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학교의 리듬 있는 수업 (5)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본문

인지학/2013 AWTC 강연록

발도르프학교의 리듬 있는 수업 (5)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9. 3. 13:25

201352일 목요일 주강연 5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좋은 아침입니다, 동료 여러분. 어제에 이어서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투어를 하실 텐데요. 아마 많은 풍경을 보실 것입니다. 어제 저는 아래 마을로 산책을 하면서 재미있는 풍경들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풍경을 바라보면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풍경이 우리 안에서 마치 메아리처럼 작용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지요. 경이롭게도 우리를 즐겁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많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밖의 경치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화가들 중에는 아주 멋진 바다 풍경을 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 그림을 보면 여러분 자신 속에도 그러한 풍경이 있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저는 그걸 영혼의 풍경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영혼을 풍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급에도 영혼의 풍경이 있고, 아이들에게도 영혼의 풍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 곳곳의 발도르프학교에 가보면 들어가기도 전에 학교의 영혼적 풍경을 보게 됩니다. 정신적인 영혼의 현실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들이 모여 하나의 영혼적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아주 흥미로운 선생님을 한 분 아는데요. 지금은 90세 정도 되었고, 4년쯤 된 발도르프학교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주 오래된 발도르프학교를 졸업하였고, 저와도 같이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북쪽 지역에서 태어나셨는데, 그곳은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엔지니어로 재능이 많고 의지력도 강했지만 불행히도 그분이 9살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종종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어린 여자 아이가 그걸 극복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지요.

 

어릴 적에 그분은 소아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어머니의 친구 중에 한 분이 헤이그에 있는 아주 재밌는 발도르프학교에 가라고 권했고, 어머니는 그렇게 했습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혼란스럽고 제대로 된 수업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아주 영리해서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수업을 힘들어 했습니다. 그녀는 그럼에도 말했습니다. “저는 첫날부터 온전히 행복했습니다. 거기 선생님들에겐 배경과 지식이 있다는 걸 제가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제 아버지가 어디에서 오셨는지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그 아이를 안도하게 해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훗날 발도르프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영혼의 풍경이 보이시나요? 우리는 영혼의 풍경을 먹여살리고 가꾸는 역할을 합니다.

 

일반인간학에는 아주 이상한 문장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교육부 같은 곳에서는 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강한 교육적인 도구는 여러분 속에 있는 사고입니다. 표현되지는 않는다 해도 여러분의 사고는 가장 강력한 교육적 도구입니다.” 여러분, 영혼을 먹이는 영양분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 세계의 발달에 대해 생각하는 것, 인간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그것은 비판적일 수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주적일 수도 있고 아주 땅에 가까울 수 있으며 아주 이상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에 흐르는 하나의 강과 같습니다. 영혼의 풍경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흐름이자,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교사컨퍼런스에 슈투트가르트 대학교의 하펠트 교수가 와서 강의했습니다. 그는 흥미로운 얘기를 했습니다. 실험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것이 컴퓨터 화면에 나오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경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모든 내용을 볼 수 있다는 거지요. 그분은 말년에 암으로 고생했는데, 의사가 힘들어하는 환자인 자신보다 스크린을 보고 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펠트 교수는 이에 대해 더 말할 수도 있었지만, 교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교실로 갈 때는 정상적인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먹은 밥을 생각하고, 오후에 쇼핑할 것을 생각하고, 업무가 너무 많다는 것과 이게 진짜 내 직업일까? 더 나은 걸 찾아야 할까?’ 등등... 그리고 학생들에 관한 것은 스크린을 통해 봅니다. 신경학적이고 심리적인 게 나오는 스크린입니다. 그런 식으로 교실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차라리 이 교사가 들어오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반성할 게 있는데요. 저는 1년간 종교수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의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다른 분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말하려면 제가 했다고 하지 마세요. (웃음) 어느날 저는 그 교실에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그냥 나타났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교실에 교사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아이들은 날뛰고 소란을 피었습니다. 그래서 나 여기 있어, 얘들아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다른 날도 있었습니다. 아주 준비를 잘한 날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교사인 제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교사를 알아보고 교사에게 주목합니다. 그래서 슈타이너의 조언은 아주 실재적입니다. “여러분은 수업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 수업에 들어가서 여러분의 학생이 되어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준비를 잘하고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을 보면 이미 교사가 뭘 하기 전에 아이들의 두뇌가 꽃이 피듯 열립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하는 작업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됩니다. 제가 2년 전에 예를 하나 든 적이 있는데요. 여기 아주 끔찍한 실험이 있습니다. 한 교사가 수학을 통해 실험을 했습니다. 두 아이가 있었는데요. 교사는 한 아이가 아주 재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몇 문제를 가르치고 테스트를 했을 때 성적이 아주 좋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교사는 다른 아이를 가르쳤는데 별로 재능이 없고 관심도 없는 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사는 그 아이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테스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사실 두 아이의 지능이나 학습능력은 똑같은 상태였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차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생각 속에서 그 내면적인 것이 교육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예입니다.

