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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이행기 정의: 인권의 새로운 규율 (1)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이행기 정의: 인권의 새로운 규율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7. 21. 11:07

3. 회복적 정의: 진실과 용서

 

Andrieu Kora

김훈태 옮김

 

회복적 정의의 철학

 

엄벌적 응보주의 패러다임의 결함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행기 정의는 최근에 더욱 온전하고 포괄적인 접근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사회 개선(repair)의 규범적 이론인 회복적 정의는 범죄자보다 피해자의 이익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영향을 받은 공동체를 다시 정의롭게 하고자 한다.(Braithwaite, 1999; Kiss, 2000) 회복적 정의의 기본 전제는 다음과 같다.

 

범죄는 본래 법률의 위반이 아니라 개인 간의 갈등이고 개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지만, 공동체와 범죄자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형사사법은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당사자들의 화해 그리고 잘못의 개선을 더 큰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사법절차는 피해자, 가해자,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회복적 정의는 당사자들의 정체성에 관한 실존적 질문을 제기한다. 서양의 사법 모델에서는 국가가 피해자에게서 갈등을 빼앗았다고 회복적 정의는 주장한다.(Christie, 1998: 318) 그러므로 회복적 정의의 목적은 처벌 방식을 좀 더 합의적이고 참여적으로 만들어서 처벌의 사회적 통제를 민주화하는 것이다.(Dzur, 2003: 6)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은 소년범들의 소규모 범죄에 처음 적용되었다.(Brainthwait, 1999: 7) 분쟁 이후 대규모 잔혹 행위에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이 적용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대체로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Hayner, 1994; Sriram, 2001; Villa-Vicencio and Verwoerd, 2000).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의 창설은 회복적 정의의 기초가 놓이는 순간이었고, 그 이후 풍부한 문헌의 주제가 되었다.(Boraine, 2000; Du Toit, 2000; Krog, 2000; Wilson, 2001; De Lange, 2000; Simpson, 2002; Ntsebeza, 2003; Van der Merwe, 2005; Chapman and Van der Merwe, 2008)

 

진실화해위원회는 과거의 집단 기억이 미래의 폭력으로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가정하는, 전환적 사회 행동의 도구이다.(Du Toit, 2000) 진실화해위원회의 목표는 다양하고 야심차다. 과거의 폭력 행위를 밝혀내고 명확히 하며 인정하기, 피해자의 요구에 대응하기, 공동체적 책임(accountability) 문화를 만들고 법치주의를 존중하기, 제도적 책임(institutional responsibility)과 개혁 가능성의 윤곽을 드러내기, 화해의 전망을 진전시키고 과거의 역사적 갈등을 줄이기 등이다.(Hayner, 2001: 24) 두 종류의 진실화해위원회를 구분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참여 모델(participatory model)에 기초하여 공개 대화와 집단적 인정을 통해 화해를 촉진하는 것이 있다. 또 역사적 해석을 장려하고 새로운 집단 기억의 전파를 분명한 목적으로 하는 교육적 진상조사기관으로서 더 많이 구성되는 것이다. 엘살바도르, 동독, 과테말라의 진실화해위원회는 후자이다.(Nagy, 2008; Beattie, 2008)

 

프리실라 헤이너(Priscilla Hayner)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공통 특성을 열거한다(Hayner, 2001).

 

1. 과거의 일을 다룬다.

 

2. 운영기간은 최대 2년이고 밝혀낸 것에 대한 공개보고서를 제출한다.

 

3. 지속적인 폭력행위의 패턴을 조사한다.

