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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학교의 리듬 있는 수업 (2)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본문

인지학/2013 AWTC 강연록

발도르프학교의 리듬 있는 수업 (2)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9. 3. 13:16

2013429일 월요일 주강연 2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안녕하세요? 동료 여러분. 어제 했던 작업을 계속 하겠습니다.

 

어떻게 영혼정신이 에테르체와 만나게 되는 걸까요? 교육 작업은 두 가지 방향에서 오는 영혼정신과 신체의 만남에 관한 작업입니다. 슈타이너는 그것이 자연적으로는 연결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교육적 과제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인데요, 우리는 어제 연결점을 보았습니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보통은 아이가 부모님을 찾을 때 그 아이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부모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상상해보세요. 정신세계의 낮은 단계에 재육화를 위해 준비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정신영혼의 존재는 지상을 강렬하게 바라봅니다. 육체로 들어가기 위해 가장 올바르고 최대한 높은 가능성을 찾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를 바라보면요. 요즘 세상이 어떤지 바라보려면 우리의 기술적인 면을 봐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탄생, 재육화의 과정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정신영혼이 재육화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유치원에서 그걸 봅니다. 저학년에서도요. 보통 유치원에서 요즘 아이를 다루는 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점점 더 큰 도전이 되어갑니다. 우리 환경을 보죠. 사회적인 상황은 물론 사실에 관한 것이지만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의 관계가 표현이 된 것입니다. 재육화의 과정을 봤을 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보통 아이가 기본적으로 집에 있는 편안한 느낌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태어난 장소가 그렇게 편한 장소가 아니지요. 그래서 가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상에서 더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태어난 나라, 공간에서 더 편안하게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확신컨대 ADHD라 부르는 것이나 자폐적인 행동 들에 대해 과학계에서는 육체적인 이유를 찾으려 합니다. 그런 방식은 이 문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중요한 힌트를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지상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정말 위급한 것은 영혼이 재육화하고자 했을 때 오늘날은 더 적절한 유전과 보육과정을 찾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의 노력은, 좀더 일반적인 노력을 생각하면 첫 7년간일 것입니다. 그때는 훨씬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발도르프교육은 100년이 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뒤돌아보면 그 이전의 것도 봐야 하고 현재도 봐야 하며 미래도 봐야 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 변화를 봐야 합니다. 1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점은 유치원 과정에 대한 주목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잘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인 것을 봐야 합니다. 1919년에 첫 발도르프학교가 생겼을 때 그 의도는 1~8학년, 1~12학년의 학교를 가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유치원과정, 방과후 과정에 대한 것이 의도였습니다. 처음 생각한 의도는 학령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잊혀졌습니다. 재정적인 이유로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 첫 학교에는 200여 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재정적으로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건물과 관련해서도 어려웠습니다. 건물과 설비 관련해서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곳(한국)에서 발도르프학교를 만나게 된 건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는 과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7년 과정인 유치원교사들은 이 세상에서 아이들이 머무는 곳을 집과 같이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몸도 집과 같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어제 얘기를 했는데 그것이 지금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적정한 시기에 집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간과 시간 속에서의 집입니다. 시간 속에서의 집이란 삶에서의 리듬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리듬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치원 교사, 저학년 교사의 일은 시간을 구조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활동은 가정과 같은 느낌을 주는 교육입니다.

