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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학교의 리듬 있는 수업 (7)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본문

인지학/2013 AWTC 강연록

발도르프학교의 리듬 있는 수업 (7) -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9. 3. 13:27

201354일 토요일 주강연 7

 

크리스토프 비히허트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동료 여러분.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컨퍼런스 첫째 날과 둘째 날 교수방법의 세 가지 방향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발도르프교육은 새로운 교육의 패러다임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묘사하자면 그건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사춘기까지의 교육에서 발도르프교육의 교수방법은 위에서 아래(하향식)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가는 것(상향식)이라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유치원과 저학년에서부터 기본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르칩니다. 발도르프교육은 온전한 깨어남을 위한 교육과정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설명을 드리자면, 읽고 쓰는 배움의 아주 구체적인 과정에서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처음부터 읽지 않고 먼저 쓰기부터 합니다. 그 속에서 읽는 기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올리버 색스(Oliver Sachs)라는 사람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경과 의사로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이름의 책을 내기도 했죠. 이 책의 이야기들은 모두 저자가 의사로서 직접 치료에 참여하여 얻어낸 예외적인 경험들입니다. 그가 최근에 낸 책의 제목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하는데요. 그 연구에 따르면 한자를 가르치는 나라에서는 난독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국과 일본의 학교에서는 글자를 배울 때 아이들이 그 내용을 알기도 전에 글자부터 씁니다. 한자는 상형문자니까 그린다고 해야겠죠. 글자를 처음부터 그리는 것, 이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난독증이 없습니다.

 

글자를 그릴 때 여러분은 두뇌의 아주 오래된 운동체계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온전한 방식입니다. 두뇌에서 운동능력을 담당하는 부분은 오래된 것이고, 읽기 능력을 담당하는 부분은 비교적 젊습니다. 운동능력을 담당하는 부분이 쓰기를 먼저 배우고 읽기 능력을 나중에 배우면 난독증이 없습니다. 먼저 행위하고 다음에 이해한다는 것은 슈타이너의 관점과 같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의 한 면입니다.

 

발도르프교육은 위에서 아래로 오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가는 방향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그리는 것과 같은지 보십시오. 무엇이 내려오고 올라가나요? 아래에서 위로 가는 것은 행동, 감정, 그리고 배움과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영혼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과정에서 사용하는 것은 영혼의 도구입니다. 반면 상급과정에 가면 뭔가를 하기 전에 위에서 아래로 오는 것도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영혼이 아니라 자아와 관련된 것입니다. 어떻게 자아가 내려오고 올라가는지 아시겠지요.

 

이렇게 그려진 선들 속에서 여러분은 이러한 지식을 적용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2 + 2 = 4와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가지고 설명하려 합니다. 왼쪽은 영혼의 것이고 오른쪽은 정신적인 실재의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육체적인 것도 있지만 이것을 도식적인 걸로 보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인지학을 이해할 때는 항상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고정관념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어제 쉬는 시간에 샤샤 박사님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유치원 아이들, 그리고 저학년 아이들은 비율적으로 머리가 크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장의 과정이 머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항구가 되어 모든 발달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가서야 균형을 이룹니다.

 