 

, 이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풍경. 이 영혼의 풍경으로 시작했으면 합니다. 이 아침에 제가 하려는 것은 아이들이 더 컸을 때 우리가 무얼 할 것인지, 무얼 도와줄 수 있는지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루비콘 강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대체 그게 뭡니까? 모두 그걸 말하는데, 저는 그걸 일반인간학이 아니라 역사책에서 발견했습니다. 야만족을 정복하기 위해 북쪽 지역을 정복하려 했던 줄리어스 시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주저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이제 강을 건넜고 돌아갈 수 없다. 앞으로 가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슈타이너가 이것을 9-10세 아이의 발달상태의 예로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황금기가 그 시절을 통해서 지나간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은 청동기에 들어섰습니다. 아직 철기시대는 아닙니다. 그 시기는 마침내 아이들을 아름다움과 사랑과 세상에 대한 경험의 시기로 데리고 갑니다. 그것은 변환의 시기이자, 신비로운 사고가 우리 뒤에 있는 시기이며,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어떤 학교는 부모들이 루비콘 시기를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 시기에 아이들은 거칠어지고 말도 안 들어서 여러분을 두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종종 두려움이 있고 불확실성이 있기도 하지만 아주 섬세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여기엔 새로운 오리엔테이션이 있습니다. ‘세상은 세상 그대로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지만 세상은 그대로 있다.’ 어린 시절의 황금기에는 세상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8-9세의 시기에는 눈을 감고도 계단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숨쉬지 않고 백 걸음을 걸을 수 있다. 나는 항상 행복할 수 있다.’ 그 이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요. 내적인 우울함과 불확실성이 생기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영혼의 힘이 세상과 좀더 관계를 갖는 시기인 동시에 영혼의 힘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시기입니다.

 

두 번째 루비콘 강을 건너는 시기는 12세 무렵입니다. 슈타이너의 말에 의하면, 첫 루비콘 강의 시기에는 의지와 관련해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열정이 생기고 지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이때 판단력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 주류교육에서도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다음은 주류교육에서 나온 말인데요. 아주 발도르프적이기도 합니다. 10-12세 아이들은 스스로의 판단력으로 배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주변의 좋은 본보기로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세경이 되어서야 개별적인 지성은 배움의 과정으로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본보기는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요? 주위의 모범, 본보기를 보는 것과 혼자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어린 아이들은 수학에서조차도 좋은 예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계산기 없이도 곱셈 계산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습관이 되어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수학의 한 과정에서 습관이 얼마나 깊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가 어떻게 몸 속에 들어가는지 통찰해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을 보면 그건 모방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제 생명력(에테르체의 힘)은 변화해서 영혼력(아스트랄체의 힘)이 됩니다. 두 번째 시기에는 새로운 모방이 옵니다. 이것은 배움의 자질에 대한 모방입니다. 슈타이너는 이에 대해 다른 말로 표현했는데요. 저학년에서의 배움은 아이들의 기억력을 발달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해부터 하는 게 아닙니다. 기억에서 이해로 가는 것입니다. 기억은 말하자면 주변의 모범에 의해서 형성된 인상입니다. 이제 8, 9, 10, 11, 12학년에 또 새로운 모방이 옵니다. 이해는 교사에 대한 아이들의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에 대해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우선 6,7학년 시기의 두 번째 루비콘 시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시기부터 아이들이 배움에 집중하는 과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과정을 보면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과학적인 과목이 있습니다. 그때 물리가 시작되고, 화학과 대수도 배웁니다. 이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합니다. 예술적인 부분보다 좀더 과학적인 것으로 가게 되고, 그게 새로운 특징입니다.

