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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이라도 사랑을 주고 싶어 - 서천석 본문
중2병이라도 사랑을 주고 싶어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
시사IN 2014.12.15
여기 모인 분들의 자녀 연령대부터 묻고 싶다. 자녀가 초등학생인 분? 중학생인 분? (여기저기서 손들자)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분이 더 많은 것 같다. 오늘 강좌에 왜 오셨나? 미리 대비하러 오셨나? 요즘은 초등 2학년 아이를 둔 부모조차 “우리 애가 사춘기인가 봐요. 너무 말을 안 들어요” 하신다(웃음). 사춘기 부모를 상대로 한 조사 가운데 “10대인 자녀를 건물 밖으로 내던지고픈 충동을 느낀 일이 있다”에 ‘예/아니요’ 답하는 문항이 있는데, ‘예’를 체크하는 부모가 굉장히 많다(웃음). 부모 처지에서는 아이가 왠지 말을 안 듣기 시작하면 그걸 사춘기라 여기는 듯하다. 더 심해지면 ‘중2병’이라는 식이다.
사춘기의 본래 뜻이 뭘까. 한자로 ‘思春期’이니 ‘봄을 생각하는 시기’ ‘봄 타는 시기’라는 뜻일까? ‘춘(春)’이라는 게 본래 성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성호르몬 분비가 증가하면서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이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시기가 사춘기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면서 그 의미가 좀 변하고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열다섯 살이면 성인이 되어 결혼할 수 있었다. 성적 관계를 맺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만주에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이들의 평균 나이가 15~16세였다. 지금 나이로 보면 중2 무렵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이분들이 중2병에 걸려 독립운동 하러 떠났던 셈이다(웃음).
과거에는 이처럼 열다섯 살만 돼도 독립적인 삶을 설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2는커녕 대학원생도 인생을 어떻게 살지, 방향이 잡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독립적인 성인으로 이 사회에서 온전히 기능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이 과거에 비해 크게 늘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명화될수록 아이를 키우고 길러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훨씬 길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의 부담이 굉장히 늘어났다. 200만 년 가까이 프로그래밍된 인류 유전자에 따라 아이의 몸은 열다섯 살이면 성인으로서 기능하고 싶어 하는데, 부모 처지에선 10년 가까이 이를 억지로 막아야 하는 기간이 생긴 셈이다. 이 같은 갭(격차)이 부모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화가 난 상태가 오래간다”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한다.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이러니 부모들은 더 모르겠다. 도대체 아이 말을 어디까지 들어줘야 하는 건지. 이처럼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사춘기 아이들의 특징이다. 이는 사춘기 뇌 발달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2001년 미국 샌타나 고교에서 벌어진 10대 총기난사 사건 이후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펼쳐졌다. 그 결과 10대의 뇌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며, 특히 올바른 판단과 충동 억제에 결정적 구실을 하는 전전두엽 피질이 미성숙한 상태임이 밝혀졌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이나 텔레비전 시청을 멈추려면 굉장한 자제력이 필요하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이젠 책임감이 생길 나이가 됐다고 얼른 믿어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전전두엽이 성숙하지 않으면 미래를 내다보면서 현재를 조절하는 자제력이 발휘되기 어렵다. 부모가 이걸 알고 ‘지금 우리 아이의 발달 수준은 이 정도구나’ 계속 테스트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게 사춘기 양육의 핵심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제대로 된 규칙을 가르쳐주고 엄하게 지도해야 할 아동기와는 다르다. 나는 ‘아동기에는 부모가 효과적으로 이겨야 하고, 사춘기에는 부모가 효과적으로 져야 한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사춘기 부모는 질 수밖에 없다. 그게 운명이다. 아이는 제멋대로 살게 돼 있다. 다만 제멋대로 살기 시작하는 시점이 다를 뿐이다. 요즘은 코칭 기술이 발달해 자녀가 서른 살 넘어서까지 잘 관리해 키우는 부모들도 많은데, 이럴 경우 자녀가 결혼하고서야 뒤늦게 사춘기를 겪느라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자기 인생을 살고 싶은 욕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같은 독립 욕구를 인정하고 아이에게 일단 기회를 주되, 아이가 성공하면 뒤로 물러나고, 실패하면 아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수습하면서 끌고 나가는 것이 이 시기 부모가 할 일이다.
