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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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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 정신과학, 과학의 의미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5. 14. 17:11

인지학, 정신과학, 과학의 의미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이 글은 발도르프교육문화예술연구회에서 '처음 만나는 인지학의 세계'라는 이름으로 강의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입니다. 일부 추가된 내용도 있습니다.)

 

저는 초등교사를 하다가 발도르프학교에서 다시 교사를 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발도르프 교사양성과정은 발도르프교육협회와 발도르프학교교사연합연수를 통해 이수했습니다. 유학은 다녀오지 못했고, 아시아발도르프교사컨퍼런스나 괴테아눔방문연수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국에 나가곤 했습니다. 지금은 슈타이너사상연구소를 운영하며 인지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공립학교에 있을 때 가장 컸던 갈증은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살아 있는 수업방식이었습니다. 당시 전교조에서 참교육실천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수업활동 연수가 있었고, 기회가 되는 한 교육연극이나 글쓰기교육, 놀이교육 등 여러 연수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늘 근본적인 갈증이 있었습니다. 교육철학의 부재라고 해야 할까요. 파울루 프레이리나 존 듀이, 이홍우 교수의 책을 주로 읽었지만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오덕 선생의 책도 즐겨 읽었지만 선생의 글은 그 훌륭함에 비해 하나의 사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민주교육이나 생태교육 등을 해야 한다는 '선언' 정도로 느껴졌지요. 사상적으로는 함석헌 선생이나 다석 류영모 선생의 글이 더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발도르프 교육을 만났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교육운동가들 중에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루돌프 슈타이너에 대해 반감부터 갖고 폄하하는 이들이 있기도 한데, 그런 이들의 글 중에서 발도르프 교육에 대해 뭘 알고 쓴 글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인상비평식으로 쓴 상투적인 글투성이였죠. 저는 이런 태도가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라고 보는데요. 참교육 실천운동이 혁신학교운동을 거쳐 어떤 교육철학을 남겼는지, 늘 고민하는 지점입니다. 왜 우리의 운동은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지, 안타깝고 아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발도르프 교육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실천된 지 20년이 지나는데, 우리 안에서 과연 의미 있는 발전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그 원인을 우리가 발도르프 교육과 인지학에 대해 학문적 토대를 쌓지 못한 데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차츰 더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은 발도르프 교육의 예술적인 수업방식이 먼저였지만 갈증을 풀어준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제가 연구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2013년의 아시아발도르프교사컨퍼런스 때였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그 컨퍼런스가 끝나고 마침 여름에 괴테아눔과 슈투트가르트에서 방문연수를 했는데, 한국에도 인지학연구소와 연구자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다들 어렵다고만 하는 인지학을 집중해서 연구하고 싶은 마음도 컸고, 그 필요성도 아주 컸습니다. 학교를 그만 두고 연구자의 길에 들어서면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굳이 박사과정을 밟아야 하는가, 고민도 있었지만 제가 책만 많이 읽었지, 학문적 훈련을 쌓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제대로 아는 것도 없더군요. 그동안 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었다는 반성과 함께 부끄러움이 컸습니다. 지금도 부끄러움은 여전합니다.

 

오늘 주제가 인지학에 대한 이해인데요, 인지학은 정신과학이라고 슈타이너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일까요? 인지학과 정신과학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과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과학이 무엇인지,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떤 점에서 같은지입니다. 먼저 루돌프 슈타이너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독일 출신의 저널리스트 플로리안 일리스가 쓴 <1913년 세기의 여름>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슈타이너를 찾아간 카프카가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들 가운데 아무도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슈타이너가 답합니다.  “프란츠, 저는 당신을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당시 슈타이너는 유명한 예술가나 문인, 철학자 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많은 사람이 슈타이너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헤르만 헤세도 그중 한 명이었죠.