 

재밌는 점은 주류교육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연구 결과를 보면 이런 종류의 리듬이 큰 이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지요. 우리는 많은 아이를 봅니다. 여러 가지 활동이 있을 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매일 매일 볼 수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취리히에 있는 아주 멋진 유치원에 가봤습니다. 어떻게 유치원 교사가 그 자신의 존재를 통과하여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이들에게 가정과 같은 상황을 주는지 보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건 교사가 그것을 말없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산책을 갔을 때 교사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아이들은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교사의 의식적인 존재가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극복해야 할 큰 어려움은 유전적인 게 아니라 시간 속의 구조가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아침 활동은 오후와 달라야 합니다. 아침식사는 그냥 먹을 거리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그 시간의 특징과 관련된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이들은 아침이 시작했다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제 이웃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두 아이를 입양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정말 몇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하루의 리듬을 완전히 숙지하는 데만 몇 년이 걸렸습니다. 그 아이들은 배고프고 배부른 차이만 알았다고 합니다. 아침과 저녁이 어떻게 다른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시간 구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얘기해야 할 주제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오늘은 시간과 공간 속의 리듬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유치원교사, 저학년 교사, 고학년 교사, 상급교사 모두에게 흥미로운 것은 여러분이 만약 예술적이지 않고 시간 구조에 익숙하지 않다면 시간은 일종의 감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리듬이 없다면 말입니다. 너무나 순응만 하게 되면 그 시간은 감옥이 됩니다. 아이들에게 그 시간은 아주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맥박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주 멋진 리듬치기를 배웠는데, 그것은 아이들의 맥박으로 나타납니다. 그건 여러분의 예술적 느낌에서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로봇이 아니지요. 우리는 시간 속에서 모든 걸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리듬 속에서 가정과 같은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공간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모든 활동에서 의식적으로 환경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성장을 제대로 도와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러 가지 연구결과를 봅니다. 성인은 그것들을 극복하는 게 가능하다고 합니다. 개별적인 것을 극복할 수 있고 사회적인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은 다른 조건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보호자로서 거기에 늘 어떠한 보호자가 존재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돌봄에 대해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는데요. 연구자 중에 게럴드 포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주 명백한 사실로 엄마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아이가 어렸을 때는 한 명의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기 1,2년이 지난 뒤에는 몇 명이 더 있어도 되지만 처음에는 한 명이 있어야 합니다.

 

유치원교사는 아주 어린 아이에게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은 존재감을 줍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비극적 상황을 보기도 합니다. 암스테르담의 한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80명 이상의 2살에서 5살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두 명의 보육교사에 의해 의도적인 성적 학대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시대의 모습일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감지되지 못한 채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건 이제 더 이상 아이 돌보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이 사람이 오고 점심에는 다른 사람이 오고 저녁에는 또 다른 이가 온다면 가정적인 집을 못 지어주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일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비극은 아닙니다. 진정한 비극은 오지 않았습니다. 경고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대체 무엇이 아이를 돌본다는 것일까요? 미래에 무언가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하려고 하지만 그 자체가 해결점이 아닙니다. 보육원을 많이 만드는 것으로 해결점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증상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육원이란 내적인 게 아니라 외적인 것만을 지칭하지요. 건물에 보육원만 많이 만드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충격적인 일입니다. 외부적인 건물은 늘어나지만 내부적인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여러 가지 활동형태로 오는 게 아이들에게 의미를 주면서, 뭔가가 가득 찬 느낌이 그 활동 속에서 옵니다. 제 생각에 발도르프유치원 어디에도 식기세척기가 없습니다. 정말 숨막히는 상황이지요? (웃음) 그 기계는 컵과 스푼을 그냥 깨끗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문제가 여러 개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식기세척기를 좋아합니다. 그건 단지 지적인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그 기계 자체는 멋진 것입니다. 생활의 여러 과정을 보여줍니다.