 

6,7,8학년의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좀더 과학적으로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흥미롭냐면, 두 번재 루비콘 시기에는 단순히 영혼적인 것만 열리는 게 아니라 두뇌, 즉 지성의 과정도 열리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지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세상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정상적인 발도르프교육은 1학년에서 3학년까지 아주 거대한 상상력의 구름 안으로 아이들을 집어넣는다고 하는데요. 천사를 이용하고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를 이용한다고 하지요. 그리고 5학년부터의 경향은 이제 배울 여러 가지가 있고 물질적인 것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반인간학에서는 이와 다르게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저학년의 3년 동안 진정으로 깨어있는 가르침을 해야 합니다. 한 이벤트에서 다른 이벤트로 끌고 가는 게 아닙니다. 물론 발도르프학교는 이벤트(행사)가 많아서 좋지만 수업은 이벤트가 아니어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수업은 깨어있는 과정이어야 하고, 지성적인 면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인간학 14강의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의 수업에서 우리는 바로 상상의 힘에 특히 호소해야만 합니다. 차츰 차츰 발현되는 판단력 안으로 상상을 가져다주는 일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도 되는 반면, - 판단력은 12세 이후로 천천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 어린이가 일곱살이 되어서 쓰기와 읽기로 지성을 발달시키도록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어린이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오해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7세의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지성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또한 한창 판단력을 키워야 할 12살 이후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가져오는 걸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6학년 이상에서 상상력을 가져오는 것은 어떤가요? 좀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왜 그럴까요? 두 번째 루비콘의 시기부터 쭉 지성적인 힘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모든 이기적인 것, 에고이즘은 이 지성과 관련된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일반인간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양성하는 지성은 타성적이고 부패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인간이 지성을 지속적으로 단지 물질적인 표상들로만 채우게 되면, 지성은 가장 쉽게 부패합니다. 그러나 정신에서 얻은 표상으로 지성을 채우면, 그것은 날개가 돋힌 듯 고무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상상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으로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 지성의 힘을 키울 때 자신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커다란 경외심을 갖고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6-8학년 아이들은 새롭게 교사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이 시기 아이들은 아주 독창적인 교사를 원합니다. 뭔가를 그냥 읽어주는 게 아니라 창조적인 무언가를 보여주길 바랍니다. 저학년 때는 창조적인 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5학년 이후에는 교사의 독창성과 창의성이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교사는 자기만의 방법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이론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7학년 시기에 수업에서 지성적인 것만 한다면, 학년말이 되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만 수업을 한다면, 세상과 자신 사이에서 아이들은 관심의 방향이 자기쪽으로만 향하게 될 것입니다. 1925, 첫 발도르프학교에 아주 큰 위기가 왔습니다. 교사들과 슈타이너와의 대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사와 상급학생들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교사는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그 방향성을 교사들이 따라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강의만 했지요. 많은 상급학생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도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슈타이너가 학교에 관여한 마지막 해였는데요. 죽음과 겨울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어떻게 지혜를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슈타이너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100년 동안 그 변형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두 번째 루비콘 시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그 시기는 아이들에게도 큰 변화가 옵니다. 사춘기까지의 교육은 보편적입니다. 그런데 사춘기부터 개별성이 시작됩니다. 이것과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12살 이후에는 많은 상상력으로 수업을 해야 하는 시기인데, 아주 특별한 일이 생겨납니다. 이때부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달라집니다. 소녀와 소년은 12살 때까지는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부터 큰 변화가 생깁니다. 상상해보세요. 이 시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주 멋진 일입니다. 묘사해보겠습니다. 7학년 시기의 소녀가 여기 있습니다. 사춘기의 소녀는 아주 영리하게 행동합니다. 수업에서 자신감도 있고 교실 앞에 설 때 정말 거기에 존재하고 잘 합니다. ‘선생님도 멋지지만 나를 좀 봐봐.’ 이런 자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 7학년 소년이 작문한 걸 발표하는 걸 보면, 소년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건성으로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깨는 축 처지고 목소리는 조그맣고 하는 짓이 아직 어린애 같습니다. 소녀들과 다른 모습입니다. 소녀들은 자기 자질을 잘 압니다. 캠프를 가보면 소녀들은 저기 있고, 소년들은 여기 모여 있습니다. 