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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은 종교인가 - 엘마르 슈뢰더 (2) 본문
사실 인지학에는 실제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적이다, 라고 할 만한 그런 내용 같은 것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약간 교조화된, 그런 내용 같이 들리는 것들은 있어요. 교조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각 신앙고백들 안에서, 종교들 안에서 이러 이러하다, 라는 내용, 중요한 내용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믿음의 근간 같은 것들을 저작들이나 인지학에 관한 그 내용들을 슈타이너의 이야기를 읽어봐도 그렇게 확인하시기는 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지학에서는 계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종교들에서는 반드시 계명 혹은 내적인 중요한 거룩한 규칙 같은 것들이 있지요. 그리스도교에서는 십계명이 있고요. 이슬람의 경전에서는 정말로 구체적으로 그런 몇 가지 중요한 계율에서 나오는 수많은 행동 규칙, 양식, 규정 같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종교적인 내용, 종교적인 쪽에서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것을 정해놓고 행동의 원칙 같은 걸 정하는 것과는 달리 인지학에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내적인 노력에 의해서 자신이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도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개인이 노력한다, 라는 것이에요. 결국 내용은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뭐냐 하면, 인지학이 도덕을 이야기하지만 직접 도덕에 작용하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라는 거예요.
우리가 인지학이 종교냐 종교가 아니냐, 같으냐 다르냐, 라는 이야기를 할 때 뭔가 대답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문제에서 살짝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것들이 인지학에 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인지학이 자신의 기본적인 기조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몇 가지 얘기를 한번 보죠. 그건 뭐냐 하면은 정신적인 것, 정신세계, 그다음에 또 신적인 것, 이런 얘기들을 사용합니다. 심지어 신의 정신 혹은 신적 정신이라는 단어를 써요. 이 신의 정신 혹은 신적 정신이라는 말은요, 학생들 혹은 유치원이든 어디든 간에 아침열기를 할 때, 예를 들어서 짤막한 격언이나 금구 같은 걸 얘기하잖아요. 선생님이 제시하거나 아이들이 얘기하잖아요. 그때도 그 단어가 등장해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이런 거죠. 신의 정신이 햇볕 안에 그리고 어떤 자연적인 현상들 안에 가득하다,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식의 짤막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학교에서 이야기해왔어요. 그렇다면 이게 일반적인 종교 단체들 혹은 종교적인 집단 안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교조적인 계명이라든지 아니면 뭔가 종교적인 선언 같은 것과 뭐가 다른가, 라는 의문이 생겨요.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살짝 위험하게 느껴지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그리스도, 그리스도 동기 혹은 자극이라는 말,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것이 우리의 인지학적인 혹은 도덕적인 그런 것들 안에 어떤 자극을 주고 그게 어떤 원천, 동기가 되느냐, 행동의 혹은 움직임의 원천이 되느냐라는 그 말이에요. 사실 그리스도라는 말이 담고 있는 혹은 그리스도적 동기 혹은 그리스도라는 자극이라는 말은요, 그리스도교에서 오랫동안 해오던 말이에요.
말하자면 인지학 안에서는, 이렇게 인지학과 관련된 그런 기관이나 아니면 인지학 이야기를 할 때 인지학의 저작들도 마찬가지고, 그 안에서는 늘 그리스도교적인 전통 안에서 이야기하던 내용들에 살짝 기대고 있는 거예요. 거기서 뭔가 이렇게 가져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인지학적인 저작이나 활동 혹은 어떤 내용들 안에 등장하는 단어가 묘한 게 하나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은 ‘영성화한다’는 단어인데 사실 이게 독일어든 서양의 모든 언어에서 ‘영성화한다’는 말은 ‘정신화한다’는 말하고 사실은 동의어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간에 무엇인가를 영성화한다, 이런 얘기를 계속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예술 작품이 하나 있어요. 그림이 있습니다. 회화가 하나 놓여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이야기해요. 인지학 또는 인지학과 관련된 그런 학교나 발도르프학교 이런 데서 설명합니다. 그럼 그때 동원하는 게 뭐냐 하면 그 그림에서 보이는 것, 우리 눈에 이렇게 들어오는 자극들, 우리가 가시적으로 확인하는 것 말고 뭔가 다른 게 있다, 라고 얘기를 해요.
그러면은 제일 먼저 이런 작업을 하죠. 이 그림을 그린 사람, 그 화가의 이력, 생애와 이력에 담겨 있는 내용하고 이 그림의 내용하고 어떻게 뭔가 연결되는 것은 없을까, 라고 이제 분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이 그림과 이력을 포함해서 이 그림의 내용들과 정신적인 어떤 연관성 같은 것은 없을까, 이 그림의 내용하고 정신하고 연결되는 그 어떤 맥락 같은 건 없을까, 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식으로 역사에도 마찬가지고요. 자연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교육학에서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이제 인지학 쪽에서 자연과학, 미술, 교육에 대해서 다 그런 식으로 한다는 거예요. 뭔가 정신 것과의 연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요. 인지학과 종교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좀 오해할 수 있는 살짝 위험한 것 중에 하나가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결정적일 수 있는데요. 인지학을 근간으로 해서 신앙 공동체라고 우리가 이름 지을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생겨났어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거예요.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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