 

알베르트 수스만 박사가 제 주치의인데요. 여러 인지학자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문화가 뭔가를 깨끗하고 멋지게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 우리가 유치원을 하는 것도, 그리고 보육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암스테르담의 그 보육원을 보면 마치 병원과 같습니다. 모든 게 깨끗하고 화사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깨끗하지만 또한 멋진 곳을 원합니다. 저학년에서 우리가 계속 해야 하는 아주 흥미로운 일은 우리가 유치원에서 저학년까지 멋진 다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연결되는 다리가 가끔은 경제적인 것과 결부되기도 합니다.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발도르프학교가 어떻게 이런 다리를 만들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방하라는 건 아닙니다. 영감을 받길 바랍니다. 만약 유치원 아이들이 이듬해에 학교에 가야 한다면 유치원에 학교교사가 올 것입니다. 그 교사는 아주 신중하게 아이들을 고를 것입니다. 마지막 몇 달 동안 이 작업을 하겠지요. 유치원에서 학교로 가는 전환이 있을 때 이 선생님은 아이들이 1학년으로 갈 수 있도록 반 년 정도 조력자가 될 것입니다. 유치원교사들과 1학년 교사가 협력하는 것이지요. 유치원 교사가 아이들을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지나고 몇 개월 지나면 이제 1학년 교사가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연결되면 정말 멋진 일입니다. 처음 그걸 봤을 때 아주 행복했습니다. 이게 발도르프교육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내면에서 연결되고자 하는, 그 안에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모습 말입니다.

 

요즘은 이런 문제에 대해 논쟁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판단하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해 단편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요. 우리는 좀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발도르프운동 속에서의 올바른 정신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에서 새로운 것들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했던 것을 조금 반복해 보겠습니다. 어제는 기본적인 리듬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은 여러분의 수업 속에 리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가졌던 리듬은 모두 건강합니다. 그것은 음악적이고 교육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리듬활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명확히 볼 것입니다. 아침에 하는 리듬활동 자체를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종종 저학년의 긴 아침 리듬시간에 대해 비판받는데 그걸 명확하게 하고 싶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많은 발도르프학교에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아주 멋진 학교였는데요, 유럽에서 독일은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이런 일을 봤습니다. 아침에 젊은 여자교사가 교실에 들어오셨습니다. 아주 헌신적이고 멋진 분으로 아주 완벽하게 발도르프적으로 교육을 받으신 분입니다. 20명의 아이들이 있고요. 아이들이 문에서 교실로 들어옵니다. 보통 아이들이 그렇듯이 생기있게 들어옵니다. 저는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기대를 목격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날이 될까?’ 하고 기대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20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초기에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교사가 원하는 걸 정확히 했습니다. 리듬적인 시간을 가졌지요. 노래, 움직임. 게임, 또 노래, 움직임, 게임... 그렇게 40분을 보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점점 불안해하는 걸 보았습니다. 리듬활동은 아이들이 집에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인데 아이들이 불안해지는 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45분째에 교사는 배움의 과정을 가졌습니다. 큰 종이에 글자를 하나 쓰고 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글자를 발걸음으로 걸어보고 또 반사되는 과정으로 걸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교사는 무언가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교사는 아이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소리지르고 뛰어다녔지요. 교사는 비상상황에 할 수 있는 방식을 썼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게 하고 30분 동안 이야기들려주기를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도 교사도 모두 피곤해져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교사는 아주 발도르프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저는 그 수업을 비판합니다. 이건 예술적인 수업이 아닙니다. 집에 있는 것과 같은 안정된 수업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두 시간 동안 매우 지쳤고 불행한 교사가 거기 있었습니다. 아주 발도르프적인 교사지만 그것은 가정과 같은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교실에 왔을 때 예술적인 구성이 거기 있어야 합니다. 집중하고 이완하는 구성이 필요합니다. 10분 동안 노래하고 리듬적인 활동을 한 뒤에 아주 멋진 시를 낭송하고 작업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것뿐 아니라 아이들이 배움 자체를 가져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배움은 치유의 과정입니다. 인간존재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는 집중과 이완에 대해 배웠습니다. 모든 수업에서 그걸 가져와야 합니다. 마치 음악처럼요. 어제 가능한 여러 리듬에 대해 말했습니다. 수업시간표 속의 리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침의 인간은 정오와 오후의 인간과 다르지요. 슈타이너는 우리에게 원형적인 시간표를 주었습니다. 물론 내용적인 부분도 주었지만요. 아침은 배움을 위한 시간, 정오는 반복을 위한 시간, 그리고 오후는 예술적인 활동을 위한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한 가지 집중하고 싶은 주제는 또 다른 리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균형이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간과 시간 속의 균형입니다. 그것은 유치원, 저학년에서 다 적용할 수 있지만 특별히 상급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기억과 관련된 것입니다. 어제 오이리트미 공연을 봤고 아침에는 멋진 취타대 공연을 봤습니다. 늘 흥미로운 것은 인간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들은 그런 걸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처럼 저도 앉아서 무대를 잘 봤습니다. 무대를 바라보는 게 제 속에서 어떤 작업을 할 수 있는지도 보았습니다. 어제 11학년 아이들의 깊은 움직임, 그리고 리에코 하타 선생님의 공연에서 불교 승려의 독경도 멋졌습니다. 눈과 귀를 통한 인지였고 동시에 눈과 귀가 거기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한 의자에서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의자에서 마치 모든 몸이 감각기관인 아이처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취타대 공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어떤 것에 감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의상, 표정 모두 다 강렬하고 놀라웠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경험할 때 여행자들은 보통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공연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경험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의 몸이 밖으로 나간 것처럼 함께 참여합니다. 교육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각은 눈과 귀입니다.