어제 12살의 아주 놀라운 시기에 대해 말했는데요. 12살은 심리학의 용어에 따르면 전사춘기의 시기입니다. 전사춘기는 사춘기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마지막으로 키에서 큰 성장이 벌어집니다. 소년들은 그 시기에 아주 키가 커집니다. 12살부터 이어지는 새로운 성장은 이제 더 이상 머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닙니다. 이제 사지에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성장 속에 도약이 있는데, 발에서 나와 다리와 팔로 갑니다. 아주 정확하게 반대방향입니다. 12살부터 시작되는 길이성장은 이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어릴 때는 모든 발달이 머리에서 아래로 내려왔는데 사춘기가 되면 발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사춘기 초기에는 특히 소년들이 자기 사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길질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게 됩니다. 아직 자아가 새로운 과정에 잘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지점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폰 박사님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만약 자아가 교육을 통해 너무 많이 들어온다면, 다시 말해 단지 지적인 것만 강조되어 조기교육부터 대학교육까지 학구적인 교육 위주로 된다면 마지막 결과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이가 자기 속에서 무능력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물질적인 것만 보게 됩니다. 다음으로, 만약 자아가 너무 많이 들어오면 육체가 인간의 발달에 특정한 방향성을 줍니다. 이상적인 게 아닌 몸에 필요한 것만 생각하는 생활방식을 갖게 됩니다. 일종의 갇혀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자폐적인 상태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세뇌와 같습니다. 그리고 한 생각이 섬광처럼 폰 박사님에게 왔는데요. ‘우리도 인지학을 통해 세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제 주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학을 잘 사용할 수도 있고, 인지학으로 세뇌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유럽만이 아닌 전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인지학과 발도르프교육이 무엇인지 질문을 계속 제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것을 하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세뇌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발도르프학교는 일종의 도그마적인 폐쇄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 육화하기 위해 지구에 왔다면 단단한 무언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주요집중 수업은 발도르프학교의 단단한 특징인데, 우리는 늘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애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육과정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 문화권에서 이게 적절한 건지, 우리 문화권의 특색에 맞는 것인지. 제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요정들의 기질에 따라 빨강 파랑 노랑 등 여러 가지 모자를 쓰는데요. 이런 모양입니다. 어떨 때는 종이가 붙어 있어서 소리가 나기도 합니다.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이나 태국의 요정과 슈투트가르트의 요정은 같은 요정일까요? 중국이나 일본의 요정은 말할 것도 없겠고요. 지역마다 요정의 모습도 아주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같은 불의 요정, 공기의 요정이라 해도 다를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다시 말해 우리가 , 무엇을?”이라는 질문을 계속 한다면 우리 문화권에서는 어떤 것을 써야 할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원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평화주의자들은 하나의 원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림형제 동화는 독일을 위한 걸까요, 전세계를 위한 것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직면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줄 때 여러 요소를 찾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동화가 인간의 원형을 보여주는지, 두 번째는 인간의 발달을 잘 보여주는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여러분의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 아프리카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여러분이 그 두 가지 요소를 찾을 수 있다면 아주 다른 곳에서 온 것이지만 원형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다른 문화권에서 온 것들을 이번에 들었을 때 저는 유럽 사람이지만 편안하게 들었습니다.

 

그림형제 이야기를 들려줄까, 우리 문화 안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러한 고민은 인간의 원형과 인간발달, 그리고 세 번째가 있는데요. 선이 늘 마지막에 악을 이기는가와 관련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화, 전설, 동화 속에서 인간의 원형을 보고 그 속에 발달이 있는지, 그리고 발달 속에서 선과 악의 투쟁이 있고 마지막에 선이 승리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동화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주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동화는 학교가 없던 시절 살아있는 교육을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기에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게 동화라는 것입니다. , 이야기는 삶을 다루고 대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개념은 우리에게 아주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화권에서 돌아보십시오. 저도 아주 많은 동화를 봤습니다. 앞의 세 가지 질적 특성을 갖고 있다면 아프리카 동화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슈타이너도 말했습니다. “그림형제의 이야기가 다 교육적으로 좋은 건 아니다. 200여 가지는 좋지만 거기서도 구별해야 한다. 주인공이 왜, 무엇을 하는지. 인간에 대한 원형, 발달단계, 선과 악의 투쟁 속에서 선의 승리가 있는지. 이러한 단순한 이유로 결정할 수 있다. 어떤 동화가 아이들에게 질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

 

2-4학년 수업과 연관해서 창조신화도 이번에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 문화 속에서 어떻게 고유한 역사를 다룰 수 있을지, 물론 개별화해야겠지만 그 교육과정이 아이들의 전반적인 발달과정에 잘 맞아야 한다는 건 상기되어야 합니다. 그 교육과정 속에서 아이들 발달단계를 반영하는 부분이 늘 있어야 합니다. 주류교육과 관련해서도 볼 수 있는 것은, (이제 우리의 상식이 되었는데요) 사춘기까지 아이들의 발달법칙이 이제 전세계적으로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의 발달단계를 반영하는 교육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문화와 나라에 따라 개별화하면서도 아이들의 발달단계를 잘 반영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강사들이 전념하는 것은 새로운 교육과정인데 이제는 더 이상 유럽의 문화적인 것에만 치중하지 않고 정말 전세계적인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강연에서 영혼의 풍경에 대해 얘기했는데요. 이제 발도르프교육은 국제적인 것입니다. 결코 문화적인 제국주의가 아닙니다. 물론 발도르프교을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유럽에서 온 충고들을 엄격하게 따르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발도르프교육은 문화적인 제국주의를 펼치는 게 아니라 전세계적인 아이들의 발달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의 여러 교육적인 모습에서 제국주의적인 것이 숨어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우리의 주제가 아닙니다.

