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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동양철학에서 바라본 인지학 - 아게마스 유지 본문

인지학/2013 AWTC 강연록

동양철학에서 바라본 인지학 - 아게마스 유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16. 16:51

동양철학에서 바라본 인지학

 

아게마스 유지

 

 

 

안녕하세요? 저는 유지라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한국말 몰라요.”

 

 

 

 

 

, 이제 제 테마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교를 체험하고 여러분께 이 발표를 하게 되어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교수로 재직할 때 한국인 제자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정년퇴직) 그 제자를 통해 제 형님이 한국에서 4,5년 가량 살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해 들었습니다. <건축공간의 미학>, 이 책은 제 저서인데 한국어로 번역된 게 있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책은 2000년에 번역되어 출판된 것으로 일본에서 전달받았고 이번에는 이 책의 고향에 온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제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앞쪽이 공간에 대한 미학이라면 뒤쪽은 건축이 공간적으로 어떻게 미학적인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토대는 12감각이며 클라라 선생님의 강연 때 들었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 강연으로 연결한다면, 전세계적으로 1000개 이상의 발도르프학교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발도르프교육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한 비밀입니다. 처음에 독일에서 시작해 세계적으로 유럽, 미국, 호주, 아시아 등 폭넓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의 토대는 일반인간학의 인지학적 관점이 토대를 이룹니다. 그래서 유럽을 통해 아시아, 아메리카, 인도 모두에 발도르프교육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질문을 한다면, 발도르프교육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 배경은 무엇입니까?

 

 

 

 

 

인지학을 토대로 한 발도르프교육의 발전을 동양철학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발도프교육의 토대는 인지학이고 그래서 이런 지속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일반인간학의 토대 위에 발도르프교육이 세워져서 생명력이 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테마는 인지학을 토대로 한 발도르프교육의 발전을 동양철학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는지인데 이 테마는 제가 정한 게 아니라 한국에서 건의해서 온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테마는 대단히 폭넓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테마의 한 부분만을 설명드릴 것입니다.

 

 

 

슈타이너가 살아생전 1924년에 인지학에 대한 정의를 내렸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인지학은 깨달음의 길이다. 인간 본질에 내재한 정신성을 우주에 깃든 정신성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 정의는 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대단히 동양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정신성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하지요. ‘우주 안에 정신성이 깃들어 있다.’ 이것 역시 우리는 동양적으로 대단히 공감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이게 잘 돌아가지 않지요.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에는 어떤 공통적인 분모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가 모두 몽골리안이라는 것고요, 또 중국, 한국, 일본의 공통분모라 하면 불교, 유교, 도교가 우리 모두의 공동의 문화권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지학 내에서 우리 동양권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잘 설명드리기 위해 제 개인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946년 일본 출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늙었습니다. 1992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나가노 출신입니다. 이 도시는 굉장히 불교적입니다. 일본의 불교사를 보면, 이곳은 불교가 처음 들어온 지역입니다. 아미타불상이 중국에서 출발해 한국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 곳입니다. 일본에서는 이 아미타불상 덕분에 불교의 성지라고 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옵니다. 일본도 불교의 흐름이 한국처럼 꽤나 폭넓고 다양합니다. 여러 종파가 있습니다. 저의 모친은 한 종파의 신도인데, 부친은 또 다른 종파의 신도입니다. 아버님은 규슈에 있는 공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시고 선불교 수행도 하신 분입니다. 게다가 모든 일본인은 신도(神道)에 국교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민족 차원의 종교가 있듯 일본은 신도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양식은 또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미풍양속이 그렇지요. 게다가 저는 서양학문과 연결이 돼 있어서 학문적으로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외국문학과 예술분야를 전공해서 기독교와 굉장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저는 내면에 신도와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이 모든 정신적 흐름이 혼재해서 제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있는 서양인들에게 얘기하면 , 이 사람이 되게 복잡하구나할 테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제 속에서는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인지학을 통해 이 모든 것이 통합되는 것을 저는 느끼며 삽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인지학을 통해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신도, 불교, 유교, 기독교를 더 잘 확장해서 이해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1904년 슈타이너가 저술한 <신지학>의 핵심은 인간의 구성이 몸과 마음(영혼)과 정신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단순하지요. 동양인에게는 사람이 몸과 마음과 정신으로 되어 있다는 게 낯설지 않고 대단히 익숙하게 여겨집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런 문화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로 동양인들도 정신적인 차원의 말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다시 자각해 보자면, 우리가 몸을 지각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픈 것입니다. 마음이란 우리가 날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기뻐하고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작용입니다.

