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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이행기 정의: 인권의 새로운 규율 (2)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이행기 정의: 인권의 새로운 규율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7. 21. 11:10

5. 결론: 앞으로 나아갈 길

Andrieu Kora

김훈태 옮김

 

망각?

 

이행기 정의에 대해 응보적, 회복적,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가 강조한 몇 가지 약점은 화해와 기억(remembrance)의 추구를 완전히 좌절시켜 버릴 수 있다. 또 대규모 폭력 이후 모든 대응은 불충분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종결 또는 완결이라는 느낌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할 수 있다. “종결은 불가능하다라고 마르타 미노우(Martha Minow)는 썼다. “설사 종결되었다 해도 그것은 영구히 파괴된 이들을 모욕할 것이다.”(Minow, 1998: 4) 실제로 이행기 정의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브루스 애커맨(Bruce Ackerman) 같은 자유주의자들(Liberals)은 한 사회의 도덕적 자본을, 대중에게 법의 한계를 가르치는 데 써버리는 것이 차라리 정의라는 신기루를 쫓아 돈키호테식으로 추구하게 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추구는 재판과 관련된 적법 절차에서 필연적으로 이탈하게 하여 도덕적 자의성의 영속화와 새로운 세대의 피해자 양산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Ackerman, 1991) 이것은 정치적 이행기의 한 도구로서 기억상실(amnesia)을 찬성하는 주장인 걸까?

 

모잠비크와 스페인 같은 국가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망각을 선택했고, 오늘날 성공적인이행으로 여겨지고 있다.(Cobben, 2007) 하지만 르낭(Renan)의 규정에 따르면 국가는 기억들의 풍부한 유산을 공유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현재의 동의, 욕망이자, 공유하는 유산의 가치를 계속 유지하려는 의지이기 때문에 망각은 정치적으로 자살에 가까운 행위이다.(in Eisikovits, 2009: 20) 어떤 나라들은 단순히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즉결 처형과 정화(lustration)*, 신원조회(vetting) 등을 옹호할 수도 있다.(Mayer-Rieckh and De Greiff, 2007; Michnik and Havel, 1993) 우리는 이 선택지가 뉘른베르크 해법이 채택되기 전에 제2차세계대전 이후 연합국들 사이에서 지지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프리카민족회의의 국가집행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진실의 세정력(cleaning power)”에 대해 논의했지만, 당내 많은 이들은 그저 놈들을 잡아 교수형에 처하기를원했다.(Boraine, 2000: 28)

 

* “lustration”은 정치적, 법적으로 이전 정권에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제거하여 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회복하는 행위를 말한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찬성하는 주장은 구미가 당길 수도 있지만, 설사 그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무엇을 잊을 것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 의장 중 한 명인 마리 버튼(Mary Bur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슬레이트를 깨끗이 닦아야 한다(We must wipe the slate clean).* 그러나 우리는 아직 슬레이트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in Boraine, 2000: 5) 이행기 정의는 따라서 적어도 국가가 앞으로 나아가고 앞을 내다보기 위해 잊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 그렇다면 과거를 아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이다.

 

* “wipe the slate clean”없던 일로 하다또는 깨끗이 잊다를 뜻한다.

 

아마도, 더욱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는 대개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아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벌어진 일은 또다시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Levi, 1965: 213)

 

진실의 치유력과 화해력에 대한 논쟁을 넘어, 진실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우리는 그야말로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Sémelin, 2005)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주장했듯이, “[피해자들에게] 빚을 갚는 최소한의 방법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존경할 만한 사람들에 대한 끔찍하고 도착적인 이미지는 기억과 이야기를 통해 망각으로부터 더 많이 구해져야 한다.”(in Borer, 2006: 267)

 

대규모 잔혹행위의 후유증으로 인한 가장 큰 위험은, 실제로 침묵이다. 민주주의는 오직 공적 이성이 지배하는 공적 공간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따라서 대규모 폭력으로 상실한 소통을 재창조할 필요가 있다. 오직 피해자들만을 위해서라도 그렇다, 장 아메리가 경험한 것처럼.

