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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학교의 리듬 있는 수업 (3)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본문

인지학/2013 AWTC 강연록

발도르프학교의 리듬 있는 수업 (3)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9. 3. 13:20

2013430일 화요일 주강연 3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동료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주 멋진 화창한 날입니다.

 

인지학이 얼마나 복잡한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디 복잡함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지만 인지학의 지평에서 따뜻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예술적인 교육인가?’ 이게 우리의 질문입니다. 예술적인 것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오해가 있습니다. 오늘 할 것을 말하기 전에 그 문제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술과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두 가지 방향의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하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소 조각 그림 스피치 드라마 연극 등을 하는데 이것이 그런 방향입니다. 다른 쪽 방향은 교육과정으로서 가르치는 것 자체입니다. 교육과정이 예술과 무관하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과정 자체도 예술과 유사한 작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주류교육에서도 아주 많은 예술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에서 행하는 많은 예술활동을 따라서 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하나 정도는 선택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발도르프학교가 되는 건 아닙니다. 발도르프학교의 특징은 예술적인 활동과 예술적 교육과정의 결합에 있습니다. 제가 이 기간 동안 여러분과 함께 만들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교육예술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지요. 어제 했던 걸 되돌아보면 교육에 있는 모든 활동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과거는 우리의 형성력, 지성, 지적인 면, 기억, 성장, 습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등과 연결됩니다. 짧게 말한다면 이것은 에테르힘의 세계입니다. 생명력의 세계지요. 세계 속에서 우리 존재의 시작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과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현재에 있지만 우리의 흐름은 늘 미래를 향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시간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다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부디 잘 드시길 바랍니다. (웃음) 우리는 에테르체, 생명력만 갖고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힘, 즉 영혼의 힘, 의지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의 존재가 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공간의 존재였다면 앞으로 가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계발하기 위해, 경험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힘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행위할 수 있는 능력, 의지력, 다시 말해 노래하는 것, 말하는 것, 춤추는 것, 오이리트미하는 것, 스포츠를 하는 것, 세상을 파악하는 것 들입니다. 이 미래는 어떤 세계일까요? 그 세계는 시간의 세계입니다. 이미 죽어버린 과거라 하더라도 우리를 미래로 데려다 줍니다. 움직임 말하기 음악 드라마 의지력 등이 모두 시간, 미래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제 흥미로운 건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요? 그건 과거에서 온 힘을 미래에서 온 힘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중간영역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중간에 상상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리듬이 여기에 속해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로써 인간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부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 시간이란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측면인 거지요. 이렇게 말하는 건 어제 말한 걸 떠올리기 위한 것입니다.

 

개념적으로 가보겠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간을 먹습니다. 그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건 정말로 흥미로운 측면입니다. 우리는 조금씩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세상, 의지, 행위, 말하기, 시간의 세계로 와서 여러분이 그 세계와 관계를 하면 여러분은 시간이 유일한 흐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은 역동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것인데요, 아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삶에서 뭔가 깨어나는 듯한 경험이 있지요.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때 아주 오랫동안 진행된 듯한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상에서의 꿈은 찰나입니다. 어떤 주제에 완전히 몰입할 때, 예를 들어 유치원교사가 아이들과 활동에 몰입할 때 시간을 잊어버립니다. 이때 시간은 역동적이 됩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잘 이해가 되었나요? 이것은 명상을 하는 동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명상을 하면서 여러분은 집중하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말합니다. ‘2분 동안 연습하겠어.’ 그런데 그 2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요. 시간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경험입니다.