같이 밥 먹자고 섞이라고 하면 소년들은 우우우우~” 그럽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면 소녀는 내적으로 자아와 영혼 속에 편안한 관계성을 갖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아와 영혼이 서로를 좋아합니다. 마침내 서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녀들은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은 그렇지 못합니다. 소년은 내적으로 자아와 영혼이 서로 이방인입니다. 서로 낯설지요. 가능하면 멀리 있고 싶어 합니다. 조금 과장한다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년들 내면이 뭔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소년들은 타고난 것 자체가 말하는 게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에 비해 소녀들은 더 쉽습니다. 이 시기에 소녀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12살 때 시작하여 학교가 끝날 때쯤 마무리됩니다. 이 시기의 마지막이 되면 소녀의 자아와 영혼의 관계는 더 유연해지고, 소년의 경우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아와 영혼이 더 가까워집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7살과 14살은 각각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가 탄생하는 시기입니다. 이 두 시기의 중간쯤에 9살이 있는데 이때가 어린 시절의 황금기가 끝나는 시기입니다. 그 이후는 청동기 시기입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너무 유럽의 지식과 정신과학 개념을 써서 죄송합니다. 이걸 아시아 측면에서 잘 번역하시길 바랍니다. 폰 박사님이 어제 설명에서 유럽과 아시아 개념의 유사점을 찾은 것처럼요. 슈타이너는 강조했습니다. 0-7세까지 아이는 진정한 왕국에 머물러 있고, 달의 특성과 관련된 시기라고요. 7-14세의 시기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서고, 수성과 관련이 됩니다. 14-21세에는 금성의 시기입니다. 첫 번째 루비콘 시기인 9세부터 2년 뒤 상급으로 가는 두 번째 루비콘 시기인 12세까지를 전사춘기라고 합니다. 보통 이 시기는 잘 잊혀집니다. 너무나 일찍 사춘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이때는 아주 멋진 시기입니다. 여전히 아이이지만 사춘기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지요. 아주 매혹적입니다. 어떨 때는 너무 어린 아이처럼 굴고 어떨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 시기에 소녀들은 말에 열광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영혼력을 조절하길 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딸도 말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하루 하루 말에 관심을 가지다가 14살이 된 이후로는 더 이상 말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모자와 부츠, 목걸이 등에만 관심을 가졌지요. “다른 건 알고 싶지도 않아!” 모두 제가 다 돈을 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웃음) 소녀들이 말을 좋아하는 그 시기에 소년들은 전자제품에 푹 빠져서 전자무사 같은 존재가 됩니다. 쉽게 아주 밑으로 내려갑니다. 이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봐야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적인 성숙함이 이제 영혼적인 성숙함과 발달기간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성적인 성숙함은 예전보다 더 빨리 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성숙함은 더 느리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지난 10년간 연구를 했는데, 청소년기가 훨씬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40년 전보다 어른의 모습이 더 늦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적 성숙과 영혼적 성숙의 불균형에 따른 것으로 기본적으로 이런 경향이 소녀들에게도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 시기의 아이를 어린 아이이면서 동시에 사춘기인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말 매혹적인 일이지요. , 그러면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우리는 이 시기의 아이들을 위해 교육과정을 분리하면서도 또한 유지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한편으로 여러분의 권위를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여러분이 자신들의 친구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그걸 동시에 다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이자 대장이 되어줘야 한다고요. “이렇게 해야 해!”라고 말하면서 또한 손을 잡고 가야 합니다. 제가 6,7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린 아이들은 가지 않는 학교 옆 공원에 축구를 하러 갔습니다. 아이들은 축구클럽에서 하는 것보다 더 잘했습니다. 저는 약간 비겁한 술수도 가르쳤습니다. 왜냐면 친구니까요. (웃음) 하지만 교실에 들어오면 저는 다시 교사가 됩니다. 이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유연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얼마나 교사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리고 두 번째 루비콘 이후에도 모두 상상력이 가득한 수업이 필요합니다. 슈타이너는 일반인간학 14강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의 수업에서는 상상을 낳으면서 교사로부터 어린이에게 전이되는 것도 역시 고무하면서 양성하는 것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교사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 수업 내용을 생생하게 지녀야만 하며, 그것을 상상력으로 들어차게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 수업 내용을 감성적 의지로 관통되도록 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후일의 삶에서도 가끔 완전히 기이하게 작용합니다. 중등 과정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 특히 중요한 것은 교사와 학생 간의 조화로운 공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수업 내용을 상상력으로 채우고 항상 새롭게 형성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초등부와 중등부의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일단 풍부한 상상력으로 형성한 것을 많은 해가 지난 후에 정확하게 그대로 묘사하려고 하면, 그것이 오성적으로 동결되고 만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상상은 필수적으로 항상 생생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산물이 동결되고 맙니다.”