 

고통은 원래 그랬다.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한 사람이 느끼는 방식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비교가 불가능하다. 고통은 소통 능력의 한계를 나타낸다. 누군가가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전하고 싶어한다면, 그는 그 고통을 가해보도록 강요당할 것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 고문자가 되고 말 것이다.”(Améry, 1995: 82)

 

이행기 정의는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한 소통의 기반을 제공하고 미래의 리더들이 이행기 정의를 도구화하지 않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 어떤 식으로든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틈을 더 벌릴 뿐이며, 양측 사이의 편견 없는 소통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그것은 종종 폭력적인 갈등과 긴장의 원인이 되는 타자성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합리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러시아가 소련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 정권이 대규모 주민을 추방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것은 이웃 국가들에게 모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하고 집단 기억을 신화로 바꾸는 효과를 가져온다.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소수민족의 (군사력) 동원으로 이어졌던 대표적 사례가 체첸 전쟁이다.(Williams, 2008) 비록 이행기 정의가 과거에 집착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해도, 강제적인 망각 정책은 극심한 인권 탄압의 시대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실행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인정받지 못하는 불의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새로운 폭력의 악순환을 일으킬 뿐이다.(Walker, 2006a)

 

 

이행기 정의의 범위를 확대하기

 

망각이 실행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라면, 과거를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이행기 정의는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까? 우리가 보았듯이, 이행기 정의는 근래들어 세계 인권 분야에서, 그리고 관습법과 규범적 표준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비판받을 수 있다. 이행기 정의에 대한 법률주의의 영향과 산업”(Theidon, 2009)으로서 이행기 정의의 형성은 공동체 안에 뿌리내린 정의와 동떨어진 정의”(Gready, 2005) 간에 깊은 분열을 초래했다. 취약한 신생 정부에게 과거를 진지하게 다루도록 하는 것이 국제 사회인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은 우려할 만하다. 지나치게 자주, 국제 사회는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관료적이고 획일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한다. 이행기 정의는 서구 자유주의에 매몰되어서 실제로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Nagy, 2008: 275) 그러나 궁극적으로 갈등의 해결책은 갈등이 발생한 사회에 달려 있다. 외부 요인들은 평화의 가능성을 높이는 능력만을 구축할 수 있다. 사회 자본과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체계를 재건하는 것은 사회 기반 시설과 제도를 회복하는 것보다 어렵다. 여기에는 관계를 재정의하고, 공적 숙의를 증진하며, 건강한 시민 사회를 만들고, 치유 절차를 촉진하고, 제도를 신용할 수 있으며 효과적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포함한다.(De Greiff, 2006b) 따라서 최근 문헌에서는 아동 및 성적 폭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이행기 정의에 남아 있는 사각지대와 널리 퍼져 있는 면책 구역을 해결할 수 있는 더욱 차별화된 접근 방식을 주장해 왔다.(Sriram and Ross, 2007)

 

그러나 이행기 정의 자체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제 정의, 책임, 그리고 과거를 다루는 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Scheffer, 2001) “문제는 잔혹행위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이다.”(Nagy, 2008: 276) 어떻게의 문제에 대한 현재의 접근 방식은 이행기 정의의 범위 확대에 찬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행기 정의는 이야기하기의 한계를 정하고 그밖의 것들을 배제하는, 본질적으로 선택적 과정이자 수행적 도구이다. 그렇다면 근본적 질문은, 이행기 정의가 이행하는 출발지(from)와 도착지(to)가 무엇이냐는 것이다.(Bell and O’Rourke, 2007: 35) 폭넓게 이해하자면, 그 틀(framework)은 우리가 배상 문제에서 보았듯이, 종종 이 그림에서 제외되는 구조적이고 젠더에 기반한 폭력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행기 정의는 평등보다 자유(freedom and liberty)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자유주의적-법률주의적 패러다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사회-경제적이고 젠더적인 갈등의 뿌리를 약화시킨다.(Mani, 2007: 151)

 

이행기 정의와 이행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지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래서 북반구의 민주주의 국가도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사회는 이행기에 있다”(Kiss, 2000: 92)는 것의 인정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사회조차도 인정받지 못한 과거의 불의에 대한 부담이 있는데, 그 영향은 부식성이 있고 깊다. 호주가 원주민 아이들을 가족에게서 강제로 분리시켰던 것이나 미국이 흑인들에게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영향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민주주의 국가들을 계속해서 좀먹고 있으며 끝없는 폭력과 불신의 악순환에 기여하고 있다.(Brophy, 2006) 프랑스 식민지의 유산, 특히 알제리는 딱 들어맞는 사례이다. 호주, 미국 또는 프랑스 같이 자유 민주주의가 잘 확립된 국가들을 이행기국가로 분류하는 것은 놀라운 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정의를 부인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행기 정의에 대한 더욱 정의롭고 비서구적인 이해의 전제 조건이 된다.