 

Rudolf Steiner, 1861-1925

 

슈타이너는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깊은 공감으로 만나주었다고 하는데, 어딜 가든 방문객이 많아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사진처럼 깊은 눈으로, 동시에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면 따뜻한 위로를 느꼈다고 하지요. 슈타이너는 아주 어릴 적부터 정신적 능력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이모의 죽음을 알게 된 그가 부모님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가 왔습니다. 어린 슈타이너는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후 그에게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기하학과 수학, 과학, 철학 등이었습니다. 그는 빈 공과대학을 다니며 물리학과 화학, 수학 등을 전공했습니다. 현대적인 과학에 몰두한 이유는 이 시대의 언어가 과학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슈타이너의 평생 과제는 정신적인 일을 과학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근대 과학의 한계를 극복하여 물질적인 자연뿐 아니라 정신이 실재함을 그는 알리고 싶었습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는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뇌수종을 앓았던 아이를 가르쳐 정상적인 학습이 가능하도록 회복시킨 일입니다. 아이의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교육을 일임받을 당시만 해도 아이는 학습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발달부진을 겪었지만, 슈타이너가 최선을 다해 가르친 덕분에 나중에는 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는 후일담이 있긴 하지만요. 이 일화를 통해 슈타이너가 아주 일찍부터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교에서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슈타이너는 바이마르의 괴테 문서보관소에서 10여 년간 일하게 됩니다. 괴테전집출간 작업에서 슈타이너는 괴테의 자연학 분야를 담당했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괴테는 자기 자신을 과학자로 여겼는데요, 라이벌로 뉴턴을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자연을 무기체로 여겼던 뉴턴의 관점을 비판했던 괴테는 자연을 유기체적 존재로 여기고 변형생성이론이라는 독특한 관점을 발달시킵니다. 그의 광물학과 동물학, 식물학, 색채론 등은 상당히 흥미로운 논지를 전개합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괴테의 자연학 저서들을 출간하고 해설하고 머릿말을 쓰는 등의 일에 오랫동안 매진했습니다. 따라서 슈타이너의 작업들에 괴테의 영향이 없을 수 없겠지요. 그가 지었던 정신과학대학 건물의 이름이 괴테아눔이었던 점, 그리고 발도르프학교도 처음에는 괴테주의학교로 이름지으려 했던 점 등을 보더라도 말입니다. 혹자의 평가와 달리 슈타이너는 니체의 영향을 받지 않은 데 비해 괴테의 영향은 상당히 컸습니다. 물론 괴테와는 또 다른 결의 사상을 전개하지만요.

 

바이마르 시절을 끝내고 베를린에 온 슈타이너는 사회주의자들이 세운 노동자학교의 교사가 됩니다. <교사 루돌프 슈타이너를 만나다>라는 책을 보면 당시의 사연이 꽤 자세하게 나옵니다. 어렵게 슈타이너를 교사로 섭외한 노동자학교에서 슈타이너는 역사나 문학 등의 강좌를 성공적으로 이어나갑니다. 20세기 초 많은 노동자가 비록 학교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커서 곳곳에 노동자학교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슈타이너는 매우 인기 있는 교사였지만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까닭에 운영진들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이후의 행보가 놀라운데, 그는 영국에 건너가 신지학협회 회장인 애니 베산트 여사를 만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신지학협회 독일지부 사무총장이 되어 왕성한 강연활동을 이어갑니다.

 

루돌프 슈타이너와 애니 베산트(1907)

신지학(Theosophy)협회는 19세기에 러시아 출신의 헬레나 블라바츠키를 중심으로 설립된 단체로, 모든 종교, 사상, 철학, 과학, 예술 등에서 근본적인 하나의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채널링이 가능했던 인물로 정신존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강의하거나 저술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19세기에는 물질주의 문화가 워낙 막강했고 종교가 쇠락해가던 시기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영성, 신비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서 신지학협회가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관련 저서가 번역돼 나오기도 합니다. 슈타이너는 신지학협회 일을 열정적으로 했지만 인도의 소년 크리슈나무르티를 메시아로 삼아 '동방의 별'이라는 교단을 창시하려는 흐름에 반대해 신지학협회를 탈퇴하게 됩니다. 슈타이너에게 지금 시대는 예수와 같은 메시아가 출현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시대였던 것이죠. 1913년 슈타이너는 신지학협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인지학협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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