김연아 선수 인터뷰를 보면, 김 선수도 중학생 시절 엄마와 계속 다퉜다고 한다. 선수를 그만두기로 엄마와 합의도 여러 번 했단다. 그때 그만뒀다면 지금의 김연아 선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포인트. 사춘기 아이의 말을 그대로 좇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순간의 변덕일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아이가 무슨 말을 하면 “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해주고, 또 다른 말을 하면 “아,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해줄 필요가 있다. 조삼모사라고? 나는 〈장자〉가 말하는 조삼모사에 굉장히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비유로 조삼모사가 많이 쓰이는데, 그게 단순치가 않다.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가 싫다면 다시 ‘아침에 5개, 저녁에 2개’를 제시하면서 상대로 하여금 직접 그 결과를 느껴 판단의 주인이 되게끔 해주자는 게 장자의 뜻인 듯하다. 사춘기 아이들을 키울 때 굉장히 많은 영감을 주는 부분이다.
아이의 거짓말은 제대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
전두엽이 발달하면 또 하나 문제가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굉장히 교묘한 방식으로,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게끔 거짓말을 한다. 농담도 는다. 부모들이 거짓말을 정말 싫어하는데,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사춘기 아이들이 거짓말이나 농담을 시작하면 오히려 좋아한다.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고 있구나 해서. 남자의 경우 이렇게 전두엽 발달이 완료되는 시기를 학계에서는 23~25세 무렵으로 본다. 우리가 흔히 “군대 가면 철든다”라고 하는데, 외국에서는 군대 안 다녀와도 철이 든다(웃음). 여자들은 좀 더 빨라서 18~21세 무렵이면 철이 든다.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특유의 사고는 자아중심성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데, 저 혼자 자신이 세계의 중심인 양 착각한다. 이른바 ‘개인적 우화(寓話)’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청소년기 아이들은 자기가 굉장히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이며,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 세계는 다른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랑은 언젠가 다 식게 돼 있어”라는 식으로 말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우리 사랑은 달라” 하면서(웃음).
청소년기 자아중심성이 지닌 또 하나의 속성은 ‘상상적 청중’이다. 과장된 자의식으로 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아이는 “오늘 립글로스를 바르지 않고 나왔더니 사람들이 나만 쳐다본다”라며 전전긍긍한다. 엄마가 지하철에서 뭔가 먹고 있으면 “창피하게 뭐 하는 거야? 사람들이 다 보잖아” 하면서 화를 낸다. 실은 아무도 보지 않는데. 상상적 청중 앞에서 자신의 위신이 손상되는 걸 못 견디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논쟁을 좋아하고, 우유부단하며, 환경보호 시위를 하면서 쓰레기를 버리는 것 같은 위선적 행동을 하는 것 또한 이 시기 아이들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사춘기는 누구나 세게 겪을까? 내가 보면, 사춘기 이전에 부모·자녀 관계에 문제가 있었을수록 사춘기를 세게 겪는 경향이 있다. 사춘기 이전의 관계가 사춘기의 질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부모·자녀 간에 소통이 잘되고 서로 아껴주는 관계였을 경우 사춘기를 수월하게 넘기는 편이다. 개중에는 “저는 그전까지만 해도 아이와 관계가 너무 좋았는데, 아이가 친구를 잘못 만나더니 그때부터 이상해졌다”라고 호소하는 분도 있다. 그건 엄마 생각일 뿐이다. 엄마가 보기엔 말을 잘 듣는 것 같았겠지만, 아이 처지에선 힘이 없어 겨우 버텨오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힘이 좀 생겼다 싶어지니 꿈틀해본 것뿐이다. 그런데 의외로 엄마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 이게 먹히네’ 싶어 점점 더 세게 나가는 거고.
