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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학의 거울에 비친 현대 문화 (1)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인지학

정신과학의 거울에 비친 현대 문화 (1)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7. 4. 12:55

정신과학의 거울에 비친 현대 문화

 

루돌프 슈타이너

[출처 : <인간과 지구의 발달 - 아카샤 크로닉의 해석>, 한국인지학출판사, 12-24쪽]

 

 

지난 수십 년 동안 과학 발달의 경과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 기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자연연구자가 이른바 현존재의 수수께끼들에 관해 표명하는 견해는 얼마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들린다. 과학적 물질주의에서 출발한 대담한 사고의 소유자들 몇몇이 최신 연구성과를 널리 공표하여, 그것이 과학적 신앙고백이 되어버린 때가 19세기 중반쯤이었다. 당시에 나온, "뇌와 생각의 관계는 간과 쓸개즙의 관계와 거의 같다"는 투박한 발언은 유명한 말이 되었다. 발언의 당사자인 칼 포크트(Karl Vogt)가 그의 <맹신과 과학>뿐 아니라 다른 저술을 통해서 공언한 것은, 물리학자가 시곗바늘의 움직임이 시계의 작동 원리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는 것처럼, 정신 활동 및 영혼 생활도 신경계와 뇌의 작동 원리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극복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때는 루트비히 뷔히너의 <힘과 질료>라는 책이 교양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복음서로 널리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누군가는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탁월한 머리들이 최근에 자연과학의 성과들로부터 받은 강렬한 인상을 통해서 그런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우리는 현미경을 통해서 식물 유기체가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들로 구성된 것을 알게 되었다. 지구 형성에 관한 학문이 지질학은 우리 행성이 오늘날에도 작용하는 것과 동일한 법칙으로 생성되었다고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다윈주의는 순전히 자연적인 방식으로 인류의 기원을 설명한다고 약속했고, 많은 사람에게 다윈주의가 모든 '옛 신념'을 무효로 만들어 줄 것 같은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지식층을 통해 승승장구했다. 

 

이런 사정은 얼마 전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이러한 견해를 추종하는 낙오자들이 1903년 자연연구자대회에서 물질주의 복음을 선포한 라덴부르크처럼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긴 하지만, 이들의 맞은편에는 과학적인 의문들에 관한 더 성숙한 고찰로 전혀 다른 언어에 도달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때마침 <자연과학과 세계관>이란 제목을 단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을 지은이는 막스 페어보른이라는 생리학자로, 해켈(Haeckel) 학파 출신이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실상 우리가 심리작용에 관련된 대뇌피질의 세포와 섬유에서 일어나는 생리학적 작용에 관해 가장 완벽한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또 우리가 마치 시계 톱니바퀴들의 바쁜 움직임을 들여다보듯이 뇌 활동의 작동 원리를 들여다볼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움직이는 원자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어떻게 느낌과 표상이 생겨나는지를 볼 수도 없을 것이고, 감각으로 지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질주의적 견해가 정신적인 과정을 원자 운동으로 환원하는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들 또한 이런 물질주의적 견해가 가진 효용을 아주 분명하게 그려서 보여준다. 곧, 물질주의적 관점으로는 가장 단순한 느낌조차도 원자 운동으로 해명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심리적인 과정들처럼 감각을 통해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이 단지 큰 물체를 가장 작은 부분들로 분해하다 보면 언젠가는 해명될 수 있으리라고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원자는 그래도 여전히 물체이고, 원자들의 어떠한 운동도 신체의 영역과 심리 사이의 간극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 물질주의적 관점은 자연과학적인 연구 가설로는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 나는 구조화학의 성과들만을 가리킨다 - 그 관점은 세계관을 위한 기초로서는 쓸모가 없다. 여기서 물질주의적 관점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철학적 유물론은 그 연사적 소임을 다했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시도는 줄곧 실패해 왔다."