 

, 이제 감각에 대해 살펴볼까요. 유치원 시절 눈과 귀는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내적인 경험을 해야 합니다. 어제 오이리트미 공연에서 반야심경이 암송됐습니다.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스님을 보지 않아도 공연을 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없이 리에코 하타 선생님의 공연만 봤다면 어땠을까요? 아주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웃음)

 

눈과 귀는 서로 다르게 작동합니다. 이 부분이 우리 교육과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우리의 시각을 너무 많이 이용하면 아주 피곤해집니다. 만약 우리가 청각을 너무 많이 사용한다면 우리는 거칠어집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반 제임스 선생님(미술가)은 다르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반 고흐의 작품이라 해도 몇 시간을 구경하고 다닌다면 그냥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너무 피곤해지기 때문에 앉아서 쉬고 싶습니다. 멋진 발명품을 잘 만드는 미국 사람들이 왜 가만히 앉아도 미술작품이 지나가게 하는 건 안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시각을 쓰는 건 우리에게 아주 큰 일입니다.

 

반면 우리가 만약 음악을 계속 듣기만 한다면 우리는 거칠어집니다. 정신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콘서트 장에는 편안한 의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느끼지요. ‘, 이제 이 정도면 되겠구나하고요. 그래서 음악을 듣다가 그냥 집에 가기도 하는데요. 상상해보세요. 만약 아이나 교사가 귀에 몇 시간이고 이어폰을 꽂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독일에서도 이어폰을 아주 크게 듣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교육에서 왜 눈과 귀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것은 모든 교육이 눈과 귀에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화학에서도 수학에서도 국어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극적인 측면을 봐야 합니다. 인지학적으로 눈과 귀와 관련된 것들을 봐야 합니다.

 

