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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비폭력 대화와 평화교육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8. 7. 10. 10:00

비폭력 대화와 평화교육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들어가며 : 갈등에 대하여

 

갈등을 좋아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살면서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누구나 갈등은 피하고 싶어 한다. 갈등이 벌어지면 관계뿐 아니라 마음도 불편해지고 심하면 스트레스로 몸까지 아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의 갈등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 중 막장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대개 온갖 갈등이 날 것 그대로 튀어나오는 형식을 띤다. 불구경보다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에게 벌어지는 갈등은 싫지만 나와 상관없는 타인들의 갈등은 구경거리가 된다. 그런데 나와 상관없는 타인이란 존재할까? 그리고 갈등이란 회피할 수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이란과 미국의 갈등을 우리는 마음 편히 구경만 할 수 없다. 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란을 압박하는 미국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북한 때문이다. 모처럼 화해 분위기 속에서 회담을 이어가는 북한과 미국을 보면서 우리는 별 탈 없이 평화조약이 체결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란은 북한을 향해 미국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북한과 우리가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함께 번영해 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이란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우려스러운 것이다. 이란이 처한 곤궁한 처지가 남의 일처럼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는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 갈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남의 일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갈등은 창조적으로 전환하거나 해결해야지, 회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참는 게 약이 되는 건 아니다. 참고 또 참으면 병들거나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폭발해 폭력이 될 수 있다. 개꼬리 3년 묵어도 황모, 즉 귀한 족제비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갈등 역시 오래 묵혀 놓아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파괴적 갈등이 되어 우리를 더욱 불행해지게 할 수 있다. 통혁당 사건으로 감옥에서 20년을 복역한 신영복 선생님은 큰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작은 싸움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때의 작은 싸움이란 초기 갈등을 뜻할 것이다. 갈등은 가능한 초기에 드러내고 풀어야 한다.

 

갈등의 현상적 원인은 욕구와 욕구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동쪽으로 가고 싶고, 친구는 서쪽으로 가고 싶다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한 개인으로서도 살을 빼고 싶은 욕구와 배부르게 먹고 싶은 욕구가 부딪히면 갈등에 빠진다. 경제발전을 위해 마을에 쓰레기장을 유치하고 싶은 사람들과 환경보호를 위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부딪히면 지역사회에 큰 갈등이 벌어질 수 있다. 영어 ‘conflict’함께(con-)’ ‘부딪히다(fligere)’라는 뜻의 라틴어 ‘confligere’에서 왔다. 우리말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가 꼬이는 것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갈등의 속성을 보여 준다. 바라는 게 서로 다른데 올바르게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면 갈등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에 따르면, 갈등은 눈에 띄는 행위와 눈에 띄지는 않지만 행위 저변에 깔려 있는 태도로 구분된다(갈퉁, 2000: 168). 상대방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무조건 갈등상태인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말이나 행동 같은 행위가 나왔을 때 비로소 갈등상태가 된다. 그러나 갈등의 근본 원인은 구조적인 모순에 있다. 구조적 모순은 갈등의 배경으로서 당사자들의 대립 행위와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모순된 환경이다. 계급 문제와 경제 불평등에 대해 살피지 않고 노사 간의 갈등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서로 욕구가 다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가부장주의 문화에 의해 갈등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군사주의와 승자독식주의, 경쟁주의, 배금주의, ‘나이주의 등 건강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우리는 쉽게 불화하고 갈등이 악화될 수 있다.

 

갈등 해결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나는 대화를 꼽는다. 동물 세계에도 갈등이 있지만 동물들은 대개 힘으로 해결한다. 힘겨루기를 해서 결론이 나야 해결이 된다. 인간에게는 언어가 있고 또 인간은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화만큼 좋은 게 있을까? 내가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에 주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 힘 있는 사람 또는 권력집단은 아예 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인 현실주의는 단지 이데올로기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일부 심리학자들이 현실을 무시하고 독재자를 심리치료하는 것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마치 대화를 통해 세상의 모든 갈등을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낭만적인 태도다.


