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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6) 본문

명상수련/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깨달음의 알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6)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7. 11. 15. 10:18

깨달음의 알속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해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옮김



행복한 지속

 

 

사리푸트라여. 모든 다르마는 비어 있으므로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다르마(Dharma)는 존재를 뜻합니다. 사람이 곧 다르마입니다. 나무 역시 다르마이며, 구름도 곧 다르마입니다. 햇빛 또한 다르마입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다르마입니다. 그래서 모든 다르마가 비어 있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의 본질은 비어 있음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거기엔 큰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불가능하다는 걸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발로키타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을 목격합니다. 누군가 태어나면 그를 위해 출생증명서가 출력됩니다. 나중에 그가 죽을 때는 사망증명서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증명서들은 태어남과 죽음의 존재를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아발로키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말씀이 어떻게 해서 참인지 알기 위해 좀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당신의 생일生日, 즉 당신이 태어난 날이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그날 전에도 당신은 이미 존재했을까요? 태어나기 전에도 당신은 이미 거기에 있었을까요?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태어난다는 것은 당신이 무로부터 어떤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제 질문은, ‘태어나기 전에도 당신은 이미 거기에 있었는지입니다.


암탉이 알을 낳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암탉이 알을 낳기 전에도 알은 이미 거기에 있었을까요? , 물론 그렇습니다. 암탉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당신 역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속에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당신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어머니 뱃속에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어떤 것이 이미 거기에 있다면 태어나는 것은 굳이 필요 없는 일입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무로부터 어떤 것이 된다는 뜻이니까요. 당신이 이미 어떤 존재로 거기 있다면, 태어난다는 게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그래서 이른바 생일이라 하는 날은 사실 지속일입니다. 다음에는 생일 축하합니다대신 지속일 축하합니다로 바꿔 말해도 좋겠습니다. 저는 그게 더 나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잉태될 때인 열 달 전으로 돌아가 본다면, 우리는 출생증명서에 더 좋은 날짜를 적어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는 당신이 태어났을 때 이미 한 살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 자궁 안에 잉태되었을 때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며, 그 날을 출생증명서에도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날 전에도 당신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만약 당신이 있었습니다라고 한다면 제 생각에 당신은 옳게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잉태되기 전에 이미 당신은, 반은 아버지 반은 어머니로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로부터는 그 어떤 것도 생겨날 수 없으니까요. 무로부터 생긴 것을 당신은 단 한 개라도 말할 수 있습니까? 구름이요? 구름이 무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구름이 되기 전에 그것은 물이었습니다. 흐르는 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는 아닙니다. 동의하십니까?


우리는 무언가가 태어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지속이 있을 뿐입니다. 좀 더 멀리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더 윗대의 선조들이 있기에 당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저는 전생에 제가 구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시가 아니라 과학입니다. 제가 왜 구름이었던 전생을 말씀드렸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건 아직도 제가 구름이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없다면 저는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구름이며 강이고 바람입니다. 따라서 저는 과거에도 구름이고 강이며 바람이었음을 압니다. 또한 저는 바위였습니다. 물속의 미네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윤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 생명체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공기, 햇빛, , 곰팡이, 그리고 풀과 나무였으며, 단세포 생물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전생에 한 그루 나무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한 마리 물고기였고 사슴이기도 했습니다. 이건 미신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구름이며 사슴이었고, 새이자 물고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생뿐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일입니다.


