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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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감과 혐오감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어린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어느 순간 고집을 부리고 매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온순하고 말을 잘 듣던 아이라면 부모님이 더 당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아이들은 자기 생각이 생기는 때라서 반감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대략 만 2.5세에서 3세 사이에 아이의 첫 번째 자의식 형성이 이루어집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자신을 가리켜 자기 이름(3인칭)을 부르지 않고, “나”(1인칭)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내가 나라는 걸 깨닫는 이 일을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 이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지만 그 이전의 일은 그저 느낌으로만 존재할 것입니다. 내가 엄마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아빠도 아닌, 탁자나 의자도 아닌 “나”라는 걸 깨닫는 것은 (미숙하지만) 개별적 사고 생활이 시작했음을 알려 줍니다.
호감으로 가득 찼던 아이의 마음에 반감이 차 오르면서 “아니야”, “싫어”, “안 해” 등의 부정적인 말이 늘어날 것입니다. 흔히 이 시기를 ‘아니야’의 단계라고 하는데, ‘나’의 단계를 거쳐 3세 이후에는 ‘너’를 찾습니다. 그 전까지 단독으로 놀던 아이가 친구를 찾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3세를 전후해 생겨난 사고 생활은 우리 어른이 하듯 논리적 사고가 아니라 철저하게 판타지적 사고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행위를 모방해 소꿉놀이를 시작하며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내 그것을 현실처럼 믿습니다. 3,4세 아이들에게는 조개 껍데기나 돌멩이, 나무 토막, 솔방울, 도토리 같은 구체물이 많이 필요합니다. 실크천과 우산, 긴 막대기 같은 구체물을 보고 만지며 거기에서 판타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3세를 넘어간 아이들은 친구에게 물건을 빌려 주기도 하고, 친구가 울면 등을 토닥여 주기도 합니다. ‘우리’라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반감(Antipathie)이란 밀어내어 분리되려는 힘을 말합니다. 반감을 통해 우리는 의식적으로 깨어나며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감이 강하지요. 이 시기 아이들의 관심사는 내가 누구인지(자아 정체성),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회란 무엇인지, 사회는 왜 이 모양인지 등등에 대한 의문입니다. 사춘기 전 아이들, 그러니까 초등 저학년 아이들은 선생님을 무조건 좋아해 줍니다. 호감으로 가득 찬 이 아이들에게 담임 선생님은 그저 아름답고 멋지고 훌륭한 분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반감이 고개를 드는 4,5학년부터는 (발달이 빠른 여자아이들이 먼저) 선생님을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선생님은 노래는 잘 하시는데 수학은 잘 못 가르치시는 것 같아” 이런 식으로요.
사춘기를 향해 갈수록 아이들에게 중요했던 외적 권위는 이제 내적 권위로 탈바꿈해 갑니다. 아이들은 점점 친절하고 아름다운 교사상보다 약간 까칠하더라도 전문적인 역량을 보여 줄 수 있는 교사를 선호합니다. 영어 교사라면 영어에, 과학 교사라면 과학에 탁월성을 보여 줄 때 아이들은 교사를 믿고 따릅니다. 여기에 더해 이따금 유머와 친구 같은 친근함을 보여 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부모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마음이 독립하여 자기 감정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싶은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들은 전환이 쉽지 않은 편입니다. 사춘기의 절정인 중학교 2학년 즈음의 아이들은 아직 판단력과 사고력 같은 사고 생활은 독립하지 못했지만, 감정 생활은 독립하여 자기 마음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싶어 합니다. 초등학교 때처럼 부모의 적극적인 위로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때는 감정만큼은 내버려두는 게 좋습니다. 마음이 풀리면 대화를 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춘기 시기는 부모보다 친구를 찾아가며, 아이의 인격 형성에서 교사나 부모보다 또래 친구의 영향력이 막대합니다. 이때 아이들은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를 맹렬게 적대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 줍니다. 미래가 불안한 지금 시대에 아이들의 인격을 파괴하는 문화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문화입니다. 사춘기 이후의 아이들은 생각보다 사회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며, 자신의 안위를 고민합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점점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해 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사회 체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시스템에서 아이들은 불안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재화가 있음에도 왜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지 아이들은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기존의 시스템을 강요하며 열린 사고를 못하게 막는다면, 예를 들어 지금처럼 입시 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간다면, 아이들의 반감은 방향을 잃고 혐오감(Ekel)으로 오염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이미 정치적으로 혐오를 장려합니다. 대형 기독교를 중심으로 동성애를 혐오하도록 하며, 우익 정치세력은 여성혐오를 통해 젊은 세대를 이간질하려는 작업을 합니다. 난민을 혐오하라고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진 적도 있지요. 사실 우리 사회는 오랫 동안 노동자들을 혐오하도록 어린 시절부터 교육해 왔습니다. 약자끼리 서로를 혐오한다면 기득권 입장에서는 통치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면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인 혐오사상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도 합니다.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르며 감정적이고 당파적이라는 관념 또는 이념형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일종의 마름인 친일파들이고 그 시대에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사들입니다. 조선놈은 안 된다거나 사흘에 한 번씩 패야 정신차린다는 말은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은 대체로 친일파의 후예들입니다.
일본 우익들이 궤변을 늘어놓고 가짜뉴스를 유포하는 것은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조선인과 비교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신사적이고 약속을 잘 지킨다는 이념형인데, 이것은 혐오와 비교에 기반해 세워진 초라한 자의식입니다. 전략 물자라고 할 만한 물품들의 수출을 금지하며 다가올 선거에 매진하는 모습이 가엾고 안쓰러울 뿐입니다. 그들의 행태에 대한 반감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반일과 불매 운동은 건강한 흐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일본에 호감을 가지라는 일부 우익 성향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정체성은 독립된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알량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지요. 이 상황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좀 더 근본적인 지점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은 무엇인가?”
어른이 된다는 것, 성숙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임에도 자기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어른스러운 아이입니다. 나이가 많음에도 부정적인 감정에만 사로잡혀 욕설을 늘어놓고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애 같다”고 말하겠지요. 반감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반감은 성장에 필요한 힘이지만 그 상태에 빠져 있으면 혐오감으로 전화합니다. 반감을 통해 현실을 냉정히 인식하고, 이 상황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파악하여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무책임한 일본과 한국의 우익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가급적 일본 제품을 사지 않는 것은 혐오가 아니라 건강한 반감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추구해야겠지요.
“When someone is cruel or acts like a bully, you don't stoop to their level. No, our motto is,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저들이 잔혹하게 나오고 약자를 괴롭힌다 해도 우리는 그들처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요, 우리의 모토는 이렇습니다. ‘저들이 낮게 가더라도, 우리는 높이 갑시다. (저들이 비열하게 나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
- 미셸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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