 

19세기 중반쯤에 과학적 진보의 요구로 새로운 복음처럼 선포된 관점에 대해서 20세기 초의 자연연구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특히 19세기의 50, 60, 70년대는 물질주의의 최전성기라 일컬을 만하다. 정신적, 영혼적 현상들을 순수한 기계적 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이 당시에는 참으로 매혹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당시에 물질주의자들은 정신적 세계관의 신봉자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부할 만했다. 자연과학적 연구에서 출발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이들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뷔히너, 포크트, 몰레쇼트 등이 그때까지도 오로지 자연과학적인 전제들만을 토대로 건물을 쌓아올리고 있었다면,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는 1872년에 발표한 <옛 신앙과 새 신앙>에서 자신의 신학적·철학적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신앙고백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선정적인 방식으로 정신생활에 개입했었다. 그는 그 시대의 신학적·철학적 교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이제 인간을 포함한 우주 현상들의 물질주의적 해명이 새로운 복음을 위한, 또 현존재의 새로운 도덕적 이해와 형성을 위한 토대를 놓아야 한다고 감히 천명했다. 인간이 순전히 동물의 후손이라는 것이 새로운 교의가 되려는 것처럼 보였고, 자연을 연구하는 철학자에게는 우리 종의 정신적·영혼적 기원을 고수하는 모든 것이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인류 초창기의 케케묵은 미신으로 여겨졌다.

 

문화사가(文化史家)들이 근대 자연과학 위에 집을 짓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바람에, 미개한 종족들의 풍속과 관점이 연구대상이 되었다. 선사시대의 동물 뼈와 멸정한 식물계의 흔적들처럼 땅에서 원시 문화의 유적들을 통해 문화사가들이 입증하려 한 것은, 지구에 처음 출현한 인간은 고등동물보다 좀 더 발달한 동물이었을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정신적·영혼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완전히 동물의 수준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수준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이런 물질주의적 구조와 일치하는 듯이 보이는 시점이 도래했다. 그리고 당시 관념의 영향으로 인간들은 어느 경건한 물질주의자가 써놓았듯이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과학을 열심히 연구하다 보니 만사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디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나는 인류의 고통을 차차로 완화시키는 일을 돕게 되었다. 나의 판타지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가장 훌륭한 자극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 훌륭한 성구를 통해 구하고자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위안을 나는 더더욱 쉽게 포기할 수 있다. 위대한 희곡의 줄거리를 따라가거나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별들로 여행을 하고 선사시대의 풍경 사이를 돌아다닐 때, 또 산꼭대기에서 자연의 장엄함에 경탄하거나 소리와 색채로 이루어진 인간의 예술을 숭배할 때, 이럴 때 내가 고양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럴 때에도 여전히 내 이성에 모순되는 것이 나에게 필요할까? 그토록 많은 신앙인을 괴롭히는 죽음의 공포를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 삶이 없었듯이, 내 몸이 허물어질 때 내 삶도 끝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연옥과 지옥의 고통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자식을 애정으로 품어주는 가없는 자연의 세계로 돌아간다. 내 인생은 헛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진 힘을 잘 사용했다. 모든 것은 더 좋고 더 아름답게 될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 나는 지구를 떠난다!"

 

(<신앙에서 지식으로>에서 인용. 이 책에서 쿠노 프라이당크는 삶에 의거하여 교훈적인 발달과정을 충실하게 기술한다.)

 

앞서 말한 시기에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옹호자들에게 작용했던 강박관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최고의 과학적 사고를 유지하고자 했던 이들은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1876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자연연구자대회에서 한 걸출한 자연연구자가 처음으로 자연과학적 물질주의에 항변해서 유명해졌는데, 그것은 뒤 브와-레이몽의 '이그노라비스무스(Ignorabismus,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 연설'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연과학적 물질주의가 사실상 가장 작은 물질 입자들의 운동 외에는 아무것도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고, 자연과학적 물질주의자들에게 그런 현실에 만족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런 능력으로는 정신적·영혼적 과정을 해명하는 데 조금의 성과도 내지 못함을 강조했다. 누구든 뒤 브와-레이몽의 이러한 진술에 대해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가질 수 있을 테지만, 이러한 진술이 물질주의적 세계 해석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진술은 자연연구자라면 누구나 물질주의적인 세계 해석에서 갈팡질팡 헤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물질주의적 세계 해석은 영혼 생활에 관한 한 겸손히 의견을 표명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물질주의적 세계 해석은 자신의 '무지(불가지론)'을 확실히 인정했다. 물론 물질주의적 세계 해석은 계속해서 '과학적'일 것이며 지식의 다른 원천에는 호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자신이 가진 수단으로 고차적인 세계관에 오르려 하지도 않았다. (최근에 자연연구자 라울 프랑세는 고차적인  세계관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성과들로는 충분치 못함을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노력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논의해 보고 싶다.)

 

 

* 약간의 수정과 임의적인 줄바꿈이 있습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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