태어남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태어날 수 없으며 죽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발로키타가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은 구름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이란 어떤 것이 완전한 무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어떤 것을 무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에 나눴던 종이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종이를 성냥불로 태워 없앨 수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종이를 태웠다 해도 그것 중 일부는 연기가 될 테고, 연기는 피어오를 뿐 사라지지 않습니다. 종이가 타면서 나온 열은 우주 속으로 퍼져 다른 존재들에 스며들 것이므로, 그 열은 종이의 다음 생이 됩니다. 재는 흙과 다른 종이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것의 내생은 동시에 구름과 장미가 될지도 모릅니다. 종이는 결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아주 신중하고 주의 깊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다른 존재들의 실상을 깨우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종이를 무로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며 당신과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한 선사는 제자에게 이런 화두를 던졌다고 합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네 진면목眞面目은 무엇이냐?” 이것은 나를 알아가는 여행으로의 초대입니다. 당신이 잘 해낸다면 아마 전생뿐 아니라 내생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철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 주십시오. 사실을 얘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손을 보면서 이렇게 자문해 보세요. “내 손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제 손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저는 아주 오래 전, 30만년보다 더 오래 전부터 여기에 있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직 지속할 뿐입니다. 죽은 적이 결코 없습니다. 만약 제가 죽은 적이 있다면, 제 손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프랑스의 과학자 라부아지에는 그 어떤 것도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반야심경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동시대 최고의 과학자라 해도 작디작은 먼지 한 점, 또는 전자 하나조차 없애버릴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 에너지 형태에서 다른 에너지 형태로 바뀔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것도 절대 무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먼지 한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은 먼지로부터 와서 먼지로 돌아간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리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아무도 먼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사람이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인 반면 먼지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차별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도 정작 먼지 한 점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그것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먼지 한 점 속의 원자 하나, 그 원자 속의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초당 18만 마일(1mile = 1.6km)의 속도로 돌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습니까? 먼지 한 점으로 돌아간다면 정말 흥미진진한 모험이 펼쳐질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먼지 한 점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이란 먼지로 돌아가는 과정이라 말하며 인간 존재를 이해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과 고작 2,30년을 지내놓고 그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옆에 앉히고 운전하면서도 딴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 사람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오만불손한 짓입니까! 우리 곁에 앉아 있는 이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아발로키타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의 머리카락 하나를 통해서도 온우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머리에 난 머리카락 하나가 바로 궁극의 진실을 여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 먼지 한 점이 곧 하늘왕국이자 정토세계인 셈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과 먼지 한 점, 그리고 삼라만상이 더불어 있음을 알아차릴 때, 당신은 이 역시 그러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겸손해야 합니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앎의 시작이다라는 중국 속담처럼요.


 

어느 가을날 한 공원에서 저는 하트 모양의 아주 작고 아름다운 나뭇잎 하나를 고요히 마음모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나뭇잎은 붉은 색에 가까웠고, 곧 떨어질 듯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나뭇잎 곁에 서서 많은 걸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나뭇잎이 그 나무의 어머니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무가 어머니이고 나뭇잎들은 그 자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 나뭇잎을 보았을 때 그는 나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수액樹液은 뿌리에서 빨아들인 물과 미네랄이지만 나무를 먹여 살리기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무는 잎들에게도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나뭇잎들은 미완의 수액을 완성하는 데에 책임을 지고 햇빛과 공기의 도움을 받아 나무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줍니다. 그렇기에 나뭇잎들 역시 나무에게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뭇잎과 나무가 줄기로 이어져 있는 동안은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기 쉽습니다.


우리에겐 더 이상 어머니와 이어진 줄기가 없지만,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에는 아주 긴 줄기, 즉 탯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산소와 영양분이 탯줄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불행히도 우리가 생일이라고 부르는 날, 탯줄은 잘리고 우리는 따로 떨어져 나왔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오해입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우리들 어머니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다른 여러 어머니들과도 그렇습니다. 지구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대지와 엄청나게 많은 줄기로 이어져 있습니다. 구름과도 줄기가 이어져 있습니다. 구름이 없다면 우리가 마실 물 역시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몸은 적어도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구름과 우리 사이에는 실제로 줄기가 있는 겁니다. 강과 숲과 벌목꾼과 농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만물과 이어진 줄기가 있기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는 게 보입니까? 당신이 거기 없다면 저 또한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해도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볼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철학이 아닙니다. 당신은 진실로 봐야만 합니다.