어쩌면 우리는 동물적 힘의 충돌이라는 바다 위에 대화라는 보트를 타고 항해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대화는 분명 중요한 갈등 해결 방법이지만 낭만주의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노동조합과 소수자 집단, 페미니스트들이 떼쓰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은 기득권 집단이 대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갈등을 부정한다. 그리고 대다수 주변인들은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부인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태도들은 갈등을 파괴적으로 변질시킨다. 파괴적 갈등이야말로 폭력적 상황을 불러온다. 건설적 갈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약자들이 수를 모아 힘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권력자가 대화하는 시늉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힘을 통한 평화

 

상대를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게 하기 위해 약자는 힘을 가져야 한다. 가령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유는 핵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잘했다는 말이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과연 핵무기를 완성하지 않았어도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자고 나섰을까? 어림없는 소리라는 게 그간의 역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냉엄한 현실 앞에서 이상주의는 종종 길을 잃는다. 1차세계대전의 영향 속에서 평화를 꿈꾸던 이상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예방책을 찾기 위해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의 역할을 간과했고, 인간이 합리적일 수 있는 정도를 과대평가했다(베일리스, 2000: 110). 결과는 2차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힘을 통한 평화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본다. 힘이 없는데 어떻게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어떤 힘이어야 하는가이다. 평화를 위한다면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그 힘이 반드시 무력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또 다른 힘들이 존재한다. 갈등 문제를 직시하고 능동적으로 풀어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힘을 사용해야 할까? 간디는 자신의 삶을 오롯이 인도의 독립에 바쳤지만 무장투쟁의 길을 거부했다. 그는 사티아그라하, 즉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진리 추구와 비폭력 직접행동 그리고 자발적인 자기 희생을 토대로 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영국의 잔인함과 폭력성을 세계에 알렸다. 나는 이것을 도덕적 힘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나라도 3.1 만세운동을 통해 도덕적 힘을 보여준 바 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독립 만세운동에 놀란 일제는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에서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통치전략을 바꾼다. 비폭력적 만세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학살하면서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취한 조치였다. 물론 겉보기에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고 행동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경찰 수를 더욱 늘리고 식민통치에 비판적인 언론사를 대대적으로 탄압했으며 이어서 민족말살 통치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3.1운동은 이후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멀리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영향력을 미쳤다고 본다. 이러한 전통은 가깝게는 지난 2016-2017년 촛불시위에도 이어져 우리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힘을 보여주었고, 결국 박근혜 정권은 몰락하게 되었다.

 


논쟁이 아닌 대화를

 

우리는 대화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갈등이 벌어졌을 때 대화는 서로를 이해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의 주변부에 집착할 뿐 핵심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대화는 실패하고 만다. 대화의 목표는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행동의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화는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함께 생각하고 성장하는 데에 기여한다.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결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확신에 대한 집착을 풀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대화가 아니라 논쟁이다.

 

대화는 논쟁과 다르다. 논쟁이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찬반양론의 대결이라면, 대화는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다. 마음을 나누기 위해 어느 한쪽에 서야 할 필요는 없다. 자기 입장을 고정시키기보다 양극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섣부르게 타협점을 찾는 것도 좋지 않다. 우리는 흔히 문제의 해결책을 독점한 채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진정한 대화는 그런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온전함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관점에 대해 진지하게 듣기를 요구한다. 대화와 달리 논쟁에서는 상대방의 주장에서 잘못된 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찾기 위해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논쟁의 주된 의도는 상대방 주장의 결함을 찾고, 그 결함을 노출하고 허점을 찌르기 위해서이다(셔크, 2015: 16). 대화의 목적이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다른 이의 관점을 배우려는 것임에 비해 논쟁은 자신의 관점은 부각시키고 상대의 관점을 폄하함으로써 대화에서 이기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상대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자기 입장을 유보할 수 있는 겸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를 마주하기 두려워 폐쇄된 커뮤니티에서 비난을 쏟아내고, 자기를 내려놓기 두려워 냉소적으로 행동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불행해진다. 본래 대화는 우리 내면에서 먼저 시작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한다. 내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어떤 일이 떠오르면 그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는 게 좋을지 끊임없이 궁리를 한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그러나 혼자 하는 대화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편협해지거나 비합리적인 결론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다른 사람 또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객관적인 시선을 회복할 수 있고,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다.