의지와 아스트랄체는 눈과 관련됩니다. 형태그리기, 색칠하기, 그리기 등은 의지와 관련됩니다. 거기에도 아주 멋진 다리가 있습니다. 이 다리를 우리는 탐험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첫째, 물질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역사수업이나 다른 여러 수업을 할 때 여러 이미지를 봅니다. 그림을 보기도 하고 사진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언어를 통해 들어오는 내적 이미지도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미지입니다. 스토리를 통해 들어오는 이미지는 우리가 칠판에서 보는 것과 드로잉 등에서 보는 이미지와 다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시아의 대만 인도 태국 한국 등에서 멋진 칠판그림을 보았습니다. 생명의 힘이 그러한 이미지에 작용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왜 형태그리기를 하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발도르프교육에 관한 잘못된 이해가 있습니다. 그건 형태그리기를 주요수업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이올리니스트가 공연을 위해 기술만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형태그리기는 절대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함께 하는 활동입니다. 아침 내내 그걸 하면 아이들은 내적인 활동에 압도됩니다. 그냥 매일 20분씩 아침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4주 동안(한 주요수업 동안) 20분씩 하고 쉬었다가 다시 하고 할 수 있습니다. 주요수업은 명확히 배움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교실의 칠판그림을 보면 아이들이 잘 참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형태그리기나 드로잉을 할 때 무척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데 이야기하게 해도 됩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은 수다쟁이가 됩니다. 그게 교육입니다. 그런데 페인팅(색칠하기)을 할 때는 신성한 조용함이 옵니다. 그때는 조용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이런 이중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이미지를 보는 것은 생명력의 작용 속에서 좀더 지적인 것입니다. 또한 이야기를 통한 내적인 이미지는 영혼 속에서 작용합니다. 여러분의 깊은 경외감, 바람, 안도감이 언어를 통해 이미지로 온다면 그것은 영혼적인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교사는 흥미로운 과제가 있습니다. 역사교사가 너무 많이 말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말하는 것과 보여주는 것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균형이 하나의 다리가 됩니다.

 

바깥으로 보는 것(시각)을 통해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처럼 생명력과 관계된 내면적인 이미지를 보는 것은 이야기(청각)를 통해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하는 이야기는 그날의 마지막에 하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매일 매일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슈타이너는 교육과정을 짤 때 아주 현실적인 것들을 보았습니다. 이야기 들려주기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그는 잘라말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교육과정의 형태입니다. 아이들이 첫 8년과정을 보냈을 때 아이들은 아주 좋은 동화, 신화, 이야기 등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들려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희망컨대 여러분의 교사회에서 아이들이 하루에 몇 편의 이야기를 듣는지 공유해야 합니다. 아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번에 3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조금 들려주고 저녁에 마무리해서 들려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번에 3가지를 들려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 3,4학년 때는 서너 개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는데 그러면 다재다능해지는 게 아니라 아주 초조해집니다. 들은 이야기는 모두 사라집니다. 하루에 한 가지 정도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게 담임교사는 과목교사들과 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동안에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보조교사들은 항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다른 가능성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눈과 귀,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양극성 속에 산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한없이 근본적인 게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외국어수업, 주요수업을 하고 있다면 이 양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저학년을 할 때 시각적인 특성, 음악적인 특성, 이야기들, 노래, 이러한 것들이 아주 조용한 흐름처럼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 그 조용한 흐름은 서서히 수년을 거치며 확장합니다. 우리가 1학년에서 2학년으로 갈 때 우리는 점점 더 생명력의 세상에 더 많이 의존합니다. 아직 영혼 세상에 의존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가 이 시기에 얼마나 소중한지 경험합니다.

 

예전에 제가 유치원에 방문했을 때, 한 교사가 이야기 들려주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교사는 아주 지겨운 방식으로 들려줬습니다. 어른의 영혼인 저에게는 아주 지겨웠습니다. 이야기 속의 아주 심한 악동이 교사에게 지적을 당하고 망치로 못을 박고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착한 아이들은 결혼도 하고 왕도 되고 이야기 속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정말 환상적입니다. 아이들 모두 천국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걸 통해 생명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저학년과 유치원 시기에 이런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들려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적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영혼적인 요소를 너무 일찍 일깨우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소위 말해 영혼이 일찍 깨어나는 것이란 아스트랄적인 것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줄 때 우리는 주의깊게 접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8학년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를 하면 너무 일찍하는 것입니다. 9학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제 11학년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서 영혼이 일찍 깨어나지 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막 깨어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미지와 음악적인 것, 이 양극적인 것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할까요? 8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이미지와 음악적인 것 사이에서 아주 멋진 균형을 잡을 것입니다. 그래서 8학년에는 드라마틱한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비극적인 것을 6학년이나 7학년에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을 빨리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8학년에서 그런 걸 한다면 아주 극적인 낭송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아이들이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지 볼 수 있습니다.