 

 

 

 

 

동양에서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신()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의 질문으로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정신과학을 토대로 하여 그것을 연구한 것입니다. 정신과학이 곧 인지학입니다. 슈타이너의 입장에서는 인간학이 어느 지점에서 끝나는가, 하는 것을 탐구합니다. 자연과학으로 계속 탐구를 하지만 한계를 느끼면서 또 다른 관점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12감각으로 확장하는 것이고, 이 책에서도 건축을 12감각과 연결해 미학적으로 다뤘습니다. 자연과학에서 감각을 5감각, 6감각이라고 말하고 끝나는 그 지점에서 더 연구를 한다면 12개의 감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들린다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소음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 즉 내면이라는 부분은 더 자세히 구분을 한다면 감정을 느끼는 부분도 있지만 의식을 느끼는 부분도 있기에 감각혼, 지성혼, 의식혼이라고 하면서 세분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학이라고 하면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인지학은 하나의 인식의 길로서 현대인 누구나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영역입니다. 어제 뢰 선생님의 오전 강연을 통해 저 그림을 봤습니다. (위 아래 반원이 겹치는 그림) 우리 동양철학에서는 어제 우리가 들었던 인간의 부분에서 겹치는 부분에 대해 혼백이라는 표현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혼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차원의 것이고, 백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차원의 것인데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모두 사실은 영혼, 정신, 마음, 혼백 다 엉망진창입니다. 그래서 일본어로 통역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정리하면 이것을 정신과 물질의 접합이라고 생각하면 사람에게는 정신과 마음과 몸이 있고,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도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상의 모든 것은 정신세계에 근원적인 상이 있다. 그래서 신의 종류가 800만이나 있다고 합니다. 800만의 신이 그득하냐? 지상에 800만의 생명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800만을 대표해서, 말하자면 물에도 신이 있고 산에도 신이 있고 공기에도 신이 있고 그 모든 것에는 신()이 있어서 주재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말에도 영이 있는 것이고 사고에도 영이 작용하며 이 모든 것에 영이 작용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에는 감각적인 차원과 초감각적인 차원이 같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초감각적인 영의 차원이 주재한다고 얘기합니다. (정신)의 이름이 문화권마다 다를 뿐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신지학>의 기본적 관점입니다. 인지학의 기본 토대라는 것은 동양사상과 접합점이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는 유교 문화의 바탕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런 것들이 대단히 많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인()에 대해 아시죠? 이것을 쓰면 서양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압니다. 유교에서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이란 무엇입니까?” 대답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입니다. ()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덕목으로 의로움을 말합니다. ()는 예의범절입니다. 공손함, 예의를 차리는 것입니다. ()는 인지학에서 말하는 지혜입니다. ()은 서로간의 믿음과 신뢰입니다.