 

이제 오늘의 주요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요. 아주 단순한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만약 전체를 바라보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발도르프교육이 무엇인지, 인지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거대한 걸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실재가 발도르프교육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전체에 다가가기에는 너무 작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00여 년 동안 그 생각을 지상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스스로는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나는 어떤 인생의 과제를 갖고 있는가?’ 제 인생의 과제는, 힘든 일이긴 하지만 발도르프교육의 이상을 아이들의 발달과 관련해 이 땅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도록 공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수많은 라이프스타일(생활방식)을 경험해왔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삶의 에너지 속에서 여전히 주류문화에 대항해 일부분은 수용하지만 전반적으로 주된 흐름을 거스르며 노를 젓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흔히 모든 국가에서 발도르프교육을 반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건 주류와 대항하는 일에서 순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정신이 두 얼굴을 드러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모습은 우리 시대의 무거움입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아주 무거운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악몽입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우리의 악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에너지로 충만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무거운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합니다. 조금씩 주제에 다가가고 있는데요. 우리는 지금 한국에 있습니다. 반 세기 전에 한국은 어떠했나요? 지금과 아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라는 학자가 아주 흥미로운 책을 썼지요. 오래된 책이긴 한데 <3의 물결>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인류의 커다란 흐름이 기술의 발달과 함께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집트에 이어 그리스 문화가 탄생했고 로마시대로 이어집니다. 앨빈 토플러는 기술의 발달에서 절대로 인류에게 온전하게 도움이 되지 않는 기술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고도의 기술적 발달이 있었는데 그것은 전쟁 때만 필요한 기술이었습니다. 전쟁이 없으면 기술도 사라집니다. 그리스도 탄생 이후 우리는 2013년에 있습니다. 산업혁명이 있었고 기술은 끝도 없이 솟구치며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그림입니다. 그런데 리듬과 관련된 것이 없습니다. 치명적인 열과 같은 것입니다. 어디에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부분에서 세 가지 질적 특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물결은 인간의 근육을 대신하는 기술이었습니다. 말이나 소 등의 힘을 이용해 인간의 육체적인 에너지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기계를 통해서 대체되었습니다. 이게 첫 번째 물결입니다. 두 번째 물결은 서로가 서로를 연결하는 기술을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라디오나 티브이가 그 예입니다. 이러한 기술이 인간을 소통하게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산 위에 봉화는 없습니다. 전화만 있으면 됩니다. 세 번째 물결은 우리의 지성을 대신해주는 기술입니다. 기계 속에 지성을 넣었습니다. 지성은 이제 우리의 사고를 대체합니다. 아주 놀라운 것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지성의 역할은 지나치게 열정적입니다.

 

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인지학계의 사무총장 같은 친구인데, 이름이 쉴러입니다. 이 친구는 여행을 많이 하는데, 차의 네비게이션에 GPS가 달려 있습니다. 주소를 누르면, 여자 목소리와 남자 목소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쉴러 선생님이 그 네비게이션을 몇 달 쓰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길 찾는 능력을 잃어버렸어유럽에서는 그런 경험이 많은데요. 어떤 새로운 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면 중앙역이 어디에 있고 길들이 어떻게 있는지 찾아야 할 것입니다. “6학년인 너희들 생각에는 북쪽이 어딘 것 같니?” 하고 여러 아이들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아이들 내면에 방향성이 있다는 걸 알 것입니다. 아이들은 북쪽을 잘 압니다.