 

교육의 실제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에서 시간을 사용해보시길 바랍니다. 뭔가를 시작하고 하고 있는데 벌써 밤 1030분이 될 수 있습니다. 시계를 보지도 않고요. ‘, 한 시간이나 남았네... 이제 30분 남았네...’ 이것은 시간을 영감적으로 쓰지 않는 것입니다. 집중의 역동성이 필요합니다. 뭔가를 한 지점으로 가지고 와서 이완하는 것입니다. 집중된 생각을 완화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이 만약 스릴러 소설을 읽는다면, 작가가 점점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마지막에 이완시킨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어떻게 작가가 그런 걸 할 수 있을까요? 비법은 작가가 결말부터 거꾸로 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작가는 결말을 미리 정해 놓고 거슬러 갑니다. 그래서 마지막 쪽부터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고학년에서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한다면 어떨까요? 수업이 시작되고 느낍니다.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싶어하는지 선생님은 그걸 알고 있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느낍니다. 7,8학년 아이들은 선생님들 중에서 수업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분도 있다는 걸 압니다. 물론 이런 일이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웃음) 이런 것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아침시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세상을 묘사합니다. 그게 첫 번째 구절입니다. 그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8줄에 걸쳐 나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세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나오지요.

 

나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곳에 해가 빛나고

그곳에 별들이 반짝입니다.

그곳에 돌들이 자리잡고

식물들이 생기있게 자라나며

동물들이 느끼며 생활하고

사람은 혼 안에

영의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나는 내 안의 살아있는 영혼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영은

햇빛과 혼의 빛 속에

드넓은 우주 공간에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도 함께 계십니다.

 

, 하느님

기도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향합니다.

배우고 일할 수 있는 힘과 축복이

내 안에 자라나게 하소서.

 

오늘 과제가 많은데 아마 마지막 날에야 다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아침시는 교사의 명상과 관련됩니다. 첫 번째 교사의 명상은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교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지 봐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것을 진정으로 이용할 수 있길 바랍니다. 아마 아시아에는 명상으로 가는 훌륭한 접근법이 더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른 영역으로 가겠습니다.

 

유치원, 저학년 모두에서 아주 놀랍고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칠판에 적어보겠습니다. 이것은 3일 전에 한 것입니다. 하늘과 지구의 각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간적인 존재인지, 공간적인 존재인지도요. 그러면서 우리는 한동안은 지상의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교육 속에서 함께 작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지상에서 하늘과 연결하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리듬, 균형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균형을 알게 된다면 예술을 이해하는 데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적인 작업을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느낍니다. 여러분 모두 경험했을 텐데, ‘나는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지학적인 용어로 자아(Self)라고 합니다. (I)와 자아(Self)는 조금 다르긴 한데 여기서는 고유한 정체성으로 보겠습니다. 여러분 문화권에서는 그 개념이 쉬울 수도 있지만 서양에서는 어렵습니다.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건 지상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여자 혼자 아이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요. 물론 복잡한 유전형태의 과정이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부모에 의한 것이 아닌 아이 자체의 고유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heaven)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모의 몸이 아이의 개별적인 몸을 만들 수 있도록 연결한 것입니다.

 

자아, , 고유함, 개별성. 이런 존재가 앞으로 살아갈 몸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치원과 가정, 저학년 담임과정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물론 상급과정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지학의 이야기를 에테르체의 탄생, 아스트랄체의 탄생, 자아의 탄생 등으로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방향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오로지 자아의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매일 매주 매달 매년 관통하는 과정입니다. 자아가 몸으로 들어가는 과정, 참여하는 과정, 이것은 유치원에서도 일어납니다. 유치원에서 우리는 이런 참여의 과정, 즉 자아가 몸과 함께 연결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유치원교사가 저에게 말하길 어린 아이는 자아가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유치원에서도 싸움이 있고 투쟁이 있습니다. 유치원교사는 아이의 자아가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육체를 만들 수 있도록, ‘자아가 들어갈 집이라는 몸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계속 상투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영혼이 없는 이야기는 자아와 육체의 결합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유치원의 시간은 아이들의 자아가 무의식적으로 몸 속으로 들어가는 육화의 과정입니다. 그건 굉장히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몸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자아가 그걸 가장 잘 이용할 수 있을 때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그러한 교육활동에 미래 과제의 대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학교에 갈 준비가 되었다는 건 무얼 말할까요? 흔히 에테르체의 탄생을 말하는데요. 그것은 자아가 육체로부터 나와서 에테르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참여를 에테르체의 탄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테르체 힘(생명력)의 일부가 영혼활동에 쓰입니다. 물론 그 일부는 여전히 생명활동에 쓰이지만 일부는 영혼활동에 쓰이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테르체를 인간의 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육체 속에 감추어진 힘입니다. 그리고 드러난 영혼활동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일이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에테르체에 근거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테르체의 힘과 영혼이 만날 수 있게 우리는 수업을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느낌(감각)의 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조율할 수 있도록 합니다.”