 

 

 

공자 왈, “()는 사람에 대한 지혜로움이다라고 했습니다. 공자 시대에 이미 인지학을 말했습니다. 충효(忠孝)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자식으로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제 충효 그러면 부창부수, 장유유서 등 여자는 남자를 따르고 지배자에게 복종하고 형님에게 우애가 좋아야 하고, ... 그렇게 우리가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모든 유교의 질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위계질서로 수직적인 구조를 대단히 강조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위계질서를 강조한 것은 어쩌면 통치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쉽게 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국가, 마을, 가정 등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맹점은 인간의 개별성이 억눌리고 펼쳐나가지 못하는 자유의 속박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듯 공자님 말씀이 사회와 가정의 문화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것이 들어와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이러한 구식의 사고방식이 점점 무너지고, 사람들에게 개별적인 사고가 들어오면서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자에게 어느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죽은 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합니까?” 공자 왈, “산 자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데 죽은 자를 어떻게 보살피려 하느냐?” 그리고 공자의 애제자가 41살에 일찍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애절해서 공자는 하늘이 아주 나를 죽이는구나, 벌 주는구나!”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이 나를 힘들게 했다는 것에서 하늘은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돌아가시고 100년 뒤에 맹자가 등장합니다. 맹자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나쁜 짓을 하는가? 그것은 무의식에서 모르고 저지르는 거라고 했습니다. 맹자 왈, ‘사람은 부끄러움도 다 갖고 있고 무엇에 대한 뉘우침도 갖고 있고 감정 속에 다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외부에서 집어넣는 게 아니라 사람 안에 내재된 그 무엇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맹자의 주장에서 사람은 엄청나게 선한 존재다, 그런데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은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고 모르고 하는 것이지, 근본에서 나오는 악한 것은 없다라고 합니다.

 

 

 

유교에서 공자는 기원전 500년에 태어난 인물이지만 그의 말은 각 시대에 맞게 변화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고, 시대마다 변화된 새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12세기에 주자(1130-1200)가 나옵니다. 주자는 신유학을 창시합니다. 주자는 음과 양을 얘기합니다. 혼돈이 음과 양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이()와 기()에 대해 말합니다. 아까의 그림에 연결하면 위에는 이가 연결되고 아래에는 기가 연결됩니다. 이는 굉장히 광범위하고 형이상학적인 부분입니다. 이와 기와 합쳐져서 생겨난 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형태와 물질의 합이라는 개념과 공통적인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기가 따라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가 정신에 해당한다면, 기는 에테르에 해당합니다. 에테르가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신체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주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와 기가 합쳐질 때 사람이 탄생한다"입니다. 주자 시대는 서양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문(스콜라 철학)이 절정을 이루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왕양명(1472-1529)이 나옵니다. 그는 주자가 너무 지적이고 이론적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양명학은 주자학과 달리 가슴을 강조합니다. "기라는 것은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게 절대 아니다. 마음이 꼭 연결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사물은 모두 마음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강도를 용서하는 건 문제가 안 된다. 마음에 두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마음으로 나쁜 짓 하는 것을 극복하는 건 쉽지 않다.” 모두가 악의 근원인 나쁜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극복하는 게 참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학에서 파생된 이퇴계(1501-1570)의 퇴계학이 있습니다. 서양사와 비교한다면 이것은 근대의 시작입니다. 공자, 맹자, 주자, 왕양명을 거쳐 이퇴계는 다르게 진화합니다. 퇴계는 이기설을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확장하는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도쿄의 국립박물관에 가면 이퇴계의 중요한 책 2권이 꽂혀 있습니다. (가져간 거 아닙니까?) (웃음) 그건 교통수단으로 배를 타고 퇴계 선생의 제자가 가져온 것입니다. (웃음)

 

 

 

동양에서는 노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자는 깊이 들어가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노자에서 핵심은 길이란 늘 변하는 것이고, 항상성을 띤 지속적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도 영원성을 보장하는 게 없습니다. 영원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태초에는 이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에 의해 모든 것이 태어났다는 게 노자 사상의 기본입니다. ‘, 무위. 행위를 하는데 아무것도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대단히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이것의 의미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진짜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안 하는 것처럼 하는데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인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세계로부터의 해방, 자기 깨달음을 말합니다.