 


비폭력 대화와 평화교육

 

일상의 대화는 자기표현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수단으로 쓰이곤 한다. 단순히 자신의 진실을 말하기보다는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말하기가 수단에 지나지 않을 때 우리는 정보를 주거나 단언하거나 꾸짖거나 동조함으로써 듣는 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그러나 표현 그 자체에 집중할 때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리고, 자기 안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말한다. 우리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교사에게 우리를 가르칠 기회를 주는 것이다(파머, 2007: 162).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덕적 힘을 강하게 키울 수 있다. 마셜 로젠버그가 제시한 비폭력 대화는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뿌리로 여긴다. 무장투쟁이 아니라 비폭력저항을 통해, 다시 말해 도덕적 힘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끌어낸 간디의 정신은 대화의 방법에서도 유용하다. 조심을 하며 대화한다고 해도 우리는 언제든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또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이미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삶의 방식은 특히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에 깊이 배어 있다.

 

마셜 로젠버그는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폭력적인가?” 이에 대해 그는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르완다와 팔레스타인, 스리랑카 같은 유혈분쟁 지역에서 폭력사태를 수없이 목격하면서도 폭력성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상은 왜 이렇게 폭력적일까? 그것은 구조적 모순 탓이다. 우리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구조에 순응하도록 교육받았다. 이런 사회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 자신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은 것이다. 권력자들이 우리를 나쁘다, 틀렸다라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벌을 받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우리를 좋게 평가한다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느낄 수 있는 힘을 빼앗는 이런 방식의 교육을 통해 우리는 도덕적 주체성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도덕적 주체의 형성은 자아형성의 세 가지 축, 즉 사랑, 존중, 존경에서 나타나는 인정관계와 이를 통해 구축되는 건강한 자기 관계(self-relation)에 달려 있다. 우리는 자신의 구체적 욕구에 대해 적절한 보살핌을 받을 때 사랑받는다고 느끼며, 그렇게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이 될 때 자기 확신(self-confidence)을 얻는다. 우리는 또한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지닌 존재로 인정받아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자기 존중(self-respect) 의식을 얻게 된다. 세 번째 축은 존경(esteem)으로 이는 우리의 독특한 개성과 능력이 정당하게 인정받을 때 나타난다(호네트, 2011: 144-268). 왜곡된 사회 구조 탓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고유한 욕구와 보편적 권리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기 어렵다.

 

우리는 주로 대화를 통해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문제는 우리의 언어가 이미 지배질서에 사로잡혀 있다는 데에 있다. 이때의 지배질서를 현실주의라고 칭해도 무리가 없다. 이것을 군사주의와 연결해 생각해 보자. 군사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며 경쟁적이라고 가정하는 가치체계이다. 따라서 사회질서는 힘과 권력에 의해 유지되어야만 하고, 폭력에 대해서는 더 강력한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본다. 이런 문화는 항상 적을 필요로 한다. 필요하다면 적대적인 대상을 창조해 내기도 한다. 그것은 다른 나라일 수도 있고, 종교나 사상, 인종이 다른 소수 집단일 수도 있다. 적에 대한 태도와 행동은 모두 폭력적이다. 모든 것을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이러한 적대적 대상을 필요로 하며, 이는 다른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낙인찍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군사주의 문화는 남성 가부장제와 관련이 깊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성차별적이다(홍순정, 2007: 62).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생동하는 삶의 언어로 교육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하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교육은 획일적 기준에 따라 아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미워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이 개별화교육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다. 기질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며 추구하는 이상 역시 다르다. 교육은 한 사람이 자신의 동기와 소망에 대해 분명히 인정받을 수 있도록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비폭력 대화는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자각하고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전하는 법을 알려준다. 동시에 상대방의 내면에서 생동하는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그것과 연결되도록 돕는다(로젠버그, 2004: 18).