 

세 번째 물결에 대해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학생들이 계산기를 사용한 것에 대한 연구결과가 있는데요. 수학이 점차 단순해져서 이제는 사고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손으로 조정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제가 이런 걸 알려드리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1900년대 2000년대 그리고 현재, 급격히 발달해가는 기술혁신 속에서 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1919년 발도르프학교가 생겼습니다. 1900년도에 인지학이 생겼습니다. “19세기 초에도 물질주의가 있었는데 왜 그때 생겼나요?” 하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정신과학에서 이 시기는 지난 5000년 동안 개인의 마음이 가장 가려진 시기, 더 이상 인간의 마음이 정신적인 것과 연결되지 않고 연결성이 사라진 시기에 정확히 슈타이너가 나와서 인지학을 말했고 발도르프학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인류의 발달에서 문제가 되는 것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기술의 발달을 거부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 옆의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거울과 같은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기술의 발달은 이렇게 아래로 가는 방향을 가져옵니다. 인류를 끝을 모르는 아래로 내려가게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정신과학이 실재화되기를 더 이상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균형을 꾀해야 하고 그게 우리 임무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술을 물론 사용해야 하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는 곳에 꼭 인간을 참여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발달시키려는 지성 속에서도 인간을 참여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임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건 세뇌가 아닙니다. 개념적인 것만이 아니지요. 이것을 우리는 마음의 양극성을 보이는 교육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컴퓨터처럼 생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우리는 아이들에게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옆에서 아이들이 살아있는 사고를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유연한 그 사고가 다른 이들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자질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질은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것에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처벌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각은 유연함을 특징으로 합니다. 물론 주류교육에서도 그런 노력이 보이는데요. 살아있는 사고의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의지와 연결되는 부분에서만 옵니다. 1+1, 1+0, 이런 것이 아닙니다. 슈타이너는 살아있는 사고는 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에테르체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예술은 그 전제조건으로서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삶의 습관에서 예술적인 접근방법은 우리 사고의 유연함을 촉진시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오로지 살아있는 사고 속에서만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주제의 핵심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들의 생명력 속에 유연함을 가져다주려고 한다면, 그리고 그 힘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 힘과 함께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교사는 역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내적인 유연함을 우리 사고 속에 갖고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아주 정확한 사고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수업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을까요? 지속가능한 건강을 교육을 통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사들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교사가 이렇게 말한다면 정말 이상할 것입니다. “아이고, 얘들아 질문은 너무 많이 하지 말아라. 너희들을 건강하게 만들려고 내가 너무 과로해서 답을 해줄 수 없구나...”

 

지금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영역은 도그마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 보호는 우리가 폐쇄집단이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도르프교육 집단에서 벗어나 항상 생명으로 역동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비밀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모든 개인에게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서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발도르프교육의 성장에서 주요한 이슈는,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그것은 학교가 계속 발전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회적인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가 첫 번째 과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같이 일할 수 있는가입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지시가 내려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일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학교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학교를 처음 시작한 초기교사들이 있고, 새로운 교사들이 옵니다. 새로 오는 분들은 직업을 찾으러 온 교사입니다. 여기에 양극성이 있습니다. 갈등이 발생합니다. 발도르프학교에는 여러 가지 양극성, 어려움이 있는데요. 교사 스스로 달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부모들의 압박이 있고, 교사들의 단결 문제가 있으며, 신규교사와 기존교사, 담임교사와 과목교사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상급교사와 별로 발도르프적이지 않지만 자기 분야에서 최고이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서 아주 열정적인 교사들의 갈등도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입니다.

 

교사들 간에 서로 그것은 올바른 학교의 성장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기존교사와 신규교사들은 각자 이렇게 느낍니다. 학교가 원하는 바대로 가지 않는다고요. 따로 모임을 만들어서 각자 이야기 나누고 회의에 가서 말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해요.”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학교의 의사결정 과정이 몇몇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미 결정된 것이 나누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교사회에는 교사를 채용하고 해고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채용과 해고는 교사들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도 큰 어려움입니다. 해고는 여러분 학교의 지하실과 같습니다. 이런 일은 교사들을 분리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채용과 해고는 적어도 제안자 3명이 필요합니다. 깊은 책임감을 가진 사람, 학교의 발달과 깊이 맞닥뜨리는 사람 몇몇 외에 일과 책임이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책임과 결과는 모두 교사회의 숙제가 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일을 나누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상급교사를 한 명 채용한다고 합시다. 발도르프교사로서 경험은 없지만 아이들과의 수업을 아주 잘할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채용한다면 여러분의 책임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급에서 채용의 책임은 채용 순간부터 생깁니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분의 멘토가 되어야 합니다. 이틀 전 말한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발도르프 교사교육을 받지 않은 분을 채용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발도르프 교사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런 분을 잘 멘토링한다면 그분은 정말 멋진 발도르프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커뮤니티가 잘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성공적입니다. 그렇지 않고 선생님은 물리실에나 가 계시죠.”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영혼의 사고에서 아주 유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 아실 거라고 봅니다.