 

 

숙의 민주주의를 증진하기

 

a) 신뢰와 화해의 의미

 

이행기 정의의 많은 규정 및 실제적 문제는 이행기 정의가 설정한 목표에 달려 있다. 그것은 우정, 사랑, 용서로 이해되는 화해일까? 아니면 단순히 치명적이지 않은 공존”(Mendelhoff, 2004: 365)인 걸까? “거리에 먼지가 가라앉을 때, 총격이 멈출 때, 사람들이 서로의 멱살을 풀어줄 때, 감사하라. 그걸로 충분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화해위원회의 배상 및 갱생 위원회의 한 위원이 외쳤다.(Meiring, 2000) 화해에 대한 이 첫 번째 얄팍한설명은 화해를 단순한 방식으로,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것”(Borneman, 2002: 281), 소통하거나 용서할 필요 없이 공존하는 방법으로 본다.

 

단순히 말해 [화해란] 과거의 적들과 함께 사는 방법 찾기를 의미한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사랑하거나 용서하거나 과거를 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공존하고 우리 사회를 그들과 공유하는 데 필요한 협력의 정도를 발전시켜 우리 모두가 분리되어 있었을 때보다 함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Huyse, 2003: 12)

 

화해에 대한 이 얄팍한설명은, 심층적이고 실질적인 어떠한 합의도 토론과 차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위한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Nagy, 2008) 민주적 관행, 절차적 합의 또는 하버마스가 말하는 헌법적 애국심”(Habermas, 1994: 134)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얄팍한 연대가 형성될 것이다. 하나의 국가적 서사를 강요하고 위에서부터 실질적인 연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민주주의적 다원성을 훼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얄팍한 설명은 대규모 폭력 이후에도 너무 추상적으로 남을 수 있다. 분쟁 이후의 사회가 화해라는 대단치 않은 목표에 만족할 수 있을까? 이전의 적들 사이에서 신뢰가 진정으로 엄격한 절차적 규칙에 기초해 발전할 수 있을까? 더 깊이 있게 필요한 건 없을까?

 

회복적 정의의 지지자들은 화해가 얼굴과 얼굴을 맞댄 화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더욱 친밀하고 두터운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해를 두터운 연대로 이해한다면, 이행기 정의에는 실질적인 규칙 제정의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한 역할은 대규모 잔혹행위의 후유증을 다룰 때 필수적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모든 한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크 세멜린(Jacques Sémelin)이 증명했듯이, 대규모 폭력은 모든 것이 가능한 파괴의 세계이며, 모든 규범이 뒤집어져 처벌받지 않는 것이 규칙이 된다.(Sémelin, 2005: 285) 따라서 대규모 잔혹행위의 후유증 속에서, 공동체는 잘못된 피해 의식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활하고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할 수 있는, 인정되고 공유된 규칙이 있다는 도덕적 신뢰를 위반하게 된다. 이러한 신뢰는 모든 공동체에 필수적이다. 사회의 잃어버린 규범적 토대를 재확보하면서 이행기 정의는 사회의 규범적 토대와 공동체 구성원의 규칙을 재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Walker, 2006b: 190)

 

b) 숙의 연대

 

두터운 화해와 얄팍한 화해 사이의 이러한 긴장을 극복하기 위해, 아마도 우리는 탈전통의 도덕적 방식으로 이행기 정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실질적인 특정 규범에 합의하지 않아도 도덕은 실제로 사회화의 상호-주관적인 과정에서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갈등하는 사회에서 사라진 초월적이고 실질적인 도덕성은 하버마스적 방식인 내재적 숙의 과정으로 대체될 수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대중의 주권에 대한 절차적 개념 내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으로 규정된다.(Habermas and Rawls, 1997: 186) “헌법적 애국심의 개념은 이 아이디어를 잘 반영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사회적 연대는 자유주의 헌법에 내재된 도덕 원칙에 대한 시민들의 명시적 참여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절차상의 제약을 통해 조직된 문명적 의견충돌의 산물이다.(Habermas, 2001: 259) 이러한 숙의 정치 모델은 철학적으로 하버마스가 주관주의 패러다임을 거부한 데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는 이러한 패러다임이 언어에 의해 중재되는 상호주관적이고 소통적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행기 정의의 목표는 대규모 잔혹행위의 후유증 속에서 이러한 담론적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다.(Habermas, 2001) 이렇게 상실된 의사소통을 다시 제자리에 놓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최소한의 공통 언어나 규범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용서를 구하거나 베풀 수 없게 된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이에게 내가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라고 말을 한다 해도, 내가 그를 이해하고 그가 나를 이해한다면, 화해의 과정은 시작된 것이다.”(Derrida, 1999: 7)

 

