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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우리는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우리는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8. 2. 8. 10:18
우리는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내가 당신과 똑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말라. 설령 내가 당신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당신이 나의 관점을 뜯어 고치려 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져보라.

같은 상황에서 내 감정이 당신보다 덜하거나 더하다 하더라도, 나에게 당신보다 더 강하게 느끼라거나 더 약하게 느끼라고 각박하게 요구하지는 말라. 또 내가 당신이 의도한 행동계획대로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 나는 당신에게 나를 이해해 달라고 당장은 각박하게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당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할 때에만 나는 그런 요청을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당신의 배우자, 부모, 손자, 친구, 또는 당신의 동료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나의 욕망이나 감정, 신념, 또는 행동을 있는 그대로 허용할 때만 나를 개방할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상태가 매우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올바르게 당신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허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나 자신에 대한 인내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화를 내고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나를 이해함에 있어 당신은 나와 당신과의 차이를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고 나를 변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이런 차이들을 보존하고, 또 발전시키기까지 할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 다르고, 우리가 아무리 상대방을 닦달한다 해도 상대방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 이 책이 강조하는 점이다. 또한 상대방을 변화시켜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것은 어쨌건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들은 다른 것을 원한다. 즉 그들은 다른 동기, 목적, 목표, 가치, 욕구, 충동, 욕망을 갖고 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은 없다. 그들은 다르게 믿고 다르게 생각하고, 사물을 받아들이고, 개념화하고, 인지하고, 분별하고, 이해하고, 숙고한다. 그리고 행동과 감정표현 방식은 욕망과 신념에 지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 David Keirsey, Marilyn Bates <나의 모습 나의 얼굴> 중에서

교육의 목적이 한 인간의 성장에 있는 것이고, 성장은 참된 변화라고 할 때 위의 글에 나오는 '우리는 누구도 다른 이를 변화시킬 수 없다'라는 말은 교사를 절망케 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교사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일 테니까요
교사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변화와 성장을 바라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곧 앞의 그 말에 수긍을 하게 되는 것은, 변화란 항상 자기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변화의 의지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사람은 변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성장의 욕구를 주체적으로 갖는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그 사람이 스스로 변화하고 싶을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겁니다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해서 변화하지 않는다고 힐난할 수는 없겠지요
변화는 강요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이성복 시인은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을 자기 책의 제목으로 삼기도 합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의 시대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같(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타인을 자기와 같(아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신기해 하거나 불쾌해 합니다
'어! 왜 나랑 다르지?'
자기가 배부르면 남도 배부른 줄 아는 게 사람이고, 자기가 좋으면 남들도 좋아해야 마음이 편한 게 사람입니다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범한 사람'을 조금 불편하게 말하자면 '성장하기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대 초에 성장이 멈추는 몸과 달리 우리의 마음은 언제까지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한 늘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자아'가 탄생한다는 21세 이후에는 자기가 자기를 교육시킬 수 있지요
마음 역시 7년을 주기로 하는 결정적인 발달주기가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지향점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해보곤 합니다
인지학일까?
물론 인지학입니다
발도르프교육의 철학인 인지학은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지요
하지만 백이면 백, 인지학은 너무나 어려운 것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도르프교육의 '발'자도 모른다거나 "인지학은 잘 모르지만..." 이렇게 말머리를 꺼내곤 합니다
심지어 "그건 발도르프적이지 않다"라는 말이 유머의 소재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엔 ‘발도르프교육’이나 ‘인지학’이 일종의 진입장벽처럼 느껴집니다
오히려 그 벽 때문에 진솔한 속마음을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체면을 특히 중시하는 한국적 상황까지 더해지면 이건 참 난처한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주장하는 바, '성장'이 우리의 지향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래서 서로의 성장을 이해하고 도와주고 지적도 해주는 그런 문화적인 공동체가 우리 학교였으면 합니다
물론 성장하고 싶지 않다는 분도 계실 테지만, 노골적으로 '성장 따위 필요 없어!' 하는 분이 굳이 발도르프학교에 아이를 보내시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나무가 해마다 조금씩 자라는 것처럼 '성장하는 인간'이 더욱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고, 그래서 각자의 성장이 전혀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담즙질, 우울질, 다혈질, 점액질이라는 네 기질의 유형마다 성장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같은 기질이라 해도 서로 또 다른 것이고, 삶의 과제 역시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도 수업에서 아이들의 기질 파악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하지요
제가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문제제기가 아니라 모든 관계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우리 학교의 이상을 ‘더불어 성장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의 반석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성장한다는 것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성장의 이면에는 늘 부딪힘과 갈등과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성장이란 더불어 살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 때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딪힘과 갈등과 고통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겠지요
그건 누구 한 명, 또는 어떤 한 집단이 잘못해서가 아닐뿐더러, 그냥 아주 자연스럽고 또 어떻게 보면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갈등 없이 성숙해지는 일이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공동체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을 때 소통의 구조는 왜곡되고 신뢰는 균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학교에는 늘 수만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봅니다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요?
무엇이 우리의 반석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꾸만 가혹하게 몰아치고 조급해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이라는 달콤한 말에 취하기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중요할 듯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행복한 교육 공동체 만들기'라거나 '공감과 소통으로 관계 맺기' 이전에,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가?' '무엇이 공동체의 성장을 방해하는가?' '우리는 왜 공감하지 못하는가?' '불통의 기저에 어떤 구조적 모순이 놓여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이 질문 앞에 바로 설 때, '왜 이 훌륭한 발도르프학교가 더 치열한 갈등의 장이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비폭력대화를 기반으로 한 회복적 정의의 실천에 그 실마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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