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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학의 거울에 비친 현대 문화 (2)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인지학

정신과학의 거울에 비친 현대 문화 (2)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7. 4. 18:22

그런 다음에는 이제 물질주의적 현상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영혼학(Seelenkunde)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사실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과학은 영혼 생활의 '비정상적인' 현상들, 즉 최면술과 암시, 몽유병을 연구하도록 강요당했다. 이런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는 물질주의적 관점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는 것이 실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해졌다. 사람들이 알아낸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이 현상들은 예전에도 연구되었고 19세기 초까지도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물질주의의 최전성기에 그냥 난처해서 옆으로 제쳐둔 현상들이었다.

 

여기에 다른 것이 더해졌다. 자연연구자 자신이 동물 형태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쌓아 올렸는지, 그래서 인간의 기원에 대한 설명까지도 얼마나 허술한 토대 위에 있는지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운데 한동안 '적응'과 '생존경쟁'이라는 관념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사람들은 그런 표상과 함께 환영을 쫓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었다. 바이스만을 필두로 형성된 학파는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형질들이 유전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물의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생존경쟁' 탓으로 돌리면서 '자연선택의 전능함'을 이야기했다.

 

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일군의 사람들도 등장했다. 이들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들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생존경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생존경쟁'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그런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들은 '자연선택의 무능함'을 이야기했다. 게다가 드 프리스는 근년에 실험을 통해서 생명 형태의 아주 급작스러운 변화(돌연변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동물과 식물의 형태는 오로지 점진적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진화론자들의 확고한 신념도 흔들렸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지어온 건물을 받치고 있던 지반이 발밑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그러잖아도 생각이 있는 연구자들은 이미 그보다 일찍 이러한 지반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젊은 나이에 죽은 롤프는 자신이 1884년에 발표한 저서 <합리적 윤리를 발달시키려는 시도를 겸한 생물학적 문제들>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탐욕을 도입함으로써 비로소 진화론의 생명에 대한 경쟁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생물이 늘 할 수만 있다면 현상 유지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취한다는 사실, 또 그럴 기회만 주어진다면 생물이 지나치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진화론자에게는 생물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곳에서는 생존경쟁이라는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반면에, 나에게 생존경쟁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생물경쟁, 곧 생명의 증식을 위한 경쟁이지, 생존경쟁은 아니다."

 

그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 물질주의적 사상계는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자백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이 물질주의적 사상계에서 시작한다면, 영혼적·정신적 현상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미 완전히 다른 생각들에 기초하여 스스로 우주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자연연구자들이 많이 있다. 식물학자인 라인케의 저작인 <행위로서의 세계>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자연연구자들이 순전히 물질주의적인 표상들 속에서 어려움 없이 육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들이 새로운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하는 말들은 빈약하며, 그 말들은 자신들은 그럭저럭 만족시킬 수 있지만, 세계의 수수께끼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한 자연연구자들은 정신과 영혼의 실재적인 고찰에서 출발하는 방법들에 다가가고자 결심할 수가 없다. 이들은 '신비학'이나 '영지학' 또는 '신지학' 앞에서 극도의 두려움을 갖는다. 이런 점은 예컨대 앞서 인용한 페어보른의 저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과학이 들끓고 있다. 모든 이에게 분명하고 투명해 보였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흐려졌다. 꽤 오랫동안 시험을 거친 상징과 표상들은 최근까지도 가는 데마다 모든 이가 주저 없이 다루고 연구를 했건만 흔들리게 되었고, 불신의 눈길을 받고 있다. 질료 같은 근본개념들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고, 자연연구자들의 발걸음 아래서 가장 단단한 지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외따로 바위처럼 굳게 버티는 문제들도 있는데, 지금껏 이 문제들에 대한 자연과학의 모든 시도, 모든 노력은 박살이 났다. 이를 알고서 낙담한 사람들은 예로부터 고뇌하는 지성이 어떤 출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들의 마지막 도피처가 되어준 신비학의 품에 하는 수 없이 몸을 던진다. 분별 있는 이들은 새로운 상징들을 구하러 다니고, 자신들이 건축을 계속할 수 있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보다시피,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사상가는 표상의 습관으로 인해서 '신비학'을 혼란과 불명확함에 빠진 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사상가는 영혼 생활을 어떻게 표상하는가. 방금 인용한 책의 끝부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선사(先史) 시대의 사람은 죽음을 바라보면서 몸과 영혼은 분리된다는 생각을 했다. 영혼은 몸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존재로 생명을 유지했다. 영혼은 어떠한 안식도 얻지 못했고, 장례식 같은 의식들에 의해 내쫓기지 않으면 유령으로 다시 돌아왔다. 공포와 미신이 인간을 겁주었다. 이러한 관념의 찌꺼기들이 우리 시대에까지 보존되었다. 죽음에 대한, 곧 사후에 닥쳐올 일에 대한 공포는 오늘날에도 널리 퍼져 있다. 심리적 일원론(Psychomonismus)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달라지는가! 개인의 심리적 체험은 일정한 규칙적 관계가 존재하는 때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방해를 받게 되면, 그 즉시 심리적 체험들은 중단된다. 이런 일은 정말 하루 사이에도 쉴 새 없이 일어난다. 죽을 때는 몸의 변화들과 함께 이 관계가 완전하게 중단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어떠한 감각과 표상도, 또 어떠한 사고도, 어떠한 감정도 더는 존속할 수 없다. 개인의 영혼은 죽는다. 그럼에도 그 느낌과 사고와 감정들은 살아남는다. 이것들은 동일한 조건의 관념군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유한한 개인을 넘어서 다른 개인들 속에 계속해서 살아간다. 이것들은 개인에서 개인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민족에서 민족으로 전해진다. 이것들은 영혼의 베틀을 영원히 짜며 작용한다. 이것들은 인류의 정신사를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죽은 뒤에도 정신적 발달의 거대한 사슬에 결합된 고리들로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는 원래의 파도가 가라앉는 동안 그 파도가 일으킨 다른 파도 속에서 파도가 이어지는 것과는 다른 것인가? 인간이 오직 자신이 미친 영향 속에서만 존속한다면, 인간은 실제로 살아남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생명을 지속하는 것은 모든 현상, 심지어 물질의 자연 현상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알다시피, 물질주의적 세계관은 자신의 토대를 허물어야만 했다. 아직까지는 새로운 토대를 놓을 능력이 없다. 물질주의 세계관이 신비학, 신지학, 영지학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그런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화학자인 오스트발트는 몇 년 전 뤼베크에서 열린 자연연구자대회에서 '물질주의의 극복'에 관해 연설했고, 이와 함께 내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자연철학 잡지를 창간했다. 자연과학은 고차적 세계관의 결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또한 어떤 저항도 자연과학에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며, 자연과학은 갈망하는 인간 영혼의 욕구를 반드시 참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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