신을 공격할 수 있고, 자기보다 약한 대상이나 집단을 공격적으로 대할 수 있다. 자기가 받은 상처가 크다고 해서 남에게 주는 상처가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자아로 통합되려면 상처를 직시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아이를 가르치거나 키우는 어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개인적 사건뿐 아니라 사회적 참사와 같이 커다란 문제 앞에서 우리는 분노하고 저항한다. 불의한 사건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은 정의를 위해 올바른 일이다. 인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무기력해진다면,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굴욕적인 삶을 죽지 못해 산다면 우리의 자아는 무너지고 약화될 뿐이다. 이때 필요한 힘은 반감, 즉 반사회적 힘일 것이다. 반감을 통해 밀어내고 분리하여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반사회적 힘은 이런 상황에서 매우 올바르고 정당하다. 사춘기 아이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힘이 지나쳐 자아가 바르게 서는 일에서 벗어나 대상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단계로 나아간다면 균형을 잃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 삶의 목적이 자아의 회복과 정의의 확립에 있다면 응보주의는 제한적 기능을 갖는다. 불의한 일에 화가 나고 응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그 불의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 또는 존경했던 사람이라 했을 때 호감, 즉 편을 들고 옹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가는 대로만 할 수는 없다. 반감이 정당한 분노를 넘어 혐오와 증오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호감이 안타까움을 넘어 부인과 합리화로 나아가는 것 모두 균형을 잃은 일이다. 우리의 감정은 감정대로 존중하되 조급하게 판단내리기보다("내가 옳다") 발생한 피해와 각자의 욕구 또는 필요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리라.
우리의 기본 욕구가 공통되어서 마음과 마음이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발생한 피해를 중심으로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고 각자의 욕구와 필요를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때 비로소 불의한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시스템뿐 아니라 우리의 문화까지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관계 속에 구조적인 불평등과 억압, 착취의 문화가 있다면 그것을 드러내어 고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작업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물론 진상조사 역시 중요한 일이며,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혀 오해의 소지가 없게 하는 작업 역시 필요하다. 한 발 물러나 사건 전체를 보려고 하는 것, 한 발 다가가 피해자의 피해에 귀 기울이는 것, 우리에게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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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이 성추행 의혹을 받자 목숨을 끊었다
피해자가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책임을 지는 태도로 죽음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그가 쌓아온 엄청난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받고,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책임을 지면 될 일이다
그의 가족과 지지자가 받았을 충격과 고통만큼 피해자의 혼란과 아픔 역시 돌아봐야 한다
피해자의 혼란과 아픔만큼 박 시장의 가족과 지지자가 받았을 충격과 고통도 돌아봤으면 한다
시장이 아니라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일할 때의 박원순이,
하워드 제어의 <Changing Lenses(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의 번역판에 썼던 추천사를 읽노라면
삶의 모순과 한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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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승리란 무엇인가?
- 분쟁과 갈등, 원한과 복수의 종국적 해결책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나는 언젠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아미쉬 마을을 하루 구경한 적이 있다. 우주선이 달에 갔다 오는 이런 시대에 아직도 19세기적 삶, 목가적 삶을 태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신기하고 아름답게 생각되었다. 그 이후 이 아미쉬 마을에 우유배달을 하던 한 젊은이가 정신장애로 아미쉬의 한 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고 그 생존가족이 법정에서 그 가해자를 용서한 사건을 다룬 책을 읽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인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지가 신기했는지 미국에서도 이 책은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의문이 하워드 제어(Howard Zehr)가 쓴 『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 책을 읽고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짓기, 가해자에 대한 응징, 피해자의 손해에 대한 보상의 현존하는 사법적 정의, 응보적 정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법정의 현실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원고와 피고, 고소·고발인과 피의자 사이에 상호간의 공방의 과정을 거쳐 그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나머지 한 당사자는 울분의 패배를 당한다. 그는 억울해서 또 항소심, 대법원 그것도 모자라 헌법재판소까지 올라간다. 거기서 현실적·최종적으로 결판이 난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 사건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에게는 종국적 평화가 오고 분쟁이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불만과 분노가 가득 차 있다. 나는 이른바 '사법적 피해자'라고 하여 모든 법적 분쟁해결 절차가 끝난 뒤에도 그 분노를 삭이지 못하여 끝없이 언론과 시민단체에 진정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의 나머지 삶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된다. 응보는 늘 원한을 남기고 심지어 그 응보적 정의를 이룬 사람조차 마음 한구석에 불만과 불안을 갖는다.
회복적 정의는 바로 이러한 경우 마음으로부터의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 모두에게 만족을 준다. 외형적으로 보면 양보하는 형식일 수도 있고 포기일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만족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의 승리이게 마련이다. 나는 이 회복적 정의가 단지 종교인들의 손 안에 남아 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의 법정에서도 추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법조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에게도 유용한 책이다.
젊은 시절,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압제자 로마에 대해 물리력과 저항을 통해 그 식민지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통해 종국적으로는 로마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거꾸로 로마를 정복하기까지 하였다. 용서와 사랑의 힘은 한 인간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도 바뀌기를 바란다.
(2010년 12월 30일 제1판 1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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