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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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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

루돌프 슈타이너는 누구인가?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4. 10.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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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는 정신적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통찰력이 뛰어났으나, 젊어서는 정신세계를 지각하는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잠시 접고 인문학과 과학이라는 대학의 학문 분야를 정복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준비를 마치자, 그는 그 시대의 문화생활에 빠져들어 19세기 말 물질주의의 광휘와 한계를 직접 경험했고, 동시에 물질주의가 부딪힌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갈 길을 찾는 데 몰두했다. 그 길은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이자 전체론적(holistic) 과학자 괴테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맞물려 철학사를 근본부터 다시 읽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도 슈타이너는 항상 정신세계의 실재 안에 서 있었다. 그의 정신적 능력은 한 번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인류의 진화하는 의식과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영속적 지혜를, 현대의 정신 방향에 알맞게 합치시킨다는 자신의 임무를 언제나 인식하고 있었다. 외견상 그는 급진적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로서 대중강연을 했다. 그리고 내적으로, 개인적으로 그 자신의 비전(秘傳) 입문을 위하여 19세기 말의 신지학 및 신비주의와 초기적인 교분을 맺으며, 죽은 자들 및 장미십자회의 맥을 잇는 유체이탈(out-of-body experience)의 대가들과도 의미심장한 조우를 가졌다.

 

그가 정신세계를 통해 알게 된 자신의 과제는 과학적 의식과 정신적 의식의 합일이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인식의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인식의 위기는 일반적으로 말해 정신이 사실상 부인되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됐고, 아직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오늘날까지도 정신의 실재는 과학적으로 불가해한 영역에 위치한다. 따라서 과학은 인간 정신과 영혼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기는가? 과학뿐만이 아니라 철학과 심리학에서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배제된 이런 질문들은, 점점 더 장황해지고 무의미해져 가던, 당시 (아마 지금도) 꺼져가는 종교의 몫으로 넘겨졌다.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 슈타이너의 과제였다. 감각에 의존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는 사고하는 의식이 감각과 기존 개념세계의 문지방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들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이들 세계에는 수용적이고 직관적인 사고활동이 통용되었다. 이를 우리는 살아 있는 사고, 실제적인 사고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고는 물질세계를 포함하여 정신세계들을 인식하는 데로 열려 있었다. 전통적으로 정신적 스승이 대중을 상대로 가르침을 시작하는 나이인 마흔이 가까워질 무렵, 슈타이너는 이 모두를 완수했다(특히 〈진리와 과학〉, 1892; 〈자유의 철학〉, 1894에서).

 

하지만 그는 가르침을 시작하기 전에, 결정적인 정신적 비전(秘傳)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그의 길은 그가 직접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세계로의 다리를 다시 놓는 급진적인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많은 것을 달성했다. 의식을 새로이 확장했고, 인간의 더 높은 자아, 즉 참 '나'의 불멸성을 직접 확인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선입견과 기존의 문화 권력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당시 기독교의 가르침과 실천 양식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치 유혹의 광야에 자신을 내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은총이 찾아왔다. 1898년에서 1899년에 걸쳐 그는 “정신적 직관과 함께 한 기독교의 진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그는 “일상의 현장 이면의 내적 투쟁"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런 내적 시도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주의 투쟁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점차 서광이 비추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회고한다. “진정한 기독교에 대한 의식적인 이해가 내 안에서 움트고 있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 이러한 이해는 더욱 깊어졌다. 세기가 바뀌기 전에 간단한 내적 시험이 있었다. 이런 경험으로부터 마침내 나는 가장 심오하고 장엄한 인식의 향연 속에서 정신적으로 골고다의 신비가 실재하는 가운데 있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집필을 계속하며 노동자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슈타이너는 마리 폰 지버스(후에 그의 아내가 됨)를 만나면서 차츰 신지학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1902년 그는 독일 신지학협회의 사무총장이 되었고, 1913년까지 신지학 내에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 해 2월에 신지학협회를 떠나야 했던 그는 인지학협회를 설립하여 1925년 사망하기 전까지 강연과 저술, 교육을 계속하며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실만을 가르쳤다. 사실 괴테와 관련한 경험과 첫 번째의 괄목할 만한 철학적 발견에 기초한 그의 이력은 끊임없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직접 이야기한 것처럼 슈타이너는 처음부터 인지학자였고 인지학을 가르쳤으며, 한 번도 여기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슈타이너가 실천하고 가르친 것이 인지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돌프 슈타이너와 인지학, 이 둘은 서로 같은 말이나 다름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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