 

슈타이너가 말한 걸 그대로 하겠습니다. 학령기가 되면 아이들의 에테르체가 육체로부터 해방됩니다. ,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에테르체가 해방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지성이든 에테르체든 거기에서 자아가 탄생합니다. 이제 자아는 지성과 통합됩니다. 자유로운 에테르체와 함께 그것이 통합된다는 것입니다. 에테르체 속에서 자아는 지성과 통합됩니다.

 

7-14세의 시기를 본다면 한편으로 의지와 비슷한 뭔가 음악적인 요소가 들어옵니다. 음악의 요소는 바깥 세계에 살기 때문입니다. 의지, , 음악과 같은 요소는 우리의 아스트랄체 속에서 이제 진동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스트랄체는 육체로부터 해방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제 아스트랄체는 몸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아이가 성적으로 성숙하면 아스트랄체가 탄생합니다. 자아는 아이의 그 부분과 연결점을 갖는 것입니다. 전체 과정에서는 사춘기 전반에 걸쳐 자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아는 육체 속에서 내재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끊임없는 참여이자 관통입니다. 인간의 유기체는 자아를 통해서 끊임없이 관통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 그러면 그 속에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예술적인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교육의 역할이란, 좀더 확장시켜봐야 할 텐데 생활양식(lifestyle)과 교육입니다. 라이프스타일과 교육은 두 가지, 어쩌면 세 가지를 일어나게 합니다. 자아가 잡히고 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깊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그것이 일어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개별성이 그들의 운명 속으로 들어온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운명이 그러한 몸을 찾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라이프스타일을 통해서 교육을 할 수 있습니다. 라이프스타일과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또한 반대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영원불변한 나, 유일무이한 내가 몸과 결합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필요성에 관여하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두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적절한 교육과 라이프스타일의 균형을 통해 하늘과 땅 사이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슈타이너는 올바른 교육을 통해서 균형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예술교육의 본질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러분을 아주 압도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유치원, 담임과정, 상급과정 모두에서 여러분은 정말 엄청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이것은 정말 매혹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이 균형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걸 하기 전에 잠깐 교육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멋진 발도르프학교를 한국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일상적인 건물과 다른 아주 멋진 학교건물입니다. 발도르프학교라는 것도 라이프스타일입니다. 그것은 축복이면서 일종의 가면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원하는 걸까요? 그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면 위험해질수도 있는데 말이죠. 여러분들 너무 신경에 거슬리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린다면, 학교의 분홍색 커튼도 라이프스타일입니다. 거기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항상 분홍색 커튼일까요? , 왜 안 되겠어요. 그런데 왜 하필 분홍색 커튼일까요?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분홍색은 아이들의 생명력에 가장 가까운 색이라고 했습니다. 복숭아 색깔이지요.

 

, 이제 제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왜 안 되겠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면 그 경우에는 달라질 것입니다. 밖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면서 분홍색 커튼을 갖고 있다면 그건 도그마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과거와 관련되었지, 미래와 관련된 건 아닙니다. 만약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두세 명의 교사가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열린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플라스틱장난감을 유치원에서 갖고 놀지 못하게 할까요? 플라스틱장난감을 갖고 논다면 유치원이 무너질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갖지 못한다면 위험한 것입니다. 한 유치원교사가 말합니다. “촉감적으로 플라스틱을 만진다는 것은 아이에게 아무 것도 만지는 게 아닙니다. , 나무, 천 등을 만진다면 다양한 실재를 아이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촉감은 에테르체가 육체에 내재할 수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한 감각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주 기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라이프스타일입니다. 그런데 플라스틱장난감에 대한 금지는 있는데 그 이유를 모른다면 도그마가 됩니다. 물론 제가 플라스틱장난감에만 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연결되고 싶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이 3일째 아침인데 이런 과제를 드리고 싶습니다. 영감만 있다면 발도르프교육은 변할 것입니다. 하나의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왜 우리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유치원 담임과정 상급과정에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왜 우리가 이걸 하고 있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작업을 하게 된다면 아주 좋은 자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정통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정통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젯밤에 아주 멋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미도리 선생님이 우리는 우리 학교를 완전히 다시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그 학교가 이벤트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려서, 새롭게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축제만이 벌어지는 학교가 아닙니다. 이것이 여러분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왜 우리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늘

