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 정신과학, 과학의 의미 (2) 본문

인지학

인지학, 정신과학, 과학의 의미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5. 16. 22:09

루돌프 슈타이너 스스로도 여러 차례 밝힌 그의 과업은 무엇보다 초감각적 세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정신세계를 믿음의 영역에서 학문의 영역으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종교에 의해 설명되었던 진리를 이제는 과학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흔히 신비한 세계라고 일컫는 초감각적 세계 또는 정신세계를 신비주의자들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황당하고 공허한 말을 일삼고 이것과 저것을 무분별하게 혼합하며 엄밀하게 탐구하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믿음을 강조하거나 나아가 불안을 조장하여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자 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더 이상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류의 의식이 발전하였고 올바른 노력에  따라 정신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슈타이너가 자신의 인지학을 철학이 아닌 과학, 정확히는 정신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누구든 올바른 방식으로 탐구하면 자신과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연과학에서는 어떠한 현상이든 관찰과 실험이 가능하고,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민주적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진리를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이것은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간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이와 대화를 할 때도 과학적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의 특정 가르침을 따르는 게 아니라 대화의 과정을 관찰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올바른 대화법을 밝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교육 역시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정확히 이해해 간다면 더 나은 교육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정신과학의 결과입니다.
 
슈타이너는 평생 동안 과학자의 태도로 정신과학을 위한 수행의 길과 조건들을 개발하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대해 슈타이너 자서전을 보시면 아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의 인간적인 면모도 살펴볼 수 있으니 꼭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에는 벌써 두 종의 번역본이 있습니다. 다시 정신과학으로 돌아온다면, 감각적 세계는 자연과학이 훌륭하게 밝혀냈지만(물론 일방향이므로 한계가 있지만) 초감각적 세계는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감각적 세계를 탐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확장한 도구들을 사용합니다. 초감각적 세계를 관찰하고 실험할 수 있는 도구는 바로 인간 자신입니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정신과학의 도구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단순히 관찰하고 실험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정신과학적 연구의 결과들을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실재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신과학적 탐구가 현실에서 결실을 맺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인지학을 사이비 종교처럼 여길 수 있다고 말했지요. 발도르프학교나 생명역동농법, 인지학적 건축과 의학, 예술 등은 그 결실입니다.
 


철학이 세계를 관조하는 데 그친다면 과학은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이 이야기는 마르크스가 했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던 마르크스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과학을 경제학과 사회학에 적용시킨 사상가이자 사회과학자였습니다. 슈타이너는 그의 물질주의를 비판하긴 하지만 마르크스의 학문적 업적을 평가절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인정하는 편이었죠. 문제는 과학이 자연세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감각적 세계에만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근대 자연과학의 결과와 방법들을 완전히 인정했습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의 세계뿐 아니라 서양의학의 놀라운 성취 또한 존중했습니다. 백신에 대해서도 슈타이너는 결코 거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인의 면역력과 사회적 관계 등을 중시하긴 했지만 백신에 대해 그는 실용적 접근법을 취합니다. 그는 단 한번도 인지학과 자연과학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철학과 과학의 차이는 그 전제에 있습니다. 과학은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세계의 인과적 힘에 대해 탐구활동을 이어가지만, 철학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의심합니다. 끊임없이 회의하고 질문을 던지는 철학에 고유한 역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제 없이 파고드는 질문들, 그래서 끝이 없이 반복되는 질문들은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담론 중심의 현대철학은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과학자들, 특히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자연을 탐구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믿음의 영역입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과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논쟁을 한다면 유의미한 결과가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세계의 실재를 믿는 이들이며, 철학자들과 달리 세계의 인과적 힘을 찾아내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그런데 정신과학은 이 세계가 물질적 자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세계와 정신세계가 있다고 전제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인지학(人智學)이란 단어를 올바르게 풀이하면 ‘인간에 대한 지혜’가 아니라 ‘인간임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지혜'는 너무나 사전적인 뜻이고, 우주라는 수수께끼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로서 자신이 인간임을 의식하고 깨달음을 찾아가는 길이 바로 인지학입니다. 이 우주가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진 게 아닌 것처럼 인간 역시 신체와 영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슈타이너는 후기에 그리스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강의를 이어나갑니다. 이러한 접근에 대해 당시 그리스도교 집단 중 일부(오늘날의 일부 극우 개신교에 견주어볼 수 있겠습니다)는 슈타이너를 악마화하기도 했습니다. 인지학이 그리스도교를 대체하려 시도한다고 의심했고, 실제로 슈타이너에게 테러를 가해 중독 증세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말년에 슈타이너는 이 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이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리고 10여 년간 유럽의 인지학자들, 예술가들과 함께 세웠던 1차 괴테아눔이 반대 세력에 의해 1922년 마지막 날(New Year's Eve) 불에 타버기도 했지요.
 
오늘날 남아 있는 괴테아눔은 콘크리트로 지은 2차 괴테아눔으로 슈타이너 사후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목재로만 지어졌던 돔 형태의 1차 괴테아눔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슈타이너는 당대에 이해받지 못하는 사상가였던 것입니다. 근래에도 슈타이너를 신비주의나 나치즘과 연결지어 바라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슈타이너의 저서를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1차세계대전의 와중에 전쟁을 벌이던 적국의 인지학자들과 예술가들이 평화를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여 괴테아눔을 지었는지, 그것이 근대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운동의 일환이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슈타이너를 그저 서양의 위대한 신비가 또는 그리스도교를 대체하려는 불온세력으로 오해할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타카하시 이와오와 김지하 선생에 의해 슈타이너를 대신비가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슈타이너가 유언으로 한국을 성배의 민족이라고 예언했다면서요.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려나 당시에 슈타이너를 가장 강하게 공격한 이들은 그리스도교, 특히 구교의 일부 집단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과학은 기독교를 대신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를 이해하는 도구이고자 한다.” 비단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불교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인지학은 새로운 시각을 열어줍니다. 저는 2013년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발도르프교사컨퍼런스 때 일본에서 승려생활을 하는 독일인 스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인지학적 불교를 추구하시는 분이었는데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인지학을 깊이 공부하면서 저 자신도 불경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열리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사람들은 파리 같은 곤충이 거름더미에서 자연발생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구더기는 반드시 파리 성체가 알을 낳아야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지요. 이것이 과학의 힘입니다. 과학이 물질세계뿐 아니라 영혼세계와 정신세계까지 탐구할 수 있다는 점, 이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는다면 인지학이 좀 더 쉽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이어서)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