그렇다면 이행기 정의는 숙의의 상호주관적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화합, 집단 기억, 실질적인 진실로서 화해를 이루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조금은 덜 야심차게, 합리적 의견 차이를 권장하는 동시에 신뢰를 증진할 평화로운 대화 메커니즘의 조건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평화 건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행기 정의는 국가 건설보다 사회 건설에 더 주력할 것이다.(Yordan, 2009) 자유주의적 평화 건설의 필수요소로 남아 있기 위해 이행기 정의는 과거의 주요 교훈을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 하며, 사실에 대한 세계적 메타 이야기(meta-story)를 제공하려 하거나 모든 이의 화해를 도모하려 해서는 안 된다. 토론과 의견 차이를 허용하는 방식,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 같은 내용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대규모 폭력 이후에 형성된 연대는 실질적인 것보다 더 절차적이고 담론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거트만과 톰슨(Gutman and Thompson, 2000)도덕적 의견 차이의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반영해야 한다. 과거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공통 기반을 찾고,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상호 존중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들이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서로 정당화려고 노력하고, 의견 차이를 해결할 수 없을 때에도 상호간의 사업활동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도록 요구하는”(같은 책), 상호주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이행기 정의는 안정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이러한 숙의와 평화적인 의견 차이를 지지해야 한다. 따라서 논쟁을 환영하고 최종 판단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원주의와 관용의 이름으로 이행기 정의가 폭력을 부정하거나 미화하는 것을 포함해 과거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든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위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위험성은 사실에 대한 단일한 진실이 규명될 가능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대량학살은 다양한 해석에 개방되기를 바라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다. 합의점을 찾는 것이 반드시 파시스트 정치의 기초”(Lyotard, 1983)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행기 정의는 과거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더라도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여전히 서로를 동료 시민으로서 존중할 수 있는지를 예시할 수 있고 또 예시해야 한다. 진실과 화해는 잘해봤자 잠정적인 것이고, 정치적으로 권위 있는 합의보다 갈등과 논란을 통해 추구되는 것이 낫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니면, 마이클 이그나티에프(Michael Ignatieff)가 말했듯이, “진실위원회가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공적 토론에서 제지 없이 유포될 수 있는 거짓말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Ignatieff, 1998: 178) 설령 옳지 않더라도 타인의 견해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시민들이 서로를 공동 민주주의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려는 의지의 건강한 표시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이행기 정의 메커니즘의 일차적 역할은 달갑지 않은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불가피하고 지속적인 갈등과 차이들이 최소한 단일한 이해의 세계 내에 존재하도록하는 것이다.(Asmal, 1999: 46) 그래야만 정치가 진정으로 재개될 수 있다.

 

숙의 민주주의의 도구로 맞춤화된 진실화해위원회는, 제대로 논의도 하지 못한 채 유죄와 무죄 사이의 이분법적 선택에 의존하는 재판과 응보적 정의에 비해 명백한 사회적 이점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진실화해위원회는 담론적이고 교훈적인 메커니즘으로서 합리적 의견 차이의 범주에 속하는 상충되는 견해들을 권장할 수 있고 또 권장해야 한다. 물론 진실화해위원회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진실화해위원회 자체가 민주적 제도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화의 필수요소가 부족한 국가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돕기 위한 제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에라리온에서와 같이 재판과 진실화해위원회를 조심스럽게 조합하여 빈곤 완화를 위한 정치적 조치를 함께 취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Valji, 2009)

 

결과적으로 과거의 학대사건들을 처리하기 위한 일괄타결적인 해결책은 없다.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에 따라 한 국가에서 작동하는 것이 다른 국가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양한 패턴에 따라 다양한 접근 방식이 필요할 수 있다. 사실 대규모 폭력또는 대규모 잔혹행위와 같은 표현들은 실제로 다양한 형태의 정의를 요구하는 다양한 학대사건을 은폐한다. 이행기 정의는 매우 빠르게 하나의 학문 분야가 되는 데 성공했지만, 10년이 넘도록 가장 기본적인 원칙과 가정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기억 = 더 많은 진실 = 더 많은 정의 = 화해에 따라 완전한 기억이라는 폭압은 다시 검토되고 미묘한 차이를 돌아봐야 한다.(Theidon, 2009: 1) 한 문화의 철학적 토대는 그 문화의 과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그것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소이다.(Aukerman, 2002: 92) 예를 들어, 기소와 용서 사이의 선택은 이러한 잘못들에 대한 비난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실존적 질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가 처벌하는 방식과 우리 스스로에게 그 행동을 나타내는 방식은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킨다.”(Garland, 1990: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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