 

눈과 귀에 관한 또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슈타이너는 오이리트미 등 많은 것을 발명했습니다. 주요수업 노트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입으로 말하기와 관련된 것을 기초로 합니다. 책이 아니라 입으로 전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각적인 내용이 90% 이상으로 이루어진 교재를 쓰는 것이 현재 주류교육의 모습입니다. 이것과 균형을 맞추려면 아주 극적인 말하기를 해야 한다고 슈타이너는 말했습니다. 교사가 말로 들려준 것을 아이들은 나중에 자기 주요수업 공책에 시각적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한 균형입니다. 슈타이너가 교사에게 주었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진리는 지적(知的)으로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들려주는 게 아니라 언어로 이미지화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에게 너는 말썽을 많이 부린다고 하는 게 아니라 너는 여우 같구나, 하면서 이미지화해서 전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미지로 해야 하는 수업이 있고, 이미지가 없는 수업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수와 셈에서 더하기 왕과 곱하기 여왕이 있는데, 왜 여왕이 곱하기냐면 그녀는 많은 아이를 낳았고 기독교에서는 여왕의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슬픈 빼기 왕자와 아주 다정한 나누기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왕은 안 돼!”라고 합니다. 이런 걸 수업에 가져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아이들에게는 이미지를 안 가져오는 게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1학년에서도 더하기 왕의 모험이라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글자를 배울 때와 달리 첫 셈하기 수업에서는 어떤 이미지도 필요 없습니다. 셈하기에서는 이미지 없이 개념과 행하기만을 통해서 하면 됩니다. 1은 뭘까, 2는 뭘까, 하면서요. 활동에서는 성냥을 이용하거나 구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보이는 이미지를 갖고 수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셈하기 수업이 끝난 다음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 그렇게 해서 내적인 이미지로 가져가게 하는 것이 건강한 수업입니다. 아침에 수업을 이렇게 한다면 아주 활동적인 수업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본 것처럼 아침에 활동을 한다면 주요수업으로 수학을 할 때는 노래하는 것이 여러분이 하는 최상의 활동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느끼셨으면 합니다. 수학적인 수업에서 노래는 아침을 균형있게 만들지 못합니다. 수학은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수학 주요수업을 했으면 수학의 반대에 있는 이야기로 끝내는 게 노래로 끝내는 것보다 좋습니다. 균형을 위해 양극을 경험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습니다. 공간과 시간 사이는 굉장히 깊습니다. 공간은 과거의 세계이고 우리 지적인 능력이며 이미지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고의 세계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모두의 사고는 이런 영역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뒤에 있는 세계에서 오는 것으로 그걸 우리가 취합니다.

 

우리의 말하기, 음정, 음악을 통해서 오는 것은 우리 앞의 세계입니다. 미래의 세계지요. 죽음 이후의 세계입니다. 공간의 세계라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이미지의 세계이고 이 환경입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공간을 아이들은 편안해 합니다. 아이들이 왔던 이전의 세상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기, 음악 등의 세계는 미래의 것입니다. 그런 활동을 할 때 아이들은 행복해 합니다. 그것들이 자신의 운명, 헤쳐나가야 할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을 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작은 안식처를 줍니다. 그리고 보호해 줍니다. 너무나 많은 세상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작업했던 것은 슈타이너가 말한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경외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 속에서 자유를 줘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그것들에 중요한 세 가지 몸짓이 있다고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첫 번째는 경외, 두 번째는 안식처, 세 번째는 미래에 대한 열정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형태그리기는 지적인 수업이 아니다. 활동이다. 수학이나 음악은 시간적인 작업이고, 이야기들려주기는 공간적인 작업이다. 이야기들려주기는 이미지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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