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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사회를 꿈꾸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10. 17. 23:15

회복적 사회를 꿈꾸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사회가 병들었는데 개인이 홀로 건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회 전체에 갑질문화가 만연해 있는데 학교만 건강한 문화일 수 없습니다. 차츰 물이 차오르듯 이제는 학교마저 소위 ‘진상 고객’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알량한 권력만 쥐고 있어도 갑질을 일삼는 ‘진상’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이런 갑질문화로 노동자가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자살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교육기관에서조차 그것이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자기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향해 무례와 억지를 쏟아내는 이들의 사례를 보면 처음에는 반감과 함께 응보 감정이 듭니다. 똑같이 고통을 겪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아보면 이들은 사실 병든 사람이고 처벌보다 오히려 치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사회 시스템 안에서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장치, 즉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겠지요. 그런데 그 장치가 사법적인 처벌에 국한된다면 갑질문화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갑질문화를 양산하는 토양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지 않는 병든 사회, 즉 응보적 사회에서 갑질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회로서의 회복적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물질적 추구뿐인 세상에서 회복적 사회의 이상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는 결국 이기주의로 귀결됩니다.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며, 사회를 파편화시킵니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존감 중독에 빠져들게 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이 분리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독과 우울은 병적 상태가 됩니다. 회복적 교육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교육적 시도입니다.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하고,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의사소통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로 연결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사회의 참된 실상을 인식한다면 분리된 것들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고, 여기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사회삼원론을 통해 이기주의를 극복하려면 한 사람의 능력과 경제적 보상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능력은 자유롭게 발휘하되 경제적 보상은 기본적인 삶이 가능할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욕구를 가진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입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욕구를 채워 주며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생존이 불가능하지요. 또한 다른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욕구와 능력은 별개의 영역입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더 많은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거나, 능력이 없다고 해서 아무런 욕구도 채울 수 없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욕구와 능력 외에 책임이라는 또 다른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아가 독립한 존재인 어른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맺은 약속들을 책임 있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은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아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한편 책임감을 키워 주는 일입니다.
 
∙ 욕구 : 우리는 욕구를 가진 존재로 타인을 돕고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 능력 :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한다.
∙ 책임 : 우리는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다.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인간의 권리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신분질서가 타파되었고,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으며,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었습니다.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과 같은 약자를 위한 복지가 확대된 것도 민주주의의 발전에서 중요한 업적이었습니다. 이제는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경제 민주화가 민주주의의 주요한 의제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능력이 없거나 일을 못하는 상황이더라도 사회는 기본소득을 통해 개인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이라고 한다면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치거나 죽을 위험이 없는 안전한 일터에서, 학벌과 관계없이 기본 생활이 가능한 임금을 받으며, 인권이 보장되는 노동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당장 어린이와 청소년을 괴롭히는 입시 지옥이 사라질 것이고, 실직과 해고, 취업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며, 갑질문화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이상을 ‘정의로운 경제’ 또는 ‘회복적 경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회복적 정의 운동은 사법 영역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 교육과 같은 정신-문화 영역, 그리고 경제 영역까지 확장되어서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사회삼원론에 따르면, 사회는 경제 영역과 문화 영역, 그리고 정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볼 때 문화 영역이 사회의 상부 구조라면 경제 영역은 하부 구조이고, 사법 및 정치 영역은 그 둘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과 회복적 정의를 연결할 때, 우리는 회복적 사법(정치), 회복적 경제, 회복적 교육(문화)에 대한 이상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중요한 원칙은 한 영역이 다른 영역들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이 시장화되거나 사법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슈타이너의 개혁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와 문화의 분리
정부가 문화를 통제할 수 없도록 한다. 사람들의 사고와 교육, 신앙에 대해서 국가가 간섭할 수 없다. 특정 종교나 이념이 국가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교육과 문화의 이상은 자유와 다원주의이다. 어린이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다양한 철학의 학교를 폭넓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와 문화의 분리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어야 하는 것처럼 도서관과 박물관 같은 문화시설은 누구든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에서 연구 결과는 상업적 이해관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누구든 가족의 경제적 형편에 상관없이 유치원부터 고등교육기관까지 무상으로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국가와 경제의 분리
특정 인물이나 기업이 돈으로 정치인을 매수하고 법질서를 왜곡하는 행위를 막아야 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이용해 기업가에게 호의적인 일을 하고 그로 인해 부를 얻어서는 안 된다. 검찰이나 사법부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개인을 경제 활동에 흡수시켜 단순한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인간은 상품이 아니며 자본의 노예로 전락할 수 없다.
 
슈타이너는 프랑스 혁명의 표어인 “자유, 평등, 박애”가 사회적 삶의 세 영역에서 각기 고유한 이상을 지닌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또한 능력, 책임, 욕구라는 인간의 세 영역과 관련이 됩니다.
 
∙ 정신-문화 영역에서의 자유 -> 능력
∙ 정치-사법 영역에서의 평등 -> 책임
∙ 경제 영역에서의 박애 -> 욕구
 
사회가 조화롭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세 영역이 모두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며, ‘발달하는 과정에서 서로 수정할 수 있도록’ 세 영역에 충분한 독립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국가기관이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로 삼권 분립되어 있듯이 사회 전체도 문화 영역과 정치 영역, 경제 영역으로 삼분화되어야 합니다. 중앙집권화된 단일 권력 구조는 독재적 지배 형태를 낳으며 사회적 재난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근대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확립되고, 정치적으로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봉건적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우긴 했지만 근대사회의 행보는 국민국가의 형성과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확립이라는 큰 틀에 의해 규정됩니다. 개인의 자유, 생명, 재산을 불가침의 소유권으로 보는 로크의 사회계약설은 근대사회의 성립에 중요한 사상적 기조가 되었지요. 자본가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근대사회는 국가주권이 강화되었고 형식적인 법실증주의가 발달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근본적으로 이기주의를 지향하며, 구조화된 불평등을 가져옵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인류는 풍요를 구가하는 듯했지만 오늘날 기후위기, 정치위기, 경제위기 등 여러 위기 상황에 부딪히면서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는 지금 몰락과 전환이라는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를 바꾸고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 또는 전환적 정의가 힘을 얻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중 하나는 교육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교육은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회복적 교육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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