 

여러분이 신규교사를 시간제로 채용했다고 해보죠. 그런데 오래된 전통에 따르자면 시간제로 누군가를 채용했다면 풀타임으로 그분이 일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10시간만 일하면 되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우리가 가르치는 것 너머의 것에 대해서도 그 교사와 이야기 나눠야 합니다. 여러분은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교사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나요? 각자가 이런 저런 일에 참여하고자 한다는 스케줄표를 짤 수 있어야 합니다.

 

발도르프학교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도 심각해질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사회에 교사 30명이 있다면 학교의 모든 책임이 서너 명의 교사 머리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책임을 다 떠넘기고 나머지 교사는 모두 행복합니다. 그냥 학교에 적당히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체 교사회의 문제가 됩니다. 무언가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지는 교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교사회의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교사였을 때 교사회에 누가 기꺼이 이 일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하고 말하면 완벽한 정적이 흐르곤 했습니다. (웃음) 여러분의 학교도 그렇군요. 이 예만 봐도 발도르프운동이 전세계적으로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겠지요? 차이점이 있나요?

 

여름방학 후에 약간 기운이 나면, 할 일 목록이 쭉 생깁니다. 목록은 빨리 채워집니다. 그 회의를 주제하는 분은 아주 행복합니다. 목록이 다 차니까요. 그리고 그걸 벽면에 붙여놓습니다. 다음 주에 보면 아이들이 놀고 있는 학교 안에서 아이들을 지켜봐줄 어떤 교사도 없습니다. 그냥 어떤 교사도 없습니다. 잊어버린 게 아니라 너무 바빠서 그렇습니다. 한 교사가 체구가 아주 큰 체육 교사에게 선생님이 지금 아이들을 돌볼 시간입니다. 그게 교사회의 결정입니다.” 그런데 체육교사는 4주 후에 저 그 일을 못하겠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일을 그만 두겠다고 말합니다. 이 일은 정말 어렵다고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시작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것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교사들을 만나면 간단한 질문을 합니다. “어떠세요?” 여기에는 사실 엄청난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단지 어떠세요?” 하는데도 거기에 어떤 몸짓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얼 가르치고 싶은지, 가슴으로 서로를 완전히 만나야 합니다. 투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조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학교의 미래를 어떻게 디자인하고 싶은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간단한 슈타이너의 개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유럽의 정신과학 개념을 가지고 와서 유감입니다만 인간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개인이 공동체에 잘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 공동체는 발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구성원 각자가 잘 참여했을 때 생기는 에너지는 세 번째 위계질서에서 오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의 목표와 헌신이 여기에 있습니다. 고차적인 자아로서 개별적인 에너지는 관계를 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여러분의 수호천사라고 얘기합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고차적인 자아와의 관계를 풍요롭게 한다면, 예를 들어 하루를 돌아보고 명상을 해서 이 관계를 풍요롭게 한다면 그것은 의지의 힘이 되고 생명력이 되어 여러분에게 돌아올 것이라고요.

 

