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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7. 30. 17:05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지각 또는 감각 능력과 이를 토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판단에서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감각 -> 판단 -> 해석의 과정으로 세계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연구와 동일하다. 이러한 앎의 과정을 인간중심적으로 절대화하면 실재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라거나 실재는 모두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라고 오해할 수 있다.

 

감각 -> 판단 -> 해석

 

흄과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정보는 우리의 감각들로부터 나온다라고 믿으며, ‘사물이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마당이 젖어 있는 걸 보고 비가 왔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우리가 상상한 해석일 뿐이다. 화분에 물을 주면 흙이 젖을 거라는 걸 아는 것도 역시 우리가 상상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감각 -> 판단 -> 해석이전에 존재하는 지시물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칸트는 실재가 있다고 믿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실재란 우리가 감각하고 판단하는 대상에 관한 해석적 자료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과정은 현상(phenomena)의 영역이었다. 그에게 실재의 대상 또는 사물 그 자체, 즉 물자체란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는 실체(noumenon)의 영역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물자체가 우리의 의식을 넘어서며,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재 세계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자신의 실재를 우리가 창조하고 있다는 서양철학의 주류적 사고가 담겨 있다.

 

우리가 빨간 사과를 한입 베어 물어 맛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사과가 참 빨갛다거나 사과가 새콤달콤하다라고 판단하고, ‘빨갛게 익은 사과는 맛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인식과정이다. 그런데 사과라는 실재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각 -> 판단 -> 해석과는 상관없이 사과라는 사물이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사과처럼 우리가 감각 정보를 만들어낼 때 지시하는 사물이 바로 지시물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인식의 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지시물 -> 감각 -> 판단 -> 해석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지시물을 제거한 채 상대주의로 빠져버렸다. 그들은 우리는 오로지 해석을 할 뿐이고, 모든 해석은 상대적이며 잘못된 해석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대주의의 귀착지는 허무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빨간 사과를 두고 파랗다고 한다거나 사과맛이 짜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해석이 아니라 틀린해석이다.

 

그렇다면 사과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다시 말해, ‘내가 감각하고 있는 저 지시물을 형성하는 것은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사과가 존재한다는 것을 뒷받침해줄 기제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다. 우리는 먼저 사과의 무게와 색감, 형태 등을 살피는 방식으로 자연적 수준에서 탐구할 수 있다. 또 이 사과의 종류 및 품종개량의 역사적 측면을 탐구할 수 있고, 사과를 재배한 농부와 배달해준 운반기사, 매장의 판매직원 등을 조사할 수 있다. 그리고 사과의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사과의 식물학적 위상을 찾아볼 수도 있겠다. 이뿐 아니라 문화적, 종교적 수준에서도 사과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수준들을 존재론 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연구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의 해석이 실재를 창조한다는 관점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알게 되는 현상적 표현으로서,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사과를 존재케 하는 발생 기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감각하고 판단함으로써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이다. 우리가 알거나 알지 못할 수도 있고, 감각하거나 감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 실재의 보편적 발생 기제가 세계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기제가 현상적 사건의 가능성을 창조하며,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경험적 자료를 해석한 것이다.

 

비를 내리게 하는 실재의 보편적 발생 기제는 세계에 존재한다. 그러나 기제가 있다 해도 비가 내리는 현상적 사건은 발생할 수도,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비가 내린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존재의 세 영역, 즉 경험의 영역, 현상의 영역, 실재의 영역 중에서 가장 작은 경험의 영역에 국한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실재의 영역 현상의 영역 경험의 영역
기제

사건
경험

 

 

 

* 이 글은 로이 바스카의 "1000단어 이하의 비판적 실재론"(<자연적 필연성의 질서>, 17-21쪽)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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