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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7) 본문

명상수련/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7)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7. 11. 15. 10:20

깨달음의 알속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옮김



장미와 썩정이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느니라.”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불결하거나 순결하거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마음으로 지어낸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갓 꺾어 꽃병에 담은 아름다운 장미는 깨끗합니다. 그 향기는 무척 싱그럽고 산뜻합니다. 그것은 깨끗함이라는 관념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 반대편에 썩정이가 있습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것이 바로 썩정이입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저 오륙일 동안 장미를 더 자세히 살핀다면 그 장미가 썩정이의 일부가 된다는 걸 알 것입니다. 닷새 동안이나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만 해도 지금 즉시 알 수 있습니다. 또 당신이 만일 썩정이를 들여다본다면 그것의 내용물이 몇 달 안 돼 먹음직스러운 채소나 아름다운 장미로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타고난 정원사인데다 보살의 눈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장미를 보면서 썩정이를 볼 수 있고, 썩정이를 보면서 장미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장미와 썩정이는 더불어 있습니다. 장미가 없으면 썩정이를 얻을 수 없고, 썩정이 없이는 장미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둘은 서로를 아주 많이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장미와 썩정이는 똑같습니다. 썩정이는 장미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더러움과 깨끗함이라는 관념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더불어 있음에 대한 개념으로 우리는 돌아가게 됩니다.


잡아함경을 보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아주 짧게 쓴 부분이 있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이해하기도 아주 쉬우며, 또한 굉장히 깊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이러하므로 저것은 저러하다.” 이것이 바로 불교 사상의 핵심입니다.

 


필리핀의 마닐라 시에는 어린 창녀가 많습니다. 열네댓 살밖에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몹시 불행한 소녀들입니다. 그들은 창녀가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가난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여성들은 행상과 같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립니다. 돈을 벌어 가족들에게 다시 보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마닐라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베트남의 호치민 시와 뉴욕 시, 파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골보다 도시에서 돈을 벌기 더 쉽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나이 어린 여성들이 가족을 돕기 위해 도시로 가야겠다고 마음먹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작 몇 주가 지나면, 교활한 자가 나타나 돈을 백배는 더 벌 수 있다고 꾀입니다. 소녀는 너무 어리고 또 삶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기에 그걸 받아들여 창녀가 됩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자신이 더럽고 불결하다고 느끼며 이 때문에 커다란 괴로움에 빠지고 맙니다. 예쁜 옷을 입고 좋은 가정이 있는 다른 여자애들을 볼 때 비참한 감정에 빠지게 되고, 그러한 불결한 느낌이 그를 마음의 지옥으로 이끌게 됩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아발로키타를 만날 수 있다면, 아발로키타는 그에게 자기 자신과 전체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라고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건 다른 이들이 저러하기 때문이란 걸 보라고요. 이것이 이러하므로 저것은 저러하다.” 따라서 좋은 가정이 있기에 괜찮은 여자애로 불리는 것은 자랑할 게 못 됩니다. 왜냐면 그들의 삶이 그러하기에 다른 여자애들은 이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깨끗한 손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닐라의 소녀들이 그러한 것은 우리들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어린 창녀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창녀 아닌 이들의 삶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창녀 아닌 이들과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을 보고 있으면 창녀의 삶이 보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생기고, 저것으로 인해 이것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 이제 부와 빈곤을 살펴봅시다. 부유한 사회는 더불어 있는 모든 것을 착취합니다. 한 사회의 부는 다른 사회 집단의 빈곤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러하므로 저것은 저러하다.” 부는 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지고, 빈곤은 빈곤 아닌 것들로 이루어집니다. 이전에 살펴본 종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관념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입니다. 그게 참입니다. 우리는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습니다. 아발로키타는 어린 창녀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의 딸아, 네 자신을 들여다보렴. 그러면 모든 게 보일 거야. 다른 사람들이 저렇기 때문에 네가 이러한 거란다. 너에게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 부디 괴로워하지 말아다오.” 오직 더불어 있음의 눈으로 볼 때 그 소녀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무엇이 그의 해방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한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구속시킵니다. 오로지 선만을 원하고, 악은 모조리 사라지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선이 선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잊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분별심 없이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멋진 나뭇가지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 끝을 왼쪽으로, 다른 쪽 끝을 오른쪽으로 구별하는 순간 말썽이 생깁니다. 우리가 왼쪽만을 원하고 오른쪽은 원치 않는다면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세요), 오른쪽은 말썽거리가 됩니다. 우파가 없다면 어떻게 당신이 좌파일 수 있겠어요? 제가 이 나뭇가지의 오른쪽을 원치 않고 오직 왼쪽만을 원한다고 칩시다. 그래서 반으로 부러트려 오른쪽을 던져버린다면요. 하지만 원치 않는 반쪽을 던지자마자 남아 있는 한쪽 끝이 또 다른 (새로운) 오른쪽이 될 것입니다. 왼쪽이 있는 한 오른쪽도 늘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다시 부러트린다 해도 저는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반 토막이 된 나뭇가지를 또 부러트린다 해도 오른쪽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선과 악도 똑같이 여기면 됩니다. 당신이 오직 선일 수만은 없습니다. 악을 없애버릴 수도 없습니다. 악이 있기에 선이 있는 거니까요. 그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이 영웅에 관한 연극을 만들려 한다면, 그 영웅을 영웅답게 하기 위해 악당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붓다는 악역을 맡아 줄 마라가 필요했고, 그래서 붓다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붓다는 종이만큼이나 텅 비어 있습니다. 붓다는 붓다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처럼 붓다 아닌 이들이 없다면 어떻게 붓다가 있을 수 있겠어요? 우파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누군가를 좌파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전통에 따라 저는 부처님께 절을 드릴 때마다 이 게송을 읊조립니다.