관계는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가야 합니다. 각자가 노력해야 사회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첫 걸음을 떼어야 하지요. 여기에서는 물질적인 힘이 아니라 영혼적인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게 용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첫 번째 발걸음은 그 에너지 속으로 걷는 것이자, 마음을 다해서 같이 일하는 것이며, 서로에게 정말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어떠십니까? 화학선생님이 갖고 있는 멋진 기술에 대해 정말 마음으로 존중하십니까? 수학선생님의 수학에 대한 엄청난 기술을 정말로 존경하고 계십니까? ‘수학선생님은 어떤 면에서는 약간 이상하기도 하지만, 수학에서는 정말 엄청난 선생님이야.’ 그래서 기꺼이 같이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갖추어진 조직에서 뭔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해 보이는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뜻을 모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로 우리는 용기를 내어 함께 마음을 나누어야 하고 그럴 때 보상이 옵니다. 그래야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3년 뒤에 상급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됩니다. 개별적으로 내가 집어넣는 에너지와 새로 들어오는 다른 교사들의 에너지, 이것과 이것이 합쳐지면 시간의 틀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교사회에서 개개인의 자질이 됩니다. 교사회 속에서 우리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거기에서 개별성이 나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정신과학에서는 이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지혜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 계시는데 이 일이 너무나 힘들고 지친다고 말할 때는 여러분이 개별의 차원에서 이 일을 안 했다는 것이 됩니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에너지를 더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만약 서로에게 용기를 주지 못한다면 용기는 두려움이 됩니다. 너무 간단한 일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일을 하고 나는 내 일을 하겠다이런 식으로 지낸다면 여러분은 매일의 일 속에서 두려움으로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엔 기쁨이 없습니다. 용기란 행동의 힘입니다. 용기내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그냥 지나가게 되고 그저 기다리게 될 뿐입니다. 여기에 주저함이 생깁니다.

 

이러한 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진정한 방향성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저 하던 일을 할 뿐입니다. “상급을 하려면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하죠.” 이건 방향성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우리 공동체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여기서 여러분이 보는 것은, 인지학을 통해 아셨을 텐데요, 학교를 이끌어가는 것은 한 사람의 지도에 따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할 필요는 없겠지만 서로에게 영양분을 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개별적인 고차의 존재들이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동등한 입장을 가지고 이런 양극성의 문제를 보고 또 해결하려 한다면 새로운 자유와 자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을 열심히 하는 교사가 충분히 있다면 발도르프학교는 빛을 가지고 사회로 내뿜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부모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긍정적인 빛의 발산이 있는지, 그냥 매일 매일의 일을 하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이건 아주 힘든 일입니다. 인지학에서 전형적으로 말하는 건 인지학이 사회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지학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위해 가능합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지도적인 그룹에서만 가능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일주일간 우리의 일을 했습니다. 우리 매일의 일상생활에 주어지는 도움을 통해서요. 이것이 우리 매일의 삶입니다. 매주의 생활, 끝없는 삶, 그리고 시간을 초월한 삶이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끝없는 노력 속에서 간단한 힌트를 주었습니다. 그 지식은 아주 경이로운 것입니다. 믿지 못할 정도로 고차적인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작년에 중국분들과 함께 컨퍼런스를 하면서 그린 것인데요, 여기 하나의 집이 있고 7개의 미덕이 있습니다. 이 미덕들이 우리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1) 상상력 2) 용기 3) 책임감 ......

 

이제 우리에게는 뒤에 숨어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진실하게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위한 발전의 가능성이 있어야 합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길 우리가 학문적인 어떤 일을 할 때 날마다 감정생활을 예리하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영혼적인 것도 예리하게 가꿔야 합니다. 그러면 하루가 아주 편할 것입니다. 상상력과 용기, 영혼적인 책임감, 이 세 가지가 아주 높은 차원의 자질입니다.

 

이제 하위의 책임을 보겠습니다. (위 삼각형, 아래 사각형) 남자든 여자든 주도성을 갖는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십시오. 왜냐면 우리는 세상을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실 구석구석에 대해서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상에 대한 충실함을 갖춰야 합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특별히 충실함이란 방법론에서 더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머가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우리 각자가 발달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아주 신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어떤 분과 짧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우리 교사회는 오랫동안 관계를 가져왔다.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부정적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일어날 수 없다.” 여러분이 아주 슬프더라도 교실에 갈 때는 신선함을 갖고 가십시오. 교사회의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분을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일상생활 속에서의 미덕입니다. 재미를 드리기 위해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도성이란 담즙질로 변할 수 있는 성향입니다. 주변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은 다혈질의 경향이 있고, 충실함은 점액질의 변형입니다. 아주 좋고 신선한 분위기는 우울질이 아주 멋지게 변형된 것입니다. 우울질은 공감이 아주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자질을 모두 계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이게 마지막 자리인데 저는 여러분의 용기와 에너지에 감명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 바라는 건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여러분들 삶에서 찾아나가시고 잘 지켜내시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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