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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인지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3)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26. 01:43

인지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3)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발도르프 교육운동과 사회삼원론

“오늘날 인지학을 고찰하는 글에서, 세계대전으로 인해 사람의 영혼 속에 온갖 ‘신비주의적’ 정신사조나 그 아류들이 출현하는 데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식의 생각을 반복적으로 접할 때면, 게다가 인지학까지도 이런 사조의 하나로 인용될 때면 나는 어떤 아픔을 느낀다.”(<루돌프 슈타이너 자서전 – 내 인생의 발자취>, 469쪽)

발도르프교육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발도르프 교육운동은 191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첫 발도르프학교가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발도르프-아스토리아 담배회사의 사장인 에밀 몰트와 인지학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에 의해 새로운 학교와 교육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적 교육뿐 아니라 문화 전체를, 나아가 사회 전체를 뿌리부터 쇄신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신비주의적인 세계관을 전파하기 위해 학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슈타이너는 발도르프 교육운동을 통해 정신문제를 바로잡고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자 했다.

1919년이 우리에게는 3.1 만세운동으로 기억되지만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으로 인한 빈곤과 절망, 비참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길어내야 했던 때이다. 슈타이너는 사회삼원론을 제시하며 전쟁의 파국을 이끌었던 정부 당국이 민주적으로 극복되어야 하고 공권력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화 영역과 경제 영역은 독립적이고 자치적으로 다스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의 세 영역인 문화, 정치(법, 국가), 경제 영역은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각 영역은 저마다 자유, 평등, 박애(형제애)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사회삼원론의 요점이다. 예를 들어, 국가는 법을 감독하지만 모든 영역에서 감독권을 행사해서는 안 되고,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까지 주도력을 내보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슈타이너의 사회사상은 나름대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지만 독일 사회를 혁신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군대의 고위급 인사와 유명 정치인들이 슈타이너의 사회적 주장을 책으로 접했다고 한다(<사회문제의 핵심>은 당시 상당한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사회가 이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고, 사회삼원론 역시 뿌리를 내릴 만한 실제적 힘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또 다른 세계대전이 독일을 더 큰 파국으로 이끌었다.

발도르프학교는 분명 사회운동의 일환이다. 사회삼원론운동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분야가 바로 발도르프 교육운동일 것이다. 우리는 이 학교를 통해 아이들에게 세상에 대한 다양한 수업내용을 제공하며, 모든 수업을 예술화하여 아이들이 자기 내면의 힘과 능력을 스스로 연마하도록 돕는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강한 의지와 풍부한 정서, 그리고 올바른 사고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훗날 사회에 나가 자기의 삶을 책임 있게 살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작업을 주도적으로 펼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발도르프학교의 교사와 부모들은 교과과정을 만들 때뿐 아니라 학교의 조직구조를 만들 때에도 사회개혁을 마음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 슈타이너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며 부모들 역시 학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학교는 국가와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국가의 통제와 자본의 압박 속에서 아이들의 발달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실현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국내의 발도르프학교들이 미인가 대안학교로 존재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지만(독일과 달리 국가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기 때문에)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공교육 현장에서 발도르프교육을 적용해 가고 있는 많은 교사들이 부딪히는 난관 중 하나가 정부의 국가주의적 통제이다. 국가는 교사들을 말 잘 듣는 관료로 만들고자 하며, 국가주의적 교의로 아이들을 세뇌시키고자 한다(예를 들어, 여전히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요하는 것). 또한 학교는 성과급 차등제와 같은 자본의 방식으로 교사를 길들이려 한다. 유아기관의 경우 정부방침을 따르지 않으면 재정지원을 중단하기도 한다.