 

정말 멋진 호소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15세에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수업해야 합니다. 이것은 유치한 방식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의 교사이면서 동시에 너희와 눈높이를 같이 하는 친구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한계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어제 우리는 공식적인 학부모의 밤을 갖는 것과 비공식적인 학부모의 밤을 가질 때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여러분의 내적인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슈타이너는 <자유의 철학>에서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생들, 부모들과 어디까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일부의 학부모와만 친구 관계를 맺는 교사도 있겠지요. 교사라는 직업적인 행동에서 이런 관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춘기의 시기는 정말 중요한 나이입니다. 왜 그럴까요? 14세 시기에 노란 분필로 선을 긋겠습니다. 성적으로 성숙한 이때, 다시 말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이 시기에 대해 슈타이너는 새로운 말로 설명했습니다. ‘지상에서 성숙하는 시기라고 설명했지요. 이것이 오늘 아침시간의 주요내용입니다. 슈타이너는 이 시기에 만약 교육을 잘 한다면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한 인간에게서 자라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보통 사랑이라고 하면 남녀간의 사랑, 즉 성적인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좀더 극단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키운다면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이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과학에 따르자면 이 시기 아이들은 세 번째 위계질서에서 나오는 고차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땅에서 살만큼 충분히 성숙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스운 일이기도 합니다. 동창회에 졸업생들이 모입니다. 다들 상급학교 교사에게 갑니다. 그리고 자기 학창시절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들에게 그때의 상급교사는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 첫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학생으로 교사를 바라보면서, 교사가 갖고 있는 지식과 인격을 통해 교사의 진정성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느끼게 된 학생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교사는 학생들의 우상이 되지요. 그것은 경외이면서 그의 인격에 대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개인 공간에 저학년 학생들을 초대하면 아이들은 긴장해서 부들부들 떨겠지만, 상급학년 학생을 초대한다면, 그 공간의 느낌이 교사에 대한 느낌과 같다면 아이는 교사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교사가 자기 지식과 능력과 학생들에 대한 진정성을 갖는다는 건 상급학생들에게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슈타이너는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의 개인성을 교실 밖에 코트처럼 걸어놓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상급교실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걸 다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진정한 모습을 찾습니다. 이에 비해 유치원에 가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유치원 교사가 아이들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면 존재 대 존재로 만난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여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도 교사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주변의 자연환경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그 풍경에는 언덕이 생기고 수풀이 자라고 봄꽃 피는 평원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상급학교입니다. 세 번째 위계질서인 시대의 영은 우리들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수 있게 해줍니다. 여기에서 왜 우리 교육과정 중 9-12세 시기가 정말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탄생부터 어른까지 준비기간 동안,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갑자기 새로운 능력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힘입니다. 