 

4. 국가가 승인한 공식기관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개인의 잘못에 대한 책임(culpability)을 규정할 수 없고, 인권 유린의 범죄자를 처벌하거나 제재할 수 없다. 소환장을 발부할 권한도 없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는 밝혀낸 것을 바탕으로 국가 기관의 광범위한 개혁을 권고할 수 있고 피해자 배상을 제안할 수 있다. 또한 시에라리온에서와 같이 형사재판과 관련될 수 있으며 조사를 도울 수도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대부분 진실을 밝히는 수단으로서, 피해자가 자기 이야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개적 플랫폼을 제공하고, 공식적인 사실 인정을 통해 과거 폭력행위의 역사적 기록을 만들어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및 사법적, 정치적, 교육적, 치료적, 또한 정신적 기능을 결합한다. 대부분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가는 처벌보다 치유와 배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 국민화합을 명분으로 고발과 복수의 욕망을 포기할 것을 요청한다.(Asmal, 1999) 진실화해위원회에 구현된 회복적 정의는 세상을 유기적 전체로 간주하므로 법학(jurisprudence)에 구체적인 원칙을 불어넣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러한 측면이 개인보다 집단을 강조하는 우분투(ubuntu)라는 아프리카의 철학을 통해 반영되었다. 회복적 정의는 용서에 더 큰 역할을 부여하는 더 화해적인 접근을 선호하여 평화에 대한 적대적, 응보적 접근을 거부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격보다는 더 큰 집단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촉진하는 것으로 법률을 규정한다(Boraine, 2000; Allen, 1999). 진실화해위원회의 옹호자들은 대중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개인으로서나 대중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단계라고 단언한다. “사적 이야기는 그 시대 전체에 대한 더 큰 이야기로 직조된다.”(Andrews: 2003, 47) 이로써 개인은 치유될 수 있다.(Phelps, 2004) 앤치 크록(Antjie Krog)은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작고 빨간 불이 빛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마이크는 전체 절차의 근본적 상징이었어요. 거기에서는 소외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말을 겁니다. 우리를 집단적으로 새롭게 결속시키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해지거나 통역되었고, 한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나온 개인적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Krog, 2000: 86)

 

그렇다면 진실은 치유의 길이다. 그리고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는 종종 치료 유형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피해자가 함께 모여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며, 이는 치유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르완다 대량학살의 한 생존자는 프랑스 언론인 장 하츠펠드(Jean Hatzfeld)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존자들은 제대로 된 기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두려움 또는 수치심 때문에 끊임없이 진실이 뒤죽박죽되어 있지요... 생존자들은 작은 모임을 통해 자신들의 기억을 모으고 비교해야 합니다. 조심스레 한 걸음씩, 실수하지 않으면서요.”(Hatzfeld, 2006: 161-62)

 

진실화해위원회는 또한 승인된 형태의 사실조사(fact-finding)로 규정될 수 있다. 증언을 통해 국가의 과거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수립하고, 국가의 역사와 정부의 행위에 대한 공정한 기록을 제공하는 데에 진실화해위원회는 도움이 된다(Nagy, 2002). 물론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러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그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더 적다.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아 공공의 인지 장면(cognitive scene)의 일부가 된 지식은... 단순히 진실일 때 존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특성을 얻는다. 공식적인 인정은 적어도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한다.”(Mendez, 1997: 255) 이 포괄적인 설명을 하나로 종합하는 것의 문제는 그것이 사법의 의미와 재판 자체의 의미를 바꿔버릴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개인을 치유하는 것이 법의 역할인가? 피해자의 감정과 정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클리넥스(Kleenex)* 위원회로 묘사되어 왔다.(Kiss, 2000: 72) 치료적 측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스스로를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할 자격이 있는 시민으로 여기는 생존자들에게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Wilson, 2000; Eisikovits, 2009) “치유에 중점을 둔 회복적 정의는 문제적인 방식으로 초점을 정의에서 치유로 옮긴다. 따라서 사랑과 용서의 언어를 공공의 정치적 장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다시 한번 자유로운 사고방식에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 킴벌리클라크 코퍼레이션의 미용티슈 브랜드로, 여기서는 눈물과 콧물을 닦을 때 쓰는 화장지를 의미한다.