과거 ---------- 상상력/균형 ---------- 미래

지상

 

오늘의 마지막 얘기를 하겠습니다. 교육적으로 하늘로부터 온 영원한 자아를 육체 속에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유치원 선생님들이 여기 많으신데요. 제가 이 말을 하면 싫어하실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오후에 의자나 책상 등 높은 곳에 올라가려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집에 가기 전에 아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손을 뻗고 점프를 합니다. 그런데 이 행위가 교사에게는 내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상황입니다. 생각해보세요. 5살난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아주 무겁게 뛰어내리고 어떤 아이는 아주 가볍게 뛰어내립니다. 몸무게가 같아도 다를 수 있습니다. 훨씬 무겁게 느껴지는 아이가 있고 아주 유연하게 보이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요?

 

여러분은 유치원 시기부터 아이들 근육의 특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근육으로부터 생기는 에너지가 다릅니다. 물렁한 근육이 있고 단단한 근육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유치원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무거운 목소리도 있고 가벼운 목소리도 있습니다. 아이마다 개별성이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가, 덜 들어왔는가도 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돕는 방법은 중요합니다. 잠을 자는 것, 물건을 다루는 것 등을 통해서 관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기질적으로 다르게 접근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7세 이전에는 기질 차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대체로 다혈질이지만 얼마나 자아가 육화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지성이 일찍 깬 아이들에게는 라이프스타일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학교에 들어갈 때, 학교에서는 셈하기, 읽고 쓰기, 형태그리기 등 사실적인 여러 수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에테르체 속에 자아가 제대로 정착하는 과제로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아는 바깥에 머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균형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과제가 있는 것입니다. ,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게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지적인 작업을 할 때 자아는 본성 속으로 빨려들어갑니다. 우리가 뭔가 지적인 작업을 할 때 자아는 몸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습니다.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3,4살된 아이에게 읽고 쓰고 셈하기 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자아가 몸속에 갇히는 걸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사고와 관련된 수학, 기하, 말하기, 음악, 드라마 등을 일찍 가르치면 자아를 몸 쪽으로 끌어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만들기를 하고 그림을 그릴 때 자아는 몸으로부터 풀려납니다. 지리수업이나 역사수업 같은 과목의 본질은 자아가 몸으로부터 이완되게 하고 풀려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역사수업을 이야기 들려주기와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아주 큰 균형을 볼 수 있습니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 어떻게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을까요? 자아가 육체 속으로 들어오면 아이들은 깨어난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지리, 역사, 그리기 등을 오래 하면 아이들은 지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고려해봐야 하는데, 7학년의 기하학 수업에서 어떤 전통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주로 아름다운 꽃 같은 모양을 작도합니다. 7학년에서 우리는 기하의 수학적인 부분을 수업에 가져와야 합니다. 삼각형이 무엇이고 사각형이 무엇인지, 기하학의 법칙도 함께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기하학의 수학적인 법칙을 수업에서 반 정도 배우면 작도를 반 정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고 교육예술입니다.

 

이제 그리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제 기쁘게도 어떤 동료가 놀라서 말하기를, “형태그리기가 주요수업으로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3,4주 동안 이 불쌍한 아이들에게 형태그리기만 수업한다면 그들의 자아는 자기 몸에서 빠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읽기와 쓰기, 셈하기 등의 수업을 하는 동안 형태그리기를 날마다 15분에서 20분 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균형이 맞춰질 것입니다.