 

 

 

 

 

윤회와 카르마

 

 

 

이제 윤회, 카르마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슈타이너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카르마와 윤회는 자연과학에서 꼭 필요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자연과학이 사실은 500년의 발전 속에서 많은 이해를 가지고 왔듯이 정신과학을 이해한다는 것 역시 500년은 걸리는 것이고,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지만 인간에게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윤회와 카르마는 동양철학에서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6단계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옥을 가고 기아에 허덕이고(아귀) 축생에 빠지고 인간이 되고 아수라가 되고 하늘의 신이 되는 6단계를 말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부처가 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많은 수행의 길, 자기 연마의 길을 가야 한다는 걸 강조합니다. 어제 크리스토프 선생님이 강연하실 때 팔정도에 대해 잠깐 언급하셨습니다. 팔정도라는 것은 인지학에서도 다루는 수행 원리인데, 요약한다면 자기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갈고 닦아 정화하고 강화하는 게 목적입니다. 이것을 슈타이너는 <신지학>에서 명료하게 정의내립니다. <신지학>에서는 우리의 몸이 유전의 법칙에 놓여 있고, 마음은 우리가 만든 운명에 따르고, 정신이라는 것은 윤회의 법칙에 따른다고 합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길 지금 동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4,5세기 초기 기독교의 문화권에 있던 영혼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 과거 우리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고 과거가 없이는 현재가 없습니다. 과거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인과관계를 자연과학에서 얘기하듯이 지금 이 문장 역시 정신과학에서 인과를 다루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 과거의 나. 카르마는 부정적으로 내 운명, 이러는 게 아니라 굉장히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늘 자기 발전, 자기 진화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게 인간입니다. 발도르프교육학은 그걸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유아교육, 학교교육, 특수교육 모두 그렇습니다. 막 태어난 아이는 정신세계에서 온 존재로 지금 새롭게 태어났지만 과거에서 온 존재라는 걸 기본적으로 교육학에서 깔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교사든 학교교사든 교육자라 함은 아이들이 천상의 존재가 지상에 연속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중한 것입니다.

 

 

 

자기 인식, 자기 깨달음은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어디에서, 어느 스승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 의지하고 누가 끌어주는 게 아니라 건강한 사고영역을 연마하면서 자기 스스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현대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반 의식이라는 것은 감각세계와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라는 것은 감각세계와 연결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유는 감각세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건강하게 잘 체험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정신세계를 체험하는 것과 같다고 슈타이너는 말합니다. 우리가 처음에 던진 정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얻은 것입니다. 정신세계로부터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강에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길 양쪽으로 한쪽은 불이 타오르고, 다른 한쪽은 너무 추워서 빠지면 얼어죽습니다. 여기도 죽고 저기도 죽습니다. 클라라 선생님이 말씀하신 줄타기와 같습니다. 균형을 잘 맞춰야 합니다. 뒤에서 맹수가 쫓아오는데 나그네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뒤에서 오는 맹수에게 잡아먹히니까 어쨌든 가야 합니다. 한쪽은 타죽고 한쪽은 얼어죽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불경에 정확히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15cm 정도의 좁은 길입니다. 맹수가 쫓아옵니다. 위험하고 좁은 길을 가야 하는데 안 가도 죽고 가도 죽을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 사람이 안 죽으려면 이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는 겁니다. 부처가 말합니다. “가라, 내가 널 보호하고 있다.” 아미타불이 저 앞에서 또 얘기합니다. “와라, 용기를 내라. 내가 널 맞이해 줄 테니 걸어와라.”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100 발자국을 가는 것입니다. 균형을 잘 맞춰서 갔더니 환영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불의 강물은 욕망, 욕정 등의 나쁜 감정이고 차가운 강물은 시기, 질투 등의 나쁜 감정을 말합니다.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인지학에서는 아리만과 루시퍼라고 얘기하고, 가운데의 길이란 그리스도라는 빛의 존재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밖에 없지만 선불교에 대해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선불교도 여러 가지 갈래가 있지만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불교의 한 대가가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지위의 높고 낮음 없이 모두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여기에서는 사회적인 높고 낮음을 떠나서 사람의 본질적인 존재를 얘기합니다.) 진정한 인간이란 자아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다. 그게 보이는가? (선문답입니다.) 아직 못 봤다면 그것을 보려고 노력하라. 모두 각자의 내면에는 진정한 자아가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걸 봐라.”