 

절하며 경의를 드리는 이,

절과 공경을 받는 이,

둘 모두 비어 있기에

승가는 완전하다

 

이 말은 결코 오만한 게 아닙니다. 제가 비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부처님께 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이 비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제 절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과 저는 더불어 있습니다. 부처는 저와 같이 부처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처와 같이 저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경의를 표하는 데에 하는 이와 받는 이 모두 비어 있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 없이 어떻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써 왔습니다. 악은 어떻게 해서 존재할 수 있는 걸까요? 아마 서양식 사고로는 이해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불이不二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도 아닙니다. 선이라는 관념이 생기는 순간 악도 생깁니다. 부처님 역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마라를 필요로 했습니다.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당신이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당신은, 썩정이가 단지 장미를 위해 존재한다는 식으로 분별하진 못할 것입니다. 둘 모두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당신이 온전한 나뭇가지를 얻길 원한다면 왼쪽과 오른쪽이 다 필요합니다. 극단을 택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한쪽 끝을 택한다면, 당신은 실재의 절반을 없애려 애쓰는 것이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미합중국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을 악의 축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일부 미국인은 다른 반쪽 없이 자기들끼리만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왼쪽 없이 오른쪽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과 똑같습니다. 이와 아주 비슷한 정서가 소련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은 행복한 세상을 위해서는 악한 쪽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건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미국을 깊이 들여다보면 소련이 보입니다. 또한 소련을 깊이 들여다보면 미국이 보입니다. 장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썩정이가 보이고, 썩정이를 깊이 들여다보면 장미가 보이는 것처럼요.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양쪽은 모두 장미가 되기를 열망하고 다른 쪽을 썩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원한다면 당신은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생존이란 인류 전체의 생존을 뜻하는 것이지, 그 일부만을 위한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문제가 미국과 소련 사이만의 것이 아니라 북반구와 남반구에도 해당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이 생존할 수 없다면 북은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3세계 국가들이 부채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북에 사는 당신 역시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당신이 제3세계를 돕지 않는다면 당신의 안녕은 끝내 이어지지 못할 것이고, 당신의 생활방식 또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닥친 현실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악한 쪽을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선한 쪽이라 여기고 다른 이들을 악한 쪽이라 생각하기는 쉽니다. 그러나 부는 빈곤으로 이루어지고, 빈곤은 부로 이루어집니다. 이야말로 실재에 대한 아주 정확한 인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더 멀리 내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소련의 인민과 미국의 시민은 모두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통계 따위로 사람에 대해 배우거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을 정부 관료나 정치학자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직접 해야 합니다. 당신이 소련 인민의 두려움과 꿈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두려움과 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진실을 꿰뚫어 보는 힘만이 우리 모두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따로 서 있지 않습니다. 서로 수많은 관계로 뒤얽혀 있습니다. 장미가 곧 썩정이이고, 창녀 아닌 이가 바로 창녀입니다. 부유한 남성이 곧 가난한 여성이며, 불교도가 바로 비-불교도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있기에 비-불교도가 불교도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있음의 본질을 깨달을 때 비로소 어린 창녀는 스스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온우주의 열매를 자신이 맺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게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 소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아픔과 함께 온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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