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과 음모론 2 본문
인지학과 음모론 2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인지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주제는 간단하지 않다. 인간학을 중심으로 영적 세계관을 제시한 인지학은 교육학뿐 아니라 농법, 의학, 약학, 특수교육학, 건축, 연극, 미술, 음악,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통찰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지학은 철학인가? 루돌프 슈타이너는 인지학이 자연과학과 똑같은 정신과학임을 밝힌다. 과학이 철학과 다른 것은, 그것이 사상가의 주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가를 실험하고 검증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인지학에서 말하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실제로 교육을 해보고 농사를 지어보면 알 수 있다. 100여 년 전에 나온 인지학적 교육학과 농법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지학은 철학이 아닌 것처럼 종교도 아니다. 영성을 다루고 추구하지만 믿음의 영역이 아닌 탐구의 영역인 까닭이다. 여기에 혼란이 있다. 영성과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영성이 종교의 전유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물질주의에 침윤된 주류 학문은 물질 이외의 범주, 특히 영성을 진지한 학문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생각하는 학문 또는 과학은 19, 20세기에 힘을 발휘했던 경험주의 또는 실증주의 과학이다.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만이 실재라는 흄(David Hume)식 착각을 바탕으로 과학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자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탐구를 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 이면에 있는 현상과 실재의 인과적 힘이다.
과학자들은 어떤 현상을 벌어지게 하는 기제와 체계를 탐구한다. 이 세계는 실험실처럼 폐쇄체계가 아닌 개방체계인 까닭에 그들은 조심스럽고 단정짓지 않는다. 개방체계는 수많은 기제와 체계가 관련되기 때문에 답답할 정도로 신중하게 탐구를 진행한다. 게다가 고독하게 혼자 하는 작업도 아니고 동료평가를 통해 상호통제를 한다. 이것이 철학자와 과학자의 차이이기도 하다. 물론 철학자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헛소리가 되지 않도록 레퍼런스를 중요하게 여긴다. 플라톤이 무슨 말을 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주장을 펼쳤으며, 프로이트가 밝혀낸 게 무엇인지를 말하며 자기 주장을 끼워넣는 식이다. 그러나 음모론자들은 그런 것을 다 무시한다. 그들은 맥락없이 이것저것을 뒤섞고, 사이다처럼 단순 명쾌한 설명, 간단한 도식으로 대중의 관심을 끈다. 대중이 듣고 싶은 것 또는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확증편향식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인지학이 과학이라면, 게다가 물질세계뿐 아니라 영혼세계와 정신세계의 존재를 전제하는 정신과학이라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세계를 마주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의 성과를 모두 수용할 필요가 있다. 슈타이너는 기존의 자연과학과 대립하지 않았다. 다만 물질주의에 경도된 경험주의적 과학을 비판하면서 영혼세계와 정신세계가 실재함을 주장했다. 근대교육이 실패로 귀결되는 것 역시 인간의 물질적 신체만을 다룰 뿐, 영혼 및 정신의 영역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인지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과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자연과학에 대해 반감을 갖고 합리적 사고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지학은 자연과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경험주의적 과학의 한계를 지적할 뿐이다. 인간의 경험 이외에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만 겸허하게 인정하면 된다.
최근에 루돌프 슈타이너의 중요한 교육학 강연이 연속으로 출간되었다. <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과 <청소년을 위한 교육 예술>이다. 훌륭한 번역과 별개로 번역자의 후기를 읽으며 우려가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의 후기에서 번역자는 코로나19 팬데믹의 대처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러면서 자연과학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데, 자연과학이 이제 "절대 권위의 종교적 위상을 얻었다"며 "과학의 승리가 곧 인류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번역자는 "자연과학적 방법은 그 원리상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취급하고 기계화하도록 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과학에 대한 번역자의 편견을 드러낼 뿐이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공중 보건의 기초에 해당하고,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되어 대중도 받아들인 (불편하지만) 합의된 의무사항이다. 전염병 확산을 막는 일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고, 가장 기초적인 층위에 물리적으로 전파를 막는 것과 백신 접종이 있다. 여기에 사회적 거리두기와 면역력 증진을 위한 노력, 따뜻한 관계의 유지, 긍정적 사고 등이 다층적으로 요구된다. '백신만 맞으면 된다'라고 편협하게 생각하는 과학자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정부가 인정하는 특정 과학자와 다른 생각을 말하면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가?"라는 말은 과학이 과학자들의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듯하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과학은 독점적이지 않다. 모든 과학자가 해당 현상에 대해 실험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민주적이다. 특정 과학자가 엉뚱한 생각을 말했을 때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은 그 과학자가 올바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부의 인정"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음모론에 가깝다. 이러한 우려는 <청소년을 위한 교육 예술>의 후기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반복된다. 이 책에서 번역자는 기후위기의 원인이 인간들의 무분별한 에너지 소비, 즉 지나친 탄소 배출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주장을 펼친다. 얼마 전에 나온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과 비슷한 주장으로 보이는데, 이 책은 실제로 많은 과학자가 지적하듯 심각한 오류로 가득 차 있다.
"요즘에는 서양의 특정 권력 조직이 인정하는 과학자의 이론만 진실로 인정된다. 그런 과학자들이 탄소, 특히 '인간이 만들어내는 탄소'가 인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 하니 전 세계 국가들은 '저탄소 산업 정책'을 펼치고 각 분야마다 탄소 감량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매스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일반인들도 기온이 평년에 비해 조금만 높아도, 어디서 집중 호우가 일어나도, 태풍이 조금 빠르거나 늦어도 모두 탄소 증가로 인한 기후 변화를 탓한다. 정말로 기후 변화가 그렇게 치명적으로 일어나는지, 그 원인이 정말로 탄소인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아니다. 그런 질문을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과학자도 많이 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면, 즉시 '기후 부정자'라는 어불성설의 단어로 낙인 찍혀 학계에서 퇴출당한다. 지난 2020년 이래 '코비드19 조처'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코로나 부정자'로 낙인 찍어 사회적으로 생매장한 것처럼 말이다." (pp. 259-260)
오랫동안 루돌프 슈타이너의 원서를 꾸준히 번역해 주신 번역자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혹여나 독자들이 인지학을 음모론의 일종으로 볼까 두렵다. 번역자가 한 말들은 음모론자들이 주로 하는 말인데, 왜 이런 신념을 갖게 되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기 때문에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구분하기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특정 권력 집단을 통해 기정사실로 제시된 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무시되거나 범죄자로 취급되는바, 진실과 거짓을 구분했다 해도 공개적으로 드러내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극성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하고 내적 용기를 북돋는 것이 바로 인지학이다." 죄송하지만 인지학은 음모론이 아니라 진정한 과학을 추구한다는 말씀을 간곡히 독자들께 드리고 싶다. 인지학은 정신과학이며, 자연과학을 포괄하는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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