 

주류교육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가 탈육화하는(자아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수업을 많이 한다면 오히려 아이들에게 해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과목에는 육화의 수업과 탈육화의 수업이 있습니다. 역사수업에서 너무 많이 이야기해주었다면, 아이들에게 그 사람들이 왜 그걸 했을까?” 하고 지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는 건 육화의 요소이고, 이야기 들려주기는 탈육화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들려주기 때 아이들의 모습을 보세요. 입을 벌리고 완전히 가버렸다는 느낌을 줍니다. (웃음) 탈육화의 모습입니다. 하루에 한 번은 괜찮지만 세 명의 과목교사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좋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아주 집중적인 화학수업을 했다고 해봅시다. 화학수업은 아주 멋집니다. 물질적인 세상을 이해하고 개념화, 범주화, 이론화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게 하는 교사도 있지요. 화학식을 그리는 게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교사도 있습니다. 화학이나 물리 수업에서 실험이라는 감각적인 수업과 개념적인 수업은 육화, 즉 자아를 빨아들이게 하는 수업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또 그림을 그리게 한다면, 발도르프교사들이 하듯이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그림을 아주 아름답게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사들이 의미를 모른다면, 10,11,12학년 아이들에게서 주요수업 공책을 또 하냐?”는 질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노트에 적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균형을 맞추기 어렵습니다. 교사는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라크 북부에 갔을 때 그곳 교육부의 관료도 발도르프학교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그 방식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대화를 통해서 발도르프학교는 모두 다르다, 우리는 서로 다르게 한다, 라고 하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만든 주요수업공책을 보여줬습니다. 우리가 했던 일을 통해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사실입니다. 내일과 모레에는 이것에 대해 더 얘기하겠습니다. 발도르프학교에도 어려움이 있는데, 교사 자신이 갖고 있는 어려움입니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지금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가 왜 아침 리듬활동 시간을 비판했을까요? 왜냐면 우리의 모든 수업에는 균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슈타이너가 말했지요. 여러분은 균형과 함께 수업에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요. 균형을 맞추는 게 수업의 본질이 될 것이라고요. 그러면 수업을 어떻게 해야 풍부하게 할 수 있는지 작은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4구성체에 대해 아시죠? 자아, 아스트랄체, 에테르체, 육체입니다. 발도르프교육은 우리 삶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인간은 4중의 구조입니다. 여러분이 잠을 자면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 사이가 분리됩니다. 육체와 에테르체는 침대에 남고, 자아와 아스트랄체는 정신세계로 갑니다. , 재밌게 해볼까요? 만약 여러분이 몸쪽의 수업만 한다면, 다시 말해 자아가 몸속으로 갇혀버리는 방식으로만 한다면 여러분은 잠의 능력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영혼체(아스트랄체)와 생명체(에테르체) 사이에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잠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업을 잘하면 아이들은 잠자는 밤 동안 자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자아와 아스트랄체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 붙어있지요. 하지만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는 분리될 수 있습니다. 또한 에테르체와 육체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잠잘 때 육체와 에테르체가 분리되면 죽게 됩니다. 자아와 세상의 균형, 자아에 대한 앎과 세상에 대한 앎, 잠과 깨어있음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게 바로 삶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살면서 불면증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나흘 닷새 엿새 잠이 안 옵니다. 그러면 아주 미칠 지경이 되지요.

 

교육을 통해 자아가 육체와 관계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제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교육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것입니다. 유치원 교육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끝내겠습니다. 우리에겐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종이와 도구에 관한 것인데 발도르프유치원에서는 연필을 가지고 선을 그리는 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허락된 것은 이렇게 각진 종이가 아니라 둥글게 다듬어진 종이이고, 오로지 스토크마 크레용으로 뭉게뭉게 그릴 수만 있다고 여겨집니다. (웃음) 하지만 우리는 이 양쪽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6살 아이는 날카로운 까만 연필로 동물의 뼈까지 그릴 수 있습니다. 저는 아마 그럴 수 없을 텐데 아이들은 영혼의 힘, 가슴의 힘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스스로 육체 안에 깊이 빠져든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충동이 있습니다. 자기 속에 내재한 것을 부드럽게 하고자 하는 충동이 있지요. 연필로 날카롭게 그리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뭉게뭉게 그려보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유치원에서 알아야 할 것은 아이를 하늘로 올려보내는 게 아니라 지상의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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