 

 

 

 

 

진정한 ''를 발견하라

 

 

 

1909527일 베를린에서 행한 비의적인 강연에서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진정 유일한 이름이라는 것은 (Ich bin)’. ''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이름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들어 있다.” 그게 진정한 나와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동양문화권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제자여, 네가 올바른 관점을 가지려면 너는 인간의 부정적인 것을 받지 말아라. 정도를 걸어라. 너의 밖에서 만나는 것을 없애라.” 여기서 아주 극단적인 얘기가 나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죽여라. 그러면 종국에 너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임제 선사) 여기서 죽이라는 건 사람을 죽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권위,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말입니다.

 

 

 

<자유의 철학>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유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서양과 비교해서 동양에서는 개별성, 자아, 이런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동양문화를 진정으로 살펴보면 자아, 개별성을 아주 존중합니다. 마지막으로 선불교의 흐름에서 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스승이 대답합니다. “지구 전체가 부처다. 이 전체 지구가 부처의 눈이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만찬에서 이것은 나의 피와 살이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지구와 그리스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와 지구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부처도 지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깨닫습니까?” 그랬더니, “경전도 필요 없고 스승도 필요 없다, 너 스스로 깨달아라.”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 없이 개인 자신이 정신세계에 입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말합니다. 부처와 하나 된다는 것, 지구와 하나 된다는 것이 곧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인지학에서 슈타이너가 말하길 스승이나 구루가 없이 자기 깨달음을 가듯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게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아의 힘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5세기 이후에 새로운 문화기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동양에서도 자유와 개인의 자아를 언급하면서 새로운 인류사로 나아가는 것에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각 나라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의식혼의 시대는 언제 시작했고 동양문화권에서는 언제 시작했는가? 이것이 교육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서양사에서 잔 다르크나 마르틴 루터가 살았던 15,16세기를 근대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왕양명이나 이퇴계와 접합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의식혼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돈 만 원짜리에는 세종대왕이 있습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민족혼을 정신적인 힘으로 새롭게 창조한 분입니다. 이퇴계는 천원에 있는데 천원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웃음) 이퇴계는 의식혼 시대의 표상인 것입니다. 인지학에서는 '미카엘의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현대의 시대정신으로 미카엘을 강조합니다.

 

 

 

미카엘의 시대를 요약 정리한다면 이 물질의 시대에 범람하는 많은 사악함을 용에 비유하고, 용을 죽이는 모습으로 미카엘 대천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용을 죽이듯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가 미카엘 시대의 과제입니다. 용이 동양권에서는 굉장히 성스러운 존재지만 서양에서는 올라오는 용을 창으로 찌릅니다. 동양과 서양의 해석은 달라 보이는데 어쨌든 용을 찌르는 것입니다. 인지학에서는 아스트랄체가 정화된 상태를 '정신자아'라고 합니다. 상반된 모습 같지만 용을 한 단계 올리면 다른 차원이 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 용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의 의미는 같은 존재지만 이미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아시아에서 발도르프교육학이 역동적으로 퍼져나가는데, 그 근원은 인지학적 토대가 이미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발도르프교육은 앞으로 번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발도르프교육의 토대가 정신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세계에 사는 우리는 정신세계를 토대로 살 수밖에 없으므로 발도르프교육이 미래에 더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차원에서 인지학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2013 인지학컨퍼런스 2013.4.26 주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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