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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 시대와 명상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회복력 시대와 명상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10. 3. 15:17

회복력 시대와 명상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공감의 시대>, <소유의 종말> 등을 쓴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최신작 <회복력 시대>에서 인류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음을 알립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발전(progress)의 시대에서 적응성이 중요한 회복력(resilience)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를 추구해온 인류는 자연자원을 착취하고 생태계를 파괴한 끝에 기후위기라는 자연의 역습을 마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근대문명은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라고 믿었지만 자연의 힘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경제발전을 지상과제처럼 여기며 살아온 우리는 발전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경제란 무엇이며, 지구에서 다른 생물종과 공존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 새롭게 질문하고 개념을 재정립할 때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기후위기와 팬데믹의 혼란은 아직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대혼란에 대처하기 위한 질문은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입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과거의 질문과는 다릅니다. 이제는 생존 그 자체를 위해 그동안 착각해온 인식들을 점검하고 실재에 맞게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힘은 회복력 또는 회복탄력성입니다.
 
인류가 자연을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자연과 분리된, 개별적 존재라는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태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라는 게 진실입니다. 인간의 생체리듬은 지구 및 우주의 리듬에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의 건강이 동식물 및 환경의 건강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원헬스 개념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생태학자뿐 아니라 정치학자, 경제학자, 교육학자 들도 ‘생태적 전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시대적 가치와 체계가 광범위하게 변화될 수밖에 없는 지금은 사회학자 뒤르케임이 말한 것처럼 ‘아노미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노미’란 기존의 지배적 규범이 붕괴되었음에도 새로운 규범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사회적 혼란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교육계의 혼란도 이러한 아노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교육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입시교육이 주류일 수 없습니다. 교육은 시장과 국가를 위해 인재를 개발하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육기관은 시장화와 사법화의 흐름에 저항해야 하고, 경제와 국가의 종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육은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고유한 개인들의 내적 소질과 소명을 이끌어내는 정신-문화행위입니다. 동시에 교육은 인간을 이기적 존재가 아닌, 사회 및 생태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관계적 존재로 키워내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회복적 교육이 갈 길입니다.
 
리프킨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주류였던 금융자본이 쇠락하고 생태자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경제질서가 부상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것은 금융자본주의에서 생태자본주의로, 자본주의가 그 이름만 바뀌는 수준이 아닙니다. 처벌 중심의 응보적 사법이 관계 중심의 회복적 사법이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는 박애를 추구하는 회복적 경제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경제의 본질은 자유롭게 경쟁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발전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경제는 서로가 서로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노동을 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생산물을 필요한 만큼 나누는 호혜의 행위입니다. 궁극적으로 미래 사회는 기본 소득을 바탕으로 한 우애와 연대의 경제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사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를 고려한 유기적 경제 모델입니다.
 
개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 사회 구조에 있기 때문에 생태적 전환 이후의 회복력 시대에는 폭력이나 범죄 같은 문제들이 상당 부분 감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사회 변화를 이끄는 것이 행위 주체인 개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변화 모두를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회 변혁(전환)만큼이나 개인의 회복력을 증진시키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 혼란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지만 절망에 빠져 무기력해지기보다 희망을 일궈내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사회 구조의 모순을 직시하는 한편 개인적 삶은 사랑으로 가득 채울 때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나옵니다. 사랑과 같은 긍정적 감정은 자기통제력을 키우고 관계능력을 향상시켜줍니다. 사랑은 동일시, 즉 동일성(identity)의 상태입니다. 타인 또는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관계가 형성됩니다. 우리의 자아는 확장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한다는 것은 자아를 점점 더 확장하여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님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호감을 느끼는 아이 또는 학부모뿐 아니라 반감이 드는 아이 또는 학부모에게까지 우리의 자아가 확장될 수 있다면 관계의 어려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입니다. 동일성은 계속 확장하여 인류 전체와 생태계 전체를, 나아가 우주 전체를 아우를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회복탄력성 개념을 꾸준히 소개하고 연구해온 김주환 교수는 <내면소통>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꾸는 힘이 불굴의 의지가 아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근력에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몸의 근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마음근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명상을 해야 합니다. 최신 과학연구들을 토대로 그는 몸과 마음의 모든 병이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면소통 명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내면소통은 ‘자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아의식의 본질은 나의 주관적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내면소통은 내가 나와 하는 소통으로, ‘나’의 작동방식이자 ‘나’의 생성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소통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무엇이고, 객체로서의 ‘나’는 무엇일까요? 뇌과학과 심리학에서는 여러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세 가지 차원의 자아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특정한 경험을 하는 경험자아’와 ‘경험한 것을 기억으로 축적하는 기억자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자아나 기억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있습니다. 기억자아는 우리의 일상적 자아정체성을 의미하며, 배경자아는 일상적 의식 저편에서 인식의 주체로 존재합니다. 배경자아는 나 자신을 알아차리는 존재로서 늘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내면소통 명상은 경험자아나 기억자아가 ‘나’라고 여기는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하게 존재하는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그럴 때 마음근력과 회복력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비판적 실재론을 창시한 과학철학자 로이 바스카는 그러한 배경자아를 ‘초월적 자아’라고 부릅니다. 내면의 ‘기저 상태(Ground State)’라고도 하는 초월적 자아는 우리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말하는 자아들과 다른 차원입니다. 파편화된 자아들, 즉 서너 개 또는 예닐곱 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쉴새없이 떠들 때 그 목소리들을 듣고 있는 존재가 초월적 자아입니다. 우리 내면에서 올라오는 생각, 감정, 경험, 기억, 행위 등은 경험자아나 기억자아라는 화자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소음입니다. 우리가 배경자아 또는 초월적 자아로서 묵묵히 듣고 있을 때, 어느 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고요해집니다. 이때 우리는 행위주체로서 파편화되지 않은 자아, 강건하고 단일하며 통합된 자아를 회복하게 됩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존재 역시 기저 상태를 갖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기저 상태를 공유하며, 동일성의 층위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동일성은 사회적 삶 속에서 차이보다 우선합니다. 모든 존재의 깊은 내면에 자리한 동일성에 대해 많은 종교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그것을 불렀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조건 없는 신의 사랑’, 힌두교에서는 ‘순수 지복’, 불교에서는 공(空) 또는 불성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랑과 창조성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사랑은 우리의 기저 상태입니다. 13세기 수피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이것을 아래와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바람이 불면 숲의 나뭇가지는 모두 다른 몸짓을 보이지만,
흔들리면서도 그들은 하나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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