 

 

회복적 정의의 한계

 

a) “진실의 위조

 

위에서 설명한 집단 폭력에 대한 회복적 접근은 몇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그것의 변형이 등장했다. 재판과 마찬가지로 과거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만들기 위해 위원회가 자주 이용되며, 트라우마 이후 국가 정체성을 재건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간주된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시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합의는 가능한가? 이행기 과정에 각 개인이 과거 사실에 대해 고유한 도덕적 관점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한 일인가? (Garton Ash, 1997) 이행기 정의의 목적은 관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목적은 국가가 보증하는 과거에 대한 단일한 진실을 만드는 것과 양립하는가? 따라서 화해의 진정한 의미는 더욱 신중하게 규정되어야 한다.(Hamber and Van der Merwe, 1998; Borneman, 2002; De Greiff, 2006) 과거에 대한 일방적 평가나 법률을 통해 역사적 논쟁을 휩쓸어버리려는 시도는 정의를 유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역사 수업을 위해 법원이 이용될 경우 재판이 쇼가 될 위험은 멀지 않다라고 마크 오시엘(Mark Osiel)은 썼다. “재판이 쇼가 되는 것은 좋은 정치일 수 있지만... 좋은 정치가 반드시 진실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Osiel, 1995: 58) 분쟁 이후 사회는 깊이 분열되며 시민들이 단일 형태의 분쟁에 동의하는 것은 대부분 매우 어렵다. 따라서 분쟁을 일방적으로 읽는 것은 사회를 인위적으로 피해자범죄자로 나누는 위험을 수반하는 한편, 과거 폭력의 역학 관계는 실제로 훨씬 더 복잡하다.(Levi, 1989)

 

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야 하는 집단 기억의 개념은, 이상적일 수밖에 없고 잠재적으로 억압적인 구조를 불러오는 합의를 암시한다. 미셸 푸코가 증명한 바와 같이 집단 기억 자체는 사회 갈등의 역학을 구현하며, “정반대의 기억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의 기억을 통제하고, 그들의 역동성을 통제한다면... 이것은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기억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관리하며,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이 필수적이다.”(Foucault, 1969: 25)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트라우마적인 과거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것에 무엇이 포함되고 또 무엇을 생략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만큼 진실화해위원회는 고도의 정치적 도구이다. 따라서 우즈(Woods)가 국가 또는 공공의 기억을 수행적 행위(performative act)로서 진술하는 것은 정당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우리가 수행한 것보다 적다.(Woods, 1999) 진실화해위원회는 기억의 수행이므로, 위원회가 제공하는 목표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게다가 과거에 대한 공식적 견해는 사람들의 실제 믿음에 적용되기 어렵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평화롭고 민주적인 미래의 내부에 화해라는 목적론적 결말을 결부시킴으로써,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과거를 제시하는 이야기꾼(narrative builder)의 역할을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종종 현재의 모든 등장인물이 우화적으로 기능하는 현대적 도덕극으로 규정된다.(Osiel, 1995) “진보적 구원에 대한 위엄 있는 메타-서사이자, 집단적 파괴와 재탄생의 서사시를 다시 그리는”(Osiel, 1997: 275) 정치적 스토리텔링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체주의 국가들처럼 범죄에 대한 공모 관계가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 있을 때는 그러한 도덕극의 전망이 달라진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만들어진 정당한 이야기는 각 개인의 경험적 다원성을 은폐하면서 과거에 대한 권위적 역사 설명을 하향식으로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Gutman and Thompson, 2000)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제2차세계대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고통은 종류에 따라 다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감각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은 커다란 손실과 시련을 희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희생에 대해 할 수 있는 해석들은 너무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람들을 분열시킨다.”(Jaspers, 2001: 21)

 