교육은 문화 영역의 주역으로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어야 한다. 국가주의가 강한 사회일수록 교육은 아이들에게 낡은 사고를 전승하고자 애쓰며, 이로 인해 우리의 정신생활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만다. 슈타이너는 산업주의로 생겨난 공동체 질서 속에서 사람들이 결국은 영혼이 텅 비어버린 존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따라서 발도르프 교육운동에 동참하는 이라면 인간학과 교수방법뿐 아니라 사회삼원론의 이상을 공부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방관할 때 발도르프 교육운동은 필연적으로 보수화될 것이고, 자기 아이만 잘 가르치면 된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다.

“교육계에 참여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지체는 그 분야에서 직접 활동하는 사람들 외에 다른 어떤 권력에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수업제도의 행정, 교육과정과 교육목표의 설정은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거나, 혹은 정신생활에서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만 관여해야 한다. 그런 인물들 각자가 수업이나 여타의 정신적 활동과 학제를 위한 행정 간에 그들의 시간을 분배해야 한다. 정신생활의 판단을 아무 편견 없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수업 활동을 하거나 다른 정신적 창조 활동을 하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만 교육제도와 수업제도의 조직과 행정에 필요한 활력이 자라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 <사회 문제의 핵심> 권말부록 ‘자유로운 학교와 삼지성’, 198쪽)

발도르프학교는 교사와 부모, 학생 그리고 지역사회의 협력으로 운영되지만 핵심적인 그룹은 교사회이다. 다시 말해, 발도르프학교는 교사회가 지휘한다. 이는 학생들과 가장 밀접한 사람들,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이 교육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함을 뜻한다. 교사회는 시간표, 퇴학, 감독 등을 포함한 학교 운영의 세부사항을 계획하고, 새로운 교사를 뽑는 일도 주관한다. (원칙적으로 수업을 하지 않는 교사는 교사회의에 참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체제에서는 정책과 판단이 학급 교실의 요구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교사들이 학교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심어준다. 물론 교사회가 모든 일을 다 도맡을 수 없으므로 부모들과 위원회를 꾸리고 이사회를 운영하지만 주도적인 역할은 교사에게 주어진다. 사립학교의 경우 이사회에서 교장을 임명하지만 발도르프학교에서는 교사들이 매년 대표를 선출한다. (토린 핀서, <8년간의 교실여행>, 72쪽)

발도르프학교의 특징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교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교사회가 학교를 공화제 방식으로 이끌어 나가길 원했던 슈타이너의 기본 의도이기도 하다. 교장이 없는 것은 모든 학생이 평등한 것처럼 교사도 서로 평등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30명이라면 30명의 교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교사가 전체를 책임지고 있고, 교장 수준의 책임과 업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발도르프학교에서는 모든 교사가 교장이 해야 할 일을 나누어 맡으며, 교사대표는 매년 새롭게 선출되어 학교운영을 총괄한다. 물론 발도르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학교와는 그 운영 방식에 차이가 있으므로 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때의 원장은,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지 않는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원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기관의 운영은 반드시 현재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발도르프학교의 특수성은 학교의 ‘정신’에 있다. 이것은 학교활동의 정해진 조건들 안에서 성장하는 것으로, 그것 없이는 발도르프학교로 존재할 수 없다. 몇 가지 주요한 특성을 추려내면 다음과 같다. (디트리히 에스테를, <발도르프학교에서 인지학은 무엇인가?>, 76쪽)
- 교육학의 형성과 책임은 교육자에게 있어야 한다.
- 교육자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특성의 다른 규정들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 학교는 동료들 간의 이해 속에서 하나의 자치행정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 교사회 구성원들은 모두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
- 행정적 과제들은 자치적으로 지휘된다.
- 인지학적 인간학, 교육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의 영역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개인의 과제이며 교육자의 과제이다.

발도르프학교는 단지 어린이의 발달 특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공간이 아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사회삼원론의 이상이 펼쳐지는 곳이며, 이에 따른 새로운 조직체계가 실천되는 공간이다. 이런 학교에 수업을 하지 않는 교장이 존재한다거나 교사회를 특정 인물이 장악하는 일 등은 상상하기 어렵다. 발도르프교육과 인지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인간학만큼이나 사회삼원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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