이때 부모가 대처할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더 세게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다시 기가 죽어 몇 년은 더 조용히 버틸 수 있다. 물론 언젠가는 죗값을 치르게 되겠지만(웃음). 또 하나는 부모가 (개그 톤으로)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이제 네가 네 주장을 할 나이가 됐구나” 하면서 바로 뒤로 물러나는 거다. 둘의 공통점은 부모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누르는 것도, 수용하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반면 당황해 뒷걸음질하면서 소리 빽빽 지르며 아이를 잡으려 드는데 실은 잡지도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 집이 카오스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 거다.
물론 부모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다. ‘여기서 아이를 못 잡으면 어떡하나, 아이 인생이 엉망이 될지도 모르는데’ 하는. 잘 보면 부모가 처한 시대적 상황이라는 게 있다. 무엇보다 부모의 권위는 사라졌으되 권위주의는 남아 있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부모에게 굉장한 권위가 있었다. 부모한테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땅 한 뙈기라도 얻어 부치며 먹고살 수 있었으니까. 지금도 청담동·압구정동 아이들은 부모 말을 잘 듣는 편이다. 부모한테 나올 게 많으니까(웃음). 반면 우리처럼 평범한 중산층 부모는 물려줄 게 별로 없다. 그러면서 “어디 감히 부모한테 대들어?” 하는 식으로 권위주의는 행사하려 든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겐 그저 ‘짜증나는 꼰대’로 여겨질 뿐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를 함께 기르는 공동체는 붕괴된 상태다. 고립된 양육은 한계가 많다. 그런데 OECD 34개국 중 한국의 공동체 생활지수는 33위 수준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사실상 불가능한 역할을 지금 떠맡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해보니까 되네’ 할 수 있도록 도와라
미래도 불안하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도 “당신 아이가 고등학교 나와서 일 없이 놀면 어떡할래?”라는 질문 앞에서는 막막해질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 절반 수준에 못 미치는 나라, 비정규직 좀 나아지게 하자고 했더니 정규직 해고를 쉽게 함으로써 전체를 하향 평준화시키자는 사회에서 답을 찾기는 어렵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유럽 선진국의 경우 어느 정도 복지체계가 갖춰져 있다. 계층화도 상당 부분 진행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다들 ‘인(in)서울’ 대학 진학을 목표로 의자 빼앗기 게임과 비슷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부모로서 아이의 가능성을 인정해줄 탈출구가 너무 없는 거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멸시받지 않기,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해주기다. 믿고 따를 사람이 필요하고, 스스로 내적인 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스스로 헌신할 대상을 찾으면 아이는 어른이 된다. 여러 신화나 설화를 봐도 사람은 결국 이런 단계를 밟아 성장한다. 그런데 공부를 잘해야만 의미를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공부 못하는 대다수 아이들은 갈 데가 없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안 될 것 같았는데 해보니까 되네’ 하고 느껴보는 순간이다.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힘이 있음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끔 부모가 도와야 한다.
사춘기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들에게 내가 자주 들려드리는 문구 하나를 소개하겠다. “부모는 나뭇가지와 같다. 아이는 새와 같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새는 가지에 앉지 않는다. 도망간다. 나뭇가지가 자리를 지키면 지친 새는 스스로 와서 앉는다. ‘어딜 돌아다니다 얄밉게 이제 와?’ 나무는 이렇게 따지지 않는다.” 세상은 험한 곳이다. 부모만큼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아이들도 안다. 그러니 당장은 으르렁대도 언젠가는 돌아와 의지하게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많은 부모들이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다” “내가 어쩌다 널 낳아가지고” 하면서 아이를 밀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다시 다가가고 싶어도 못한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결과 요즘 부모 세대는 자녀가 성인이 된 뒤로도 30~40년을 어울려 살게 될 확률이 크다. 자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 것이냐, 아니면 명절에나 만나 물물교환을 하는 관계로 살 것이냐. 어쩌면 이에 따라 노후 삶의 질도 크게 달라질지 모른다.
정리·김은남 기자
[출처: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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