단일한 형태의 역사를 강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역효과를 낳을 수 있으며, 과거를 규탄하기보다는 찬양하거나 부정해버리는 경쟁적인 서사의 반동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Lind, 2008) “치유될 수 있다고 믿기 위해, 지나치게 진실을 신뢰하는 것이다.”(Ignatieff, 1998: 186)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다양한 종류의 진실, 즉 서사적 진실, 법의학적 진실, 역사적 진실과 사회적 또는 대화적 진실이 있음을 인식하고 나서야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정보와 믿음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엄청난 괴리를 평가하는 데는 실패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는 사실을 입증하고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거나 사람들이 정보를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따라서 화해를 촉진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 공통 기반을 확립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19965, 한 연구에 따르면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의 41%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흑인 피해자들이 증언할 때 테러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과장되어 있다고 믿었다.(Hamber and Thiessen, 1998) “대부분의 사람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을 말하지 않길 기대한다, 다만 그들 자신의 진실을.”(같은 책)

 

따라서 진실화해위원회가 명분으로 삼는 객관성은 도달하기 어렵고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분노 없이) 홀로코스트 수용소를 묘사하는 것은 객관적인 게 아니라 그들을 묵인하는 것이다.”(Arendt, 1953: 79)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만 생존자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장 아메리(Jean Améry)가 자신의 고통에 객관성이 가능하지 않다고 썼을 때 이 어려움을 반복한 것이다. “나는 갈등에 대하여 도덕적 진실의 포로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흔히 말하는 그런 범죄는, 객관성이 없다.”(Améry, 2002: 52)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특히 전체주의 또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주의) 체제 아래서, 어떻게 자기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를 경험했느냐의 함수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수정하려는 시도, 과거에 대한 단일 형태를 강요하려는 어떤 시도도 위험하며, 모든 이의 궁극적 화해를 바라는 유토피아적 소망 역시 마찬가지이다.

 

 

b) 사면 및 용서

 

또 다른 문제는 회복적 정의와 사면 및 용서라는 절차 사이의 관계에 있다.(Orentlicher, 1991; De Greiff, 1996; Weschler, 1998) 사실상, 진실화해위원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증인을 소환하거나 사건을 재판에 회부할 수 있는 권한, 즉 기소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재판 같은 것은 과거에 대한 비난과 이념과의 단절을 상징하지만, 진실을 말한다면 그 자체로 정의가 실현된다라는 것이 이들의 가정이다. “기억은 정의의 궁극적 형태이다... 진실은 응보이자 억제이며,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인권 침해의 정신적 토대를 무너트린다.”(Huyse, 2002: 327) 따라서 용서는 회복적 정의의 기능과 철학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용서 없이 미래는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Tutu, 2000). 용서는 공동체를 위해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장관을 지낸 케이더 아스말(Kader Asma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더 높은 목표인 진실을 위해 사법, 법원, 재판이라는 형식적인 함정을 신중하게 희생시켜야 한다. 우리는 사법의 고통이 우리나라에 충격을 주거나 변화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법을 희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과거를 정리하기 위해, 대립을 피하기 위해, 즉 진실을 위해 사법을 희생한다.”(in Verwoerd, 1999)

 