저는 나뭇잎에게 두렵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왜냐면 가을이었고 다른 나뭇잎들은 이미 다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뭇잎이 말했습니다. “아니, 난 봄과 여름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어. 나무를 먹여 살리느라 고되게 일했거든. 그리고 내 많은 것들은 이 나무 안에 있지. 그러니 지금 모습이 내 전부라고는 말하지 마. 잎으로서의 모습은 오로지 내 작은 일부니까. 나는 나무 전체야. 난 이미 나무 안에 있음을 알고 있거든. 흙으로 돌아가서도 난 나무를 먹여 살리는 일을 계속 할 거야. 그게 바로 내가 걱정하지 않는 이유지. 이 나뭇가지를 떠나 땅으로 떨어지면 나무에게 손 흔들며 이렇게 말할래. 난 이제 곧 너에게 돌아갈 거야.”


불현듯 그러한 지혜가 반야심경의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삶 그 자체를 봐야만 합니다. 나뭇잎만의 삶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나뭇잎과 나무의 속삶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삶은 다만 삶 그 자체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제 속에서, 그리고 나무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 바람이 한 차례 분 뒤, 나뭇잎이 나뭇가지를 떠나 즐겁게 춤추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뭇잎은 자기가 이미 나무 속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나뭇잎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나뭇잎은 태어남도 죽음도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 역시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구름은 비가 됩니다. 비로 쏟아져 노래 부르며 미시시피 강이나 아마존 강, 또는 메콩 강의 일부가 되고, 채소 위로 떨어져 나중에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정말 흥미진진한 모험입니다. 구름은 땅에 떨어진 뒤에 큰 바다로 흘러들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름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사람들만 두려워합니다.


바다 위의 파도도 시작과 끝, 즉 태어남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발로키타는 우리에게 파도가 비어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파도는 바닷물로 가득 차 있지만 개별적 속성이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가 있기에 파도라는 꼴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라는 자기의 꼴만을 알고 있다면 파도는 태어남과 죽음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파도가 만일 자기가 바로 바다이며 바다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면 생사生死로부터 해방될 겁니다. 각각의 파도는 태어나고 죽어간다고도 할 수 있지만 바다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만화경을 갖고 놀길 좋아했습니다. 만화경을 살짝 돌리면 멋진 광경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매순간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한 모습이 사라지고 다른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처음 본 모습이 사라졌을 때 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아무것도 잃지 않았단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멋진 모습이 항상 뒤따랐습니다. 당신이 만일 바다의 일부인 파도가 되어 세상을 바다의 눈으로 보게 된다면, 당신은 출렁출렁 오르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생각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관념의 만족을 위해 제 말을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오. 당신은 직접 참여하고 맛보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명상으로도 가능하겠지만 명상실에서보다는 날마다의 삶 속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집을 청소하는 동안, 산책을 하는 동안 눈에 띄는 모든 것의 본바탕이 비어 있음을 보도록 노력하십시오. 비어 있음은 밝고 희망찬 낱말입니다. 결코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아발로키타는,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깊은 선정 속에서 비어 있음의 본성을 깨닫고 마침내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을 뛰어넘으셨습니다. 저는 웃음을 머금은 채 아주 평화롭게 죽어간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태어남과 죽음이 큰 바다의 표면에 일렁이는 파도에 지나지 않음을, 만화경 속 광경들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구름과 바다와 파도와 나뭇잎과 만화경, 즉 우주만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수없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주의를 기울여 깊이 살펴본다면 더불어 있음의 신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태어남과 죽음의 두려움에 붙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태어남과 죽음은 우리 머릿속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실이 아닙니다. 그건 위, 아래에 대한 관념과 아주 똑같습니다. 우리는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이 위이고, 그 반대쪽이 아래라고 철썩 같이 믿잖아요. 하지만 지금 지구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맞지 않습니다. 위와 아래라는 관념은 우주 전체로 볼 때 적합하지 않습니다. 태어남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계속 돌이켜 보십시오. 당신은 늘 여기에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뭇잎의 삶을 꿰뚫어보십시오. 나뭇잎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름 또는 파도를 꿰뚫어보고 그것과 하나가 되십시오. 바다로서의 본성을 깨우치세요. 그리하여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십시오. 아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 저는 여전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주 깊이 주의를 기울여야만 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꽃이나 나뭇잎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그러한 모습으로 당신에게 인사할 것입니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저를 알아보고 반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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