 

우리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으로 주고받을 때,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삶에 기여하려 할 때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 비폭력 대화는 우리가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습관적이고 자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현재 내가 관찰하고 있는 것과 느끼고 있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의식하면서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화 방법이다. 비폭력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들었을 때도 변명이나 반격을 하기보다는 그 비난 뒤에 숨어 있는 상대방의 욕구를 공감하면서 들어줄 수 있다. 또한 주어진 상황에서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더 효과적으로 서로의 삶에 기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비폭력 대화를 평화교육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며 : 비폭력 대화가 나아갈 길

 

인간은 교육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그 언어를 바탕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 의사소통의 방식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대해 아주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학습해 나간다. 사람마다 기질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악하고 이기적인 태도는 주변 문화를 모방하면서 갖게 된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인간은 동물의 일원이지만 교육을 통해 동물에서 벗어나 인간이 된다. 이때 공감하는 능력과 연민을 느끼는 능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쓰는 일상적 언어이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 폭력적 문화를 습득하게 되지만, 동시에 언어를 통해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평화의 언어를 갖추는 일에 비폭력 대화가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비폭력 대화가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언어적 의사소통에 주로 초점을 맞추다 보니 비언어적 의사소통, 특히 몸에 대한 이야기가 부재한 것이다.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라고도 하는 몸의 언어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풍부하게 전해 준다. 몸을 통한 창조적 활동은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생명과 생명을 연결할 수 있고, 참여자들이 만들어내는 몸 활동은 고유성을 가지게 되어 고유한 존재들이 고유하게 연계되고 특별하며 역동적인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몸을 통한 창조적 활동은 대상을 낳고, 관찰을 낳으며, 거리를 낳는다. 이 거리가 일상화된 권력구조로부터 일시적인 이탈을 가능하게 한다(이대훈, 2016: 36-38). 권력기관이 아무리 피권력자의 몸을 통제하려 해도 완벽한 통제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몸은 지배권력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늘 갖고 있는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고 전환하는 데에서 대화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하고 욕구를 인식하면서 상호간에 도덕적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심화된 대화를 통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악할 수 있으며, 기존의 권력구조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때의 대화는 단지 언어적 의사소통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비언어적 의사소통으로서 신체적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계발할 때 비폭력 대화는 진정한 평화교육의 방법론이 될 것이다.

 

 

참고 문헌

 

김훈태, 교실 갈등, 대화로 풀다, 교육공동체벗, 2017

리사 셔크·데이비드 캠트, 진선미 옮김, 공동체를 세우는 대화기술, 한국 아나뱁티스트 출판사, 2015

마셜 B. 로젠버그, 캐서린 한 옮김, 비폭력대화, 바오, 2004

______________, 정진욱 옮김, 갈등의 세상에서 평화를 말하다, 한국NVC센터, 2016

악셀 호네트, 문성훈이현재 옮김, 인정투쟁, 사월의책, 2011

요한 갈퉁, 강종일 외 옮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들녘, 2000

이대훈, 모두가 모두에게 배우는 P.E.A.C.E. 페다고지 평화교육, , 2016

존 베일리스스티브 스미스퍼트리샤 오언스, 하영선 외 옮김, 세계정치론, 을유문화사, 2009

파커 J. 파머, 윤규상 옮김,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해토, 2007

홍순정, 평화교육탐구, 에피스테메,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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