그렇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보통 그 자체로 정치적 타협의 일부이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미덕을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한에 포함된 조건부 사면 조항에 확실히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그만큼 응보적 의미에서 사법은 정치적 계산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보통 치유와 화해의 이름으로 국가사면 프로그램과 함께 제공된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목표는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옹호자들은 열망과 예측을 혼동한 것이 아닐까?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정으로 치유, 감정의 해소(catharsis), 진실의 폭로, 그리고 국가 건설 등에서 이익을 보장하는지 정말로 아는 사람이 있을까? , 우리가 그것의 효율성을 의심한다면, 의심스럽고 긴 시간이 필요한 국가적 목표를 위해 피해자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일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화해와 치유를 촉진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또한 많은 경우(예를 들어, 모잠비크) 사면과 망각이 더 실행 가능한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Allen, 1999: 315)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한 많은 피해자는 실제로 재-트라우마를 겪었고, 단순히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진실화해위원회가 적법한 법적 절차를 존중하지 않았다거나, 증거 및 심의 절차의 관습적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종종 공청회에서 검증되지 않은 혐의가 제기되는 것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범죄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권리가 항상 존중받지는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여기서 모순에 빠지는데, 한편으로는 범법 행위를 폭로하려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범법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서 공정한 처우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원회는 적법 절차의 근본적 중요성과 함께 피해자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권리에 대해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증거기준법*은 주로 피해자들과 그들의 치유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의 절차 내에서 완화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진실화해위원회 위원들은 보통 증인들이 법정에 들어설 때, 잔혹행위의 현장을 방문할 때, 증인들과 함께 노래하고 기도할 때, 또는 장례와 추모 의식에 참여할 때 기립한다. 회복적 절차의 비공식성은 공직자들에게 피해자와 함께 공개적으로 슬퍼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재판소의 알비 삭스(Albie Sachs)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투투 주교는 운다. 판사는 울지 않는다.”(in Minow, 1998: 73) 진실화해위원회의 청문회에서 증인의 증언은 법정에서 법적 주장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개인적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그러한 용인(acknowledgment)의 제스처는 중요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그것은 흑인들의 이야기가 말해질 가치가 있고, 공론의 장에서 주의 깊게 존중받으며 다뤄져야 한다는 걸 입증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적법 절차의 위배는 인정(recognition)의 필요성이 더 높기 때문에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니르 아이시코비츠(Nir Eisikovits)가 주장하듯이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인식은 사람들마다 다르다.(Eisikovits, 2009)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순히 그들을 해친 사람들이 처벌되어야 한다는 요구일 수 있다.

 

* 증거법(law of evidence)은 재판에서 증거가 어떻게 쓰이고 어떤 증거가 허용되는지를 규율한 법이다. 재판에서 피고나 원고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증거를 사용하는데, 법관은 이를 바탕으로 발견한 증거를 종합한 결과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의 정도에 이르는가를 판단하게 된다. 증거가 사건과 관련된 사실의 존부에 영향을 미치는지, 증거들이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지, 증거로부터 경험칙, 과학법칙에 따른 합리적 추론을 통해 요증명제(구성요건요소인 사실)에 도달했는가가 증거법의 기반이 된다.

 

존중의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피해가 형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야 한다... 우리들 중 일부에게... 인정이라는 화폐는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처벌이다. 인간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법에 의해 보호되는 시민 구역(civic zone)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구성될 수 있다. 시민 구역에서 폭력의 사용은 엄격한 제재를 받는다.”(Eisikovits, 2009: 17)

 

회복적 정의에 대한 치료적 담론은 건강이 아닌 정의를 요구하거나 자신을 피해자라기보다 활동가로 여기는 사람들을 소외시킨다(Nagy, 2008: 336).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많은 피해자 단체가 현재 기소를 위해 로비를 하고 있고, 사면법을 중단시키려 하고 있으며, “배상이야말로 화해의 필수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Khulumani, 2007)

 