그건 두 번째 위계질서인 대천사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대천사로부터 새로운 에너지가 흘러들어 옵니다. 대천사라는 존재는 인간이 본래 자기 안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옵니다. 타고난 고차적인 존재가 이제 내 안에 뭔가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 특질이 없다면 나는 타인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서로 교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인간을 인지하는 과정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다른 사람을 보기만 했습니다. 유치원 시절에는 친구들과 그냥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세를 넘어가면서 아주 다르게 변화합니다. 14세부터는 진정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16살이 되면 대천사Exuxiai로부터 또 다른 새로운 힘이 나옵니다. 대천사가 갑자기 지상의 존재에 참여하길 바라면서 그 존재에 힘을 줄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때 육체는 유연해지고 개방되면서 동시에 경직되고 단단해집니다. 열리면서 동시에 경직됩니다. 이때 이런 순간을 만나게 된다. 어떤 순간인가요? 다시 한 번 사과말씀을 드립니다. 계속 서양 개념을 써서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문화에서도 한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서양에는 잔 다르크의 예가 있습니다. 신이 부여한 과제를 가졌다는 영감을 잔 다르크는 정확히 16살 때 받았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샤갈의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예술가 샤갈은 지체장애자였습니다. 16살 때도 계속 저학년에 있었습니다. 샤갈은 평소처럼 항상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16살에 어떤 친구가 너 정말 예술가 같구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친구가 나 보고 예술가 같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니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라고 하였습니다. 샤갈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다시 물어보자, 교사는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란다. 너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단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삶이 변했습니다.

 

반 고흐에게도 비슷한 예가 있는데요. 그는 원래 목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가족과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그 시간을 몹시 힘들어했습니다. 학교를 그만 둔 그에게 삼촌은 헤이그에 있는 화랑에서 일하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삼촌과 약속했습니다. 삼촌은 고흐에게 절대 도시로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삼촌은 고흐가 밤에 시내에 나가 나쁜 물이 들까봐 걱정했습니다. 고흐는 지붕 밑에 앉아서 삼촌이 갖고 있는 그림을 모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멋진 재능이었습니다. 위대한 화가 반 고흐가 예술가로 탄생한 시기이며, 그때가 바로 16살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멋진 순간의 리스트가 잔뜩 있습니다. 에밀 몰트도 16살 때 자신의 일생이 가게 될 방향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처럼 16살이란 학생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어떤 충동이 오는 시기입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교육과정의 내용을 보면 학년마다 무엇이 인간의 발달인지 보여주는 파노라마가 있고, 거기에 풍경이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우리의 노력 속에 영혼의 풍경이 있습니다.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힘에서, 우리가 참여하는 방법에서, 그리고 새로운 교육방법을 만들어가는 이곳에서 영혼의 풍경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칠판에 썼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 속에 이러한 풍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것인데요. 이것은 아주 멋진 자질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지식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축복받은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