좀 더 도덕적인 기반 위에서, 심리적 이익과 치유라는 명분으로 주장하면서, 진실화해위원회가 수반하는 사법의 희생에 대해 동정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실제로 위원회는 피해자들이 용서라는 시민적 성찬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Gutman and Thompson, 2000: 29)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증언이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아는 게 많을수록 슬픔도 커진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진실이 말해지는 상황이라고 해도 심리적 치유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대화 요법이 반드시 생산적인 것도 아니다. 특히 정권의 잔혹행위에 의해 피해자들이 극도로 어려운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계속 살아갈 때 더욱 그렇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폭력 및 고문 피해자를 위한 트라우마센터는 피해자의 50, 60%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한 후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고한다.(Gutman and Thompson, 2000: 30) 많은 피해자에게 진실은 상처를 치유하지도, 식탁에 빵을 올려놓지도 못하는 사치이다.(Daly, 2008: 31) 복잡하고 사적인 용서 행위에 시민적분위기를 준다는 사실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 보레인(Boraine)과 데리다(Derrida)는 모두 진실화해위원회의 청문회에서 남편의 살인범에 대해 이야기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여성의 말을 인용하여 이 점을 강조한다.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처음 알게 된 그녀는 그 짓을 저지른 남자를 용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정부가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잠시 멈춤) “오로지 제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잠시 멈춤) “그리고 저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in Garton Ash, 1997: 36)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용서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많은 사람이 가족을 죽이거나 강간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심지어 회복적 정의가 자주 의존하는 기독교 전통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반인륜 범죄를 용서하는 것은 또 다른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다라고 덧붙였다.(Jankelevitch, 1986: 21) 그러한 발상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용서가 늘 도덕적으로 적절한 것은 아니며, 범죄를 잊기 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와 화해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종종 범죄자들을 이해하는 것과 같을 수 있으며, 데스몬드 투투가 여러 번 회상했듯이 그들을 우리 중 한 명으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게 순수한 광기일 때가 있다.”(Todorov, 1996: 277) 진실화해위원회의 이해 정신은 도를 넘어서 피해자들에게서 용서 또는 용서를 보류할 도덕적 권리를 빼앗아, 피해자의 법적 배상권을 없애버릴 수 있다. 결국 진실화해위원회는 종종 정치적인 이유로 엄청난 수준의 면책을 허용한다. 데 클레르크(F.W. De Klerk)*와 보타(Pieter W. Botha)**는 결코 책임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오직 한 번, 진실화해위원회와 만났지만 절망적일 정도로 결론이 나지 않았다.(Kiss, 2000: 76) “압제는 나쁜 것이었지만, 더 나쁜 것은 그들이 나에게 용서를 강요하려 한다는 것이다라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피해자인 칼루크웨 모빌라(Kalukwe Mawila)는 말했다.(in Verwoerd, 2003: 264) 진실화해위원회의 작업은 많은 지역의 흑인 사회에 분노를 불러일으켰는데, 그들은 보안군 지도자들이 자신의 범죄를 말하는 대가로 자유롭게 걸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반면 피해자들은 법정에 접근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진실보다 더 원했던 것은 정의였다. - 법정에서의 기소와 징역형”(Meredith, 1999: 315)

 

*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넬슨 만델라와 대타협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끝낸 인물이다. 만델라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 데 클레르크 직전에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국내외의 압력에도 마지막까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용서에 대한 주장은 그것이 폭력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가 증오와 원한을 버리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Tavuchis, 1991; De Greiff, 2007) 공식은 간단하다. “용서는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새롭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화해로 이끈다.”(RLP, 2005: 8) 따라서 화해의 기대되는 이익은 개인이 응보적 정의를 포기하는 게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민은 국가의 존립이라는 명분 아래 분노와 복수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눈에는 눈은 온 세상을 눈멀게 할 수 있다라고 간디는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복수의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용서와 사면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재판, 갱생 조치, 기념비 건립 또는 단순히 잊고 넘어가는 것 등이 복수의 욕망에 대처하는 대안적 방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용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서는 안 된다. 이행기 정의는 도덕적 증오”(Hampton, 1984; Wilson, 2001)의 정당성과 피해자들의 심리적 진전에서 분노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2차세계대전 당시 게슈타포(Gestapo)*의 고문을 경험한 장 아메리는 자신의 원한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이를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는 반도덕적인 과정에 대한 개인적 저항으로 규정했다.(Améry, 1980: 77) 어떤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는 우리에게 그것을 저지른 이들에 대해 그들 역시 사회적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도록 요구한다. 실제로 도덕적 공동체란 무엇을, 누구를 포함하는지, 그리고 용인할 수 있는 선을 어디에 그을지로 규정된다.

 

* 옛